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50화 (150/917)

#150

1.

밤늦은 시간까지 시우와 술자리를 한 샤론은 그날 오랜만에 잠자리에 들었다.

최근 며칠 사이에 호문쿨루스를 4마리나 잡으면서 이번 분기 상납금도 확실하게 충당했다.

말로만 듣던 치맥을 배불리 먹었고 외로운 타지 생활 중 처음으로 친구도 사귀었다.

그래서인지 몇 개월 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 위에 누워서 제대로 눈을 붙여보는 것 같다.

샤론도 원래는 제법 규칙적인 수면 패턴을 가진 마녀였다.

하지만 거액의 빚이 생긴 이후에 아르바이트, 사냥, 각종 자잘한 돈벌이를 해야 했던 탓에 도저히 맘 편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샤론의 수면시간은 마법 연구시간으로 대체되었다.

빚만 갚는다고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마녀의 본분은 마법을 연구하는 것임은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현재 샤론의 위계는 선대 에버그린으로부터 3단계나 떨어진 17 위계이다.

낙인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불완전계승’이었다.

낙인에 남겨진 마법적 지식이 완전히 날아가는 것은 아니니 언젠가는 되찾겠지만 그것만을 믿으며 연구를 소홀히 하기에는 그녀를 믿고 낙인을 맡긴 선대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그래도 간만의 단잠.

달콤한 몽롱함 속에서 샤론을 깨운 것은...

-쿵쿵쿵!

“서대문구청에서 나왔습니다! 안에 계시나요?”

정해진 규율과 법규를 자비 없이 집행하는 냉혹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2.

샤론은 멍한 얼굴로 캐리어를 들고 서 있었다.

원래는 마땅한 옷장이 없어서 벽에 세워둔 채 옷장 대용으로 사용하던 캐리어였다.

짐이 얼마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샤론이 몸을 웅크리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캐리어에는 기존의 생활 살림이 꽉꽉 차 있다.

“어.....”

느릿하게 현실이 머리를 파고든다.

옥탑방은 샤론이 현세생활 5년 만에 마련한 스위트 홈이었다.

현세로 추방당한 최초 1년은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24시 카페, 혹은 패스트푸드 점을 전전하며 집 없이 버텼다.

가끔 으슥한 굴다리 같은 곳을 찾아 캐리어 안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1년차부터 5년차까지는 반지하 원룸에 들어갔다.

보증금 없이 관리비 포함 월세 38.

숨만 쉬어도 폐에 곰팡이가 필 것 같을 정도로 지하실 특유의 찌든 냄새가 나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던 열악하고 암울한 곳이었다.

거기서 열심히 여윳돈을 만들고 발품을 팔아 구한 곳이 지금까지 지내던 옥탑방이다.

관리비 포함 월세 50에 보증금이 200 정도라는 점에서 가격 측면으로도 합격.

집주인이 전입신고를 하지 않으면 월세 3만 원을 깎아주겠다고 먼저 제안해준 것도 합격이다.

샤론에게는 다른 마녀들처럼 위장 신분을 구매할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고, 그녀가 지니고 있는 휴대폰과 통장도 전부 타인의 명의로 된 대포폰, 대포통장이었으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구청에서 불법건축물 단속을 나와 집주인이 시정을 받아들이고 세입자에게 퇴거 요청을 했을 때 샤론을 보호해줄 법률은 하나도 없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지자체의 입장에서 샤론은 불법체류자 일 테니 말이다.

서류를 들이밀며 구청의 건축과를 찾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느니, 건축물대장을 떼어보셨어야죠 같은 위로의 말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허름하고 빈궁한 집이라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집 안에서 샤워도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휴식처였다.

그런데 불법건축물이라니.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 불법이면 어떻고 합법이면 어쩌라고....”

샤론은 바닥에서 나뒹굴던 캔을 거칠게 걷어찼다.

새된 소리를 내며 날아간 깡통 소리가 시끄럽게 깡깡거린다.

입술을 꾹 물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샤론의 손에 들려있던 흰 봉투가 구깃하고 구겨졌다.

오늘 아침에 집주인이 미안하다면서 쥐여준 보증금 200이다.

홧김에 내팽개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돈은 잘못이 없다는 얄팍한 합리화만이 스쳐 지나갈 뿐.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울고 싶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가난이 잔혹한 것은 슬픔을 음미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현실을 들이민다는 것이다.

불법체류자인 샤론이 적당한 원룸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캐리어나 끌고 다니며 노숙 생활을 할 생각은 없다.

예전이라면 모르지만 이미 집을 가져본 기억이 있는 샤론은 절대 그때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샤론은 휴대폰을 꺼내 들어 앱 하나를 설치했다.

숙박업소를 예약하는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쭉쭉 무성의하게 스크롤을 넘기던 샤론의 입이 점점 커진다.

“와... 미친....미쳤네...”

신촌 일대는 교회 성당 옆에도 모텔이 나란히 있을 정도로 숙박업소가 성행한다.

번화가가 있고 청춘남녀들이 총집결하는 핫플레스이니 이건 당연한 일이다.

다시 살 곳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거주하려면 모텔이 제격이겠다 싶어 앱을 설치했는데.

“하루 묵는데 12만 원? 게다가 6시 입실 익일 11시 퇴실?”

24시간도 아닌데 월세의 3분의 1 가까이를 받아 처먹는 숙박업소의 횡포에 샤론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3만 원 4만 원 이러길래 ‘생각보다 비싸지만 할만한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또 대실이라고 따로 있단다.

모텔방을 3시간에서 6시간가량 빌려 낮잠을 자고 가는 시스템인 것 같다.

잠깐 쉬어가거나 낮잠을 자는데 그런 돈을 망설임 없이 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샤론에겐 그것까지 충격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

샤론은 냉큼 앱을 지워버렸다.

게스트하우스니 호텔이니 여러가지 항목이 있었지만 모텔 숙박비를 보기만 해도 더 알아볼 생각이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일단... 일가기 전에 이거라도 환전해야지.”

샤론은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는 호문쿨루스의 결정을 꺼냈다.

뭐가 됐건 비상금은 필요할 것 같다.

“호문쿨루스 DB도 열람하고 싶고...”

아직 편의점 알바까지도 4시간이나 남았고 적당히 다녀오면 괜찮겠지.

샤론은 캐리어를 들고 터벅터벅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3.

게헨나와 현세를 불문하고 마녀들 간에 불문율이 있다.

마녀는 그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

마녀는 신비 속에서 살아야 한다.

마녀는 마법을 통해 역사에 개입해선 안 된다.

마녀는 마법으로 사회혼란을 야기해서는 안된다.

이것이다.

이런 불문율이 있는 이유는 뭘까?

‘신비’는 그 은폐성이 떨어질수록 의미가 옅어진다는 미신도 있고, 각국 정계와 연이 닿아있는 세피로트의 나무와 협약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샤론이 생각하기에 마녀들이 힘을 무분별하게 휘두르지 않고 자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케테르 공작의 존재 때문이다.

역사에서 자신의 힘을 믿고,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패악질을 부리던 마녀는 몇이나 있었다.

굵직한 사례만 예를 들자면...

14세기 전염병을 퍼뜨리며 죽음을 수집하던 ‘역병의 마녀’는 3일 밤낮에 걸친 전투 끝에 케테르에게 숙청당했다.

17세기 게헨나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며 마녀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 들고 일어선 ‘은빛여명회’의 마녀 12인은 현세로 뛰쳐나가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한 지 이틀 만에 뒤쫓아온 공작에 의해 모조리 도륙당했다.

18세기 미국의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용의 마녀’는 케테르 공작에게 혼쭐이 난 이후 얌전히 사막으로 돌아갔다.

19세기 게헨나에 대규모 침투를 감행한 ‘클리포트’ 소속의 공적들도 은거를 깨고 나온 케테르 공작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렇듯 케테르 공작은 마녀가 마법을 사용하며 현세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지극히 언짢아했고 균형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쓰러뜨린 마녀는 당대 최강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명부에 이름을 올리던 마녀들이었으니 누가 그 뜻을 거스르려 들겠는가?

꼭 판타지 신화에 나오는 용 같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아무런 간섭도 신경도 쓰지 않지만 선을 넘는 순간 뜨거운 숨결로 적을 불사르는 드래곤 말이다.

당장 각종 뒷세계의 조직이나 직접 카르텔을 운영하는 공적도 언제나 케테르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니...

아무튼 그런 불문율은 추방자들을 위한 자그마한 게헨나, 위치포인트에도 적용되었기에 광화문 지부는 도심 한복판 빌딩에 민간 보험사로 위장해 있었다.

이 빌딩의 가장 높은 5개 층만이 위치포인트로서 운영된다.

샤론이 으리으리한 사옥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멀끔한 양복을 입은 경비가 마중을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에버그린 마녀님.”

“환전하러 왔어요.”

“네, 모시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샤론을 마녀라고 칭하며 인사한 이 경비는 위치포인트에서 고용한 민간인이다.

자기 마법 연구하기도 바쁜 마녀들을 붙잡아 잡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 사전에 협의가 끝난 국가로부터 정보기관의 인물을 빌려 각종 업무를 맡기는 것이다.

당장 이 경비만 해도 정보기관의 직원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정확한 건 모르겠다.

건물 최상층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위치포인트 내부는 의외로 평범한 회사 사무실과 비슷하다.

전화기를 붙잡고 어디론가 연락하는 직원도 있고, 서류뭉치를 한 아름 안고 파쇄기를 사용하는 직원도 보인다.

조금 비정상적인 면이 있다면 여자 중 몇몇이 지나칠 만큼 아름답다는 것 정도겠지.

뭐 이상할 것도 없다.

어차피 위치포인트의 존재 의의는 마법연구가 아니니 말이다.

샤론은 지체 않고 곧장 환전소로 향했다.

“이거 전부 바꿔주세요. 현금으로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결정 5개를 창구 위에 놓인 접시에 올려놓자 은행원처럼 차려입은 직원이 그것을 안쪽으로 가져갔다.

환전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결정의 위조 여부를 판별한 뒤 전자저울로 무게를 재고 미리 마련해둔 현금을 내어준다.

그렇게 일주일간 고생고생해서 사냥으로 번 돈 총액 512만 원.

다른 때보다 훨씬 넉넉한 수익에 침울하게만 변해가던 샤론도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래층의 행정업무 지원실에 들러 이번 분기 납부금 650만 원을 지급했다.

이후에는 공용 자료실에서 호문쿨루스 도감을 뒤적였지만 역시 ‘완벽하게 동일한 호문쿨루스’에 대해서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이걸 상부까지 보고를 해야 하나 싶어 고민고민하던 샤론은 고개를 저었다.

“에휴... 다음에 하자. 이제 알바나 가야겠다.”

오늘은 어쩐지 열성적으로 살고 싶지 않은 날이다.

공용 자료실의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샤론은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을 더욱 더럽게 해줄 사람과 마주쳤다.

“하...시발....”

척수반사처럼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욕설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이건 무죄다.

왜 바퀴벌레를 보면 저절로 욕이 나오지 않는가?

대충 그런 거다.

사사건건 샤론을 못살게 굴며 시비를 걸어오는 쪽은 항상 ‘델라 레드클리프’, 지금 눈앞의 붉은 마녀 쪽이었으니 말이다.

“어머, 경망스럽긴. 입에 걸레를 물으셨나요?”

우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하는 델라.

그녀는 ‘잿불의 마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붉은 튤립을 연상시키는 여자였다.

단발로 짧게 자른 곱슬거리는 적금발도, 딱 봐도 쌈닭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초리도, 그 안에서 비웃음 어린 시선으로 샤론을 깔보는 눈동자도.

모두 화염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붉다.

“미안, 깜짝 놀라서 그랬어. 너한테 한 건 아니야.”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지만 사과를 한 것은 구태여 그녀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여자랑 대화가 길어졌다간...

“꼴을 보아하니 요즘도 구질구질한 시궁쥐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어제는 전단지 몇 장이나 붙이셨나요? 아니다, 제가 맞춰 볼게요.”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기 때문이다.

샤론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델라를 노려보았다.

“열 장, 스무 장...? 아니면... 어머! 설마 백 장?”

일전에 사냥터를 두고 분쟁이 있던 이후로 델라는 샤론이 눈에 보일 때마다 굳이 굳이 찾아와 조롱하기 바빴다.

게다가 우아하고 고상한 용모와는 달리 진짜 사람 속을 잘 긁는다.

델라의 마법이 비아냥의 절반 만큼만 훌륭했더라면 케테르 공작조차 적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표정 보니까 백 장이 맞는 것 같은데. 와아~ 축하해요! 하룻밤 사이에 만원이나 추가로 갚을 수 있게 된 거네요?”

“나 갈거야 비켜.”

샤론은 박수를 치며 그녀를 놀리는 델라를 떠밀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지금의 샤론은 델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눈앞에서 저렇게 지랄하는 것을 들으며 10년 내내 참아 왔겠는가?

샤론은 이미 델라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철저하게 깨진 적이 있었다.

애초에 17 위계와 20 위계는 코끼리와 들개 수준의 전력 차이가 나니 꼬리를 만 개처럼 도망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델라는 전혀 비켜서지 않았다.

오히려 샤론에게 성큼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안 그래도 샤론보다 머리 반개가 큰 델라는 힐까지 신고 있었기에 거의 머리 하나의 높이에서 내려보는 형국이 되었다.

샤론 역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델라와 눈싸움을 했지만 조금씩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샤론 쪽이었다.

애초에 기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내가 쉽고 편하게 돈 벌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뱀처럼 기어오른 델라의 손이 깃털로 간질이듯 샤론의 턱 끝을 매만진다.

다분히 희롱하는 의도가 느껴지는 손짓에 온몸에 쭈뼛 잔털이 설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낀 샤론은 그녀의 손을 탁 쳐내고 황급하게 엘리베이터로 달려나갔다.

“미친년, 미친년!”

욕설을 내뱉으며 다급하게 도망치는 샤론.

그걸 바라보던 델라의 입꼬리가 샐쭉해졌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