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1.
아무리 신촌 중심가 한복판이라도 평일 밤 2시가 넘어가면 한적해지기 마련이다.
소나기가 훑고 간 선선한 밤거리 위로는 물웅덩이가 피었다.
샤론은 그 물웅덩이를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걸었다.
“네 얘기도 해줘.”
이렇게 시작한 대화였는데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어째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만 늘어놓았음에도 이렇게 대화가 길어지게 되었다.
원래 현세에서 살아가다 게헨나에 잡혀갔던 일.
노예로 지내며 탈출 마법을 연구하던 일.
제머나이의 견습마녀를 구한 일.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하며 낙인을 얻을 일.
제머나이 백작가의 은총으로 현세로 돌아와 살고 있는 일.
이중에서 특히 백작이 시우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다는 말과 쌍둥이와 관계가 돈독하다는 말은 강조해 전했다.
아무래도 이편이 신분과 안전을 보장받기 편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게 된 거구나.”
“네.”
하지만 샤론의 반응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딱히 ‘우오오옷!! 노예이면서 자성마법을 연구하는데 성공한 거냐고?’ 라던가, ‘네 녀석 미친 천재였구나!’ 라던가, ‘낙인을 지닌 남자라니 너의 마법 연구적인 가치에 눈이 돌아가는걸?’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특히 마지막은 정말 피하고 싶은 리액션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수에즈 운하에서 선박이 전복되는 바람에 한동안 지중해 인근의 물류 유통이 마비되었다더라 같은 말을 들은 것처럼 시큰둥한 반응이니.
현세에 대해 잘 몰랐던 탓에 지금까지 너무 사서 걱정을 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생각보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놀랐는데?”
샤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우를 돌아보았다.
그 겨를에 고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펄럭이며 산뜻한 향기를 전해져온다.
조금 벗어난 감상이다만 역시 마녀는 아름답다.
24시간 운영하는 스티커 사진점의 불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을 뿐인데 화보 같다.
“반응이 별로 없으셔서요.”
“물론 신기하지. 근데 내가 더 신기한 거 알려줄까? 내가 10년 동안 현세에서 갚은 돈이 13억인데 원금은 1억 2000만 원 줄었다?”
“아.....”
“더 신기한 건 이 추세라면 내가 원금과 이자를 전부 갚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3227년 하고도 8개월이라는 거야. 정말 신기하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마법에 대한 탐구심이나 꿈, 열정 이런 것도 생활의 여유가 받쳐줄 때나 가능한 것이라는 거다.
58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걸 갚을 생각으로 혈안이 돼 있는 샤론에게 시우의 존재는 그냥 엑스트라 그 자체라는 것이겠지.
게헨나에, 특히 시우의 주변에 있던 마녀들은 전부 경제적으로 부유한 대마녀들이었기에 마녀는 금전 관계에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했었는데.
섣부른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괜히 죄송하네요.”
“죄송하긴 뭘... 아니다, 죄송하면 밥이나 한 끼 사.”
“밥이요?”
“응, 마실 것도 좋고.”
그 정도야 어렵지 않다.
현세에 넘어온 지 100일이 훌쩍 넘어가는 동안 한 사람과 이렇게 길게 대화한 건 처음인 것 같다.
게헨나가 싫어 현세로 도망쳤던 시우가 정작 새롭게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은 게헨나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녀라니.
뭔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 근처에 24시간 운영하는 맥호날드가 있었기에 자두 칠러와 배 칠러를 하나씩 가져왔다.
솔직히 나쁜 마녀인 것 같지도 않고 모처럼의 커뮤니케이션인만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은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에게 이것저것 현세살이의 팁을 얻을 수 있을 것도 같고, 어쩌면 막혀 있는 마법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잘해주자.
“땡큐. 잘 마실게.”
시우에게서 칠러를 받아든 샤론은 씩 웃었다.
사람 인상이 표정에 따라 이렇게나 변할 수도 있구나.
편의점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만성피로에 찌들었던 그녀가 이런 성격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생각 이상으로 당차고 씩씩한 성격이었다.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하나 여쭙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좋아.”
한 손에 칠러를 들고 소중하다는 듯이 쪽쪽 빨아먹으며 답하는 샤론.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하나 더 사줄 걸 그랬나?
“다른 추방자 마녀들이 절 보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흐음... 글쎄? 케이스 바이 케이스 아냐? 신경 쓸 사람은 신경 쓸 거고,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배를 갈라보려는 사람도 있겠지. 그래도 제머나이가의 보장이라면 마냥 함부로 대하지 못할걸?”
“음...”
“쭈우우웁.... 그나저나 거긴 왜 있던 거야? 듣자 하니 마녀들한테서 숨어다니고 있었던 모양인데, 호문쿨루스 근처에서 알짱거리면 당연히 마녀랑 마주할 걸 몰랐을 것 같진 않고.”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샤론.
“호문쿨루스가 사람을 죽이는 걸 봤거든요.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샤론은 한동안 시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괜히 멋쩍어 칠러를 마시는 시우.
샤론이 지나가듯 말했다.
“많이들 죽지.”
시우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는데 샤론에게는 마치 일상인 것 같은 무덤덤한 말투였다.
하긴 그녀에겐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일테니 말이다.
“얼마나 많이 죽나요?”
“정확히는 아무도 몰라.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특히 오늘 잡은 것처럼 자잘한 녀석들이라면 1년에 한두 명 정도려나? 문제가 되는 건 ‘눈’이 많은 것들이야.”
“눈?”
“그런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사냥을 하려고 했단 말이야? 보기보다 대담하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되묻는 시우에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샤론.
“호문쿨루스에도 급이 있어. 보통은 외부에 드러난 눈의 개수로 위험도를 측정해. 하나인 것들이 가장 약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야.”
“그냥 달린 게 아니었군요.”
그러고 보니 현세에 와서 상대했던 검은 개는 라티푼디움에서 만났던 것보다 훨씬 상대하기 쉬웠다.
공격이 그다지 다채롭지도 않았을 뿐더러 별다른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전에 라티푼디움에서 만났던 건 아마 눈이 세 개였었지?
“맞아, 눈이 많이 달린 놈들은 개체 수도 적고 찾기도 어려워. 다만 일일이 인간을 습격한다는 쪼잔한 짓 대신 대범하게 일을 벌여.”
“어떤 식으로요?”
“재해가 일어나. 현실 내에서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건, 일대에 전염병이 돌건, 건물이 무너지건, 자연재해가 일어나건.... 아무튼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
호문쿨루스는 그저 유산을 수호하는 가디언이 아니었던 건가?
그런 호문쿨루스가 재액을 몰고다니는 존재였다니 왜 그런 짓을 벌이는지 알 수가 없다.
시우의 표정을 읽은 듯이 샤론이 말을 꺼냈다.
“호문쿨루스는 창조된 생명체야. 다만 창조된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생명체지.
따라서 그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마녀를 죽여 마력을 빼앗아야 해. 지난 수천년 간은 그런 식으로 살아왔겠지.
근데 어쩌나?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 마녀 숫자는 10분의 1도 안 되네? 먹잇감이 부족하네?
그 뒤로 뭐가 이상해져 버린건지 인간을 죽여서 연과 생명력을 빼앗아 에너지를 보충하는 개체수가 늘었다는거지....”
한참 충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던 샤론이 우뚝 굳는다.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길래 시선을 쫓아갔더니 홀린 듯이 스팀이 뿜뿜 뿜어져 나오는 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파병 나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을 마주한 듯이 애절한 눈빛이었다.
시우도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반쯤 벌어져 침이 잔뜩 고인 입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렇게 착각했겠지.
“먹고 싶어요?”
“응! 아, 아니?”
무슨 뻔한 질문이냐는 듯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가 체면을 차리는 샤론.
시우는 볼을 긁적이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저렇게 먹고 싶어하는데 군침만 뚝뚝 흘리는 걸 보니 좀 딱한 마음도 들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돈을 열심히 모으는데 아직 원금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깐 걸 보면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도 그녀와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추방자로 10년이나 지내며 쌓아온 지식을 공유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야, 나 진짜 괜찮다니까?”
“아뇨, 제가 먹고 싶어서요. 슬슬 야식 먹을 시간이기도 하고 먹으면서 얘기하면 좋죠.”
섣부른 동정이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아 적당한 배려와 함께 태연히 가게 안으로 들어선 시우.
괜찮다고 주저하며 사양하던 것치고는 순순히 시우의 뒤를 따르는 샤론.
“그, 그럴까? 나쁜 생각은 아닌데...”
“네, 제가 살게요. 대신 이곳 생활 좀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응, 내가 잘 알려줄게.”
시우의 갑각류 섭취량은 하루 평균 킹크랩 3마리.
어제도 30마리씩이나 먹었으니 가게 주인이 시우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학생! 오늘도 왔네!”
텅 빈 가게에서 TV를 보고 있다가 시우를 보자마자 화색이 되어 달려 나오는 사장님.
“오늘은 몇 마리 포장해줄까?”
“제일 큰 거로 10마리 정도요. 앉아서 먹고 갈 수 없나요?”
“이걸 어쩌나 우리가 12시부터는 배달 포장만 되는데...”
“...우리집!”
난색을 표하는 듯한 사장의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샤론이 크게 외쳤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듯이 말을 잇는다.
“포장해서 내 집에서 먹어도 된다고....”
갑자기 큰 소리를 낸 것이 민망했는지 샤론의 두 볼은 체리처럼 빨겠다.
눈을 끔뻑이던 사장과 시우.
“아이고~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여자친구분이 한국말도 잘하네.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학생. 금방 포장해줄게.”
“네? 네.”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는지 샤론이 눈치채지 못하게 시우에게 엄지를 치켜올리며 속삭이고는 곧장 수조의 게를 건지러 나갔다.
“잘해봐 학생!”
뭔가 오해를 산 것 같기도 한데.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 한가득 킹크랩이 담긴 봉투를 들게 된 시우.
걸을 때마다 봉투가 펄럭이면서 향긋한 게 향기가 솔솔 올라온다.
샤론의 발걸음은 유달리 빨랐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슬렁슬렁 산책하는 걸음걸이였는데 지금은 경보대회라도 참가한 것처럼 척척 앞으로 나아간다.
엉덩이까지 늘어진 긴 머리카락이 강아지의 꼬리처럼 좌우로 찰랑찰랑 흔들렸다.
게를 참 좋아하나보다.
근데 언제까지 걷는 거지?
20분 이상은 걸은 것 같은데 아직도 멈춰설 기색이 없다.
신촌에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원룸촌은 크게 3구역이 있는데 하나는 시우가 살고 있는 신촌 기차역 근처 고급 오피스텔 단지.
하나는 명물거리와 이대 사이의 산을 깎아 만든 듯한 가파른 원룸촌.
마지막 하나는 지금 샤론과 걷고 있는 번화가 원룸촌이다.
마침내 샤론이 꺾어 들어간 곳은 1층에 떡하니 ‘ㅇㅇ포차’라는 술집이 있는 주상복합 빌라였다.
“좀 멀었네. 다 왔어.”
그렇게 1층, 2층, 3층, 4층, 5층을 올라가고 나서야 도착한 곳은 옥상에 있는 옥탑방.
“사양 말고 들어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사실 1층에서 외관만 봐도 허름했고 지어진 지 20년은 된 것 같은 건물이었기에 큰 기대는 안 했었다.
그런데도 막상 들어선 샤론의 방은 옥탑방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와장창 깨뜨릴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미안 좀 지저분하네.”
사실 지저분한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샤론에겐 미안하지만 그냥 이 방 자체가 커다란 문제였다.
우선 옥탑방임에도 고작 6평 남짓으로 매우 좁다.
게다가 방 한가운데는 뜬금없이 기둥이 서 있어 안 그래도 좁은 생활 반경을 더욱더 비좁게 만들었다.
침대는 옷장을 겸하기라도 하는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가 나뒹굴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교체하지 않은 누런 벽지가 잔뜩 울어있는 것이 보인다.
거기에 벽 한 쪽에 툭 튀어나와 있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라니...
샤론이 거액의 빚을 지고 그걸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건 들었지만 이 모습은...
‘믿겠다, 넌 빚쟁이가 맞군’ 같은 대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샤론에게 가지고 있던 일말의 경계심이 몽땅 쓸모 없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충격에 빠진 시우가 우두커니 서있자니 등 바로 뒤에서 꿀꺽 침을 삼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저기, 킹크랩은 언제 먹어? 테이블 펼쳐놨는데.”
뒤를 보자 앉은뱅이 책상을 펼쳐 놓은 샤론이 언제 준비했는지 접시를 꺼내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