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44화 (144/917)

#144

1.

“야! 어디서 굴러먹던 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내꺼야!”

손도 대지 않았는데 죽어가던 호문쿨루스를 보며 의아해하던 시우의 뒤로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아직 이면결계에 둘러싸인 채이다.

그 안에서 들려올 여자의 목소리라 함은 당연 마녀의 것.

고개를 돌렸을 땐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옷차림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것도 화려한 야경을 뒷배경으로, 자살 방지를 위해 설치되어있는 펜스 위에 묘기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

유럽계 마녀에게는 정복이나 다름없는 뾰족한 꼬깔모자 위로 툭툭 빗방울이 튕긴다.

생화로 장식된 기다란 완드 끝에서는 녹색 사파이어가 마력으로 충만한 채 빛을 내고 있다.

그 밖에도 어깨에 걸친 로브, 훤히 드러난 허벅지 안쪽을 감추는 검정 속치마.

여기까지는 게헨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정통 마녀의 옷차림인데 신발이 조금 달랐다.

활동성을 위해서인지 나름의 패션 감각을 첨가한 것인지는 몰라도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라이딩 부츠를 신고 있다.

조금 위화감이 들면서도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 선방한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신촌역사 옥상에 마녀라.

게헨나에서는 별 생각 없이 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쩐지 코스프레 촬영회라도 온 기분이었다.

하긴 전신을 플레이트 갑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는 시우가 할 말은 아니면서도...

“웃차!”

펜스에서 풀썩 뛰어내린 마녀는 물웅덩이를 밟고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부츠 안에 물이 들어가거나 한 모양이다.

“거기 보이지? 옆구리에 상처. 내가 만든 거거든? 여기서 나랑 한판 뜨던가 아니면 갈 길 가던가 알아서 해.”

마녀는 적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척 완드를 겨누더니 턱짓한다.

그전까진 역광과 모자의 그림자 탓에 잘 보이지 않았던 마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시우는 깜짝 놀랐다.

어쩐지 실루엣이 익숙하다 했는데.

진녹색과 청록색이 적당하게 뒤섞인 두 색의 머리카락.

저것만 봐도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상복합 오피스텔, 1층 편의점에서 성의 없이 계산해주던 예쁜 혼혈 알바녀다.

진짜 세상 불필요할 만큼 더럽게 좁다.

이제껏 무방비하게 마녀의 앞에서 계산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괜히 살 떨렸다.

아니 근데 이걸 어떻게 예상해?

무슨 마녀가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겠는가.

차라리 점장이었다면 좀 더 이해가 됐을 것이다.

“어쭈? 안 비켜?”

충격으로 굳어있던 시우에게 귀찮은 벌레를 내쫓듯 완드를 휘적이는 마녀.

시우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롱소드와 방패는 내려놓지 않았다.

현세에서 마녀와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지만 시우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남성’이라는 사실은 다른 마녀의 관심을 필요 이상으로 끌어모으는 관심 요소.

소중한 표본을 확보하겠다는 명목으로 언제 갑자기 공격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제발... 좋은 거 좋은 거 좋은 거 나와라...”

그러나 시우를 지나친 마녀는 곱게 차려입은 마녀복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동네 양아치처럼 쪼그려 앉더니 호문쿨루스에게 막타를 꽂고 사체를 뒤적였다.

어?

그러고 보니까 반응이 좀 평범한데?

처음 마법을 사용하는 시우를 봤던 쌍둥이나 소피아는 모두 제법 놀라워했다.

그런데 초면인 마녀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무덤덤하다.

설마...

시우는 자신의 얼굴을 코까지 덮고 있는 투구를 무의식적으로 더듬었다.

하긴, 플레이트 갑옷 위로 몸매가 드러날 리는 없고 목소리를 낸 적도 없다.

얼굴도 반쯤은 가려져 있다.

즉, 지금 저 마녀는 시우를 호문쿨루스를 사냥하던 또 다른 마녀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상식선에서 생각해보면 지극히 합당한 결론이기도 했다.

남자가 호문쿨루스 앞에서 싸움을 걸 정도의 위계를 쌓았을 확률보다야 키가 좀 큰 동료 마녀일 확률이 훨씬 높을 테니까.

“하아~ 이번에도 허탕이네. 어떡하지...”

마지막 마권을 날려 먹은 경마장 아저씨처럼 한숨을 쉬는 마녀를 보며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투구를 계속 쓴 채로 조용히 빠져나간다면 아무런 트러블 없이 몸을 숨길 수 있지 않을까?

불필요한 분쟁은 원치 않았다.

“야.”

“.......”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조용히 옥상으로 나가려던 시우를 불러세우는 마녀의 목소리.

솔직히 이대로 튈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재롱잔치에 불과했던 노예 시절과는 달리 환골탈태를 거쳐 1대에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오른 시우다.

어디 소년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였더라면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 확인해 보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시우는 아니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다가온 마녀와의 인연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고 차마 대답은 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마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마녀 쪽에서 찰박찰박 물웅덩이를 밟으며 시우에게 다가왔다.

“뭘 그렇게 쫄아 있어. 누가 잡아먹는데? 나 그런 마녀 아니야.”

격의 없이 어깨를 탕탕 두드리는 마녀에게 시우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예빈을 통해 모든 추방자가 나쁜 마녀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작 저 한마디에 사람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

지금은 시우를 마녀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이런 친근한 태도를 유지 중이지만, 사실 그가 희귀종이라는 것을 알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노릇이지.

“........”

“모습을 보아하니 이 근처에 있던 마녀는 아닌 것 같고... 현세로 추방당한 지 얼마 안 된 거지?”

“........”

큰일이다.

대화가 길어지는 것은 좋지 못한 전조이다.

편의점에서 보았을 때는 굉장히 피곤에 찌들어서 ‘난 너희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라는 느낌을 풀풀 풍기는 느낌이었는데.

침묵으로 ‘너랑 말하기 싫어!’라는 의사를 팍팍 내비치는데도 이 마녀의 친화력은 거침이 없었다.

아니 이렇게 무방비하게 다가오는 걸 친화력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 맞나?

게헨나도 아닌 현세에서 이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다.

“호문쿨루스를 잡아 넘겨 위치포인트(Witch point)에서 현상금을 받으려는 거잖아. 아니야?”

“.......”

위치 포인트? 현상금?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의 앞에서 알짱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마녀.

이 거센 빗발을 뚫고도 향긋한 냄새가 전해져 온다.

편의점에서 계산할 때 맡았던 그 향기와 정확하게 일치해서 새삼 그 알바녀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안하지만 신촌 홍대 이 일대는 내 사냥터라서. 함부로 넘어오는 건 곤란해. 이번엔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으니 넘어가 주겠지만 다음에도 내 사냥감을 가로채려 든다면 실력행사로 응수할 거야.”

“.........”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단은 느렸지만 후회는 빨랐다.

아까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알아. 나도 처음에 나왔을 땐 막막했거든. 신분도 없지, 돈도 없지, 정보도 없지. 게헨나에 비하면 아주 거지 같은 곳이지.”

“........”

“그래서 말인데 좋은 돈벌이 알려줄까? 이곳에 정착하려면 어쨌거나 돈이 필요하거든.”

거기다가 초면에 돈 얘기라니.

더더욱 상종하면 안 되는 인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블록체인 기술이라고 들어봤.....어?”

그떄 쫑알쫑알 말을 늘어놓던 마녀의 말꼬리가 기이하게 올라간다.

투구로 반쯤 가려져 있던 시우의 눈동자 앞에 떨리는 민트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긴박한 순간임에도 저런 색깔의 눈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신기했다.

“너 그 매일 담배사러 오는 안대남? 근데 이거 마법...아닌가? 아니, 뭐지? 남자 맞는데?”

마녀는 혼란스러워하며 뒷걸음질을 치며 뒤로 물러섰고 그것은 시우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순위는 대화를 통한 안전 확보, 도주, 전투 순이다.

시우는 그림자로 된 건틀렛을 해제하고 즉각 제머나이가의 반지를 들어 보였다.

알비레오가 주었던, 제머나이 백작가의 손님임을 보장한다는 반지였다.

“이거 보이시죠? 전 제머나이 가문의...”

“자, 잠깐만!”

그리고 효과는 확실했다.

시우가 들어 올린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자마자 마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다.

“곧, 곧 돈을 마련할 수 있어. 떼어먹으려던 게 아니야... 이번 분기 분은 일주일... 아니 이주일만 미뤄주시면....”

아까의 당당하던 기색이 어디 갔는지 곧장 주눅이 들어 쩔쩔매기 시작한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시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새롭게 만난 마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까까지 제법 운치 있게 보였던 비에 젖은 마녀의 모습이 꽤 처량해 보였다.

2.

“돈 받으러 온 게 아니었구나. 난 또 제머나이 백작이 돈 받아오라고 보낸 사용인인 줄 알았어.”

“그런 건 아닙니다.”

“휴우... 진짜 내 인생...”

우연히 만난 마녀는 자신을 샤론 에버그린이라고 소개했다.

축축히 젖은 마녀복에서 청바지에 반팔티라는 캐쥬얼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그녀와 막차가 끊긴 정류장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위험한 부류의 추방자’는 아니었다.

더욱이 시우가 일찍이 이야기를 들어왔던 마녀이기도 했다.

보더타운의 구름버섯 빌리지를 상수리나무 숲으로 만들어버린 대사건 ‘새싹의 반란’.

한 마녀가 실험 중 폭주해버려 지천에 깔려있던 도토리를 폭풍 성장 시켜버렸고 그 결과 인근의 공방과 주택이 모두 날아가 버린 사건 말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런 얼빠진 마녀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을 현세에서 독대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럼 시민권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 빚을 갚고 계신다는 거죠?”

이것이 시우가 샤론을 비교적 안전한 마녀라고 판별한 최종 이유다.

게헨나의 마녀에게 시민권이 지니는 의미를 비유하자면 고향의 국적이나 다름없다.

그 호기심 왕성한 마녀들이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켜가며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 국외추방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니, 반대로 다시 시민권의 복권을 위해 발버둥 치는 그녀라면 일선을 넘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시우의 신분을 보장하는 곳이 세피로트의 나무에서도 입김이 센 제머나이 백작가라면.

“그런거지...”

또한 추방사유가 무분별한 마법 연구나 민간인 살해 등이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빚은 얼마 정도 되는데요?”

“....한화로 580억 8842만 원 정도?”

그야말로 억소리가 나는 빚이었다.

“아니 기껏해야 주택가 좀 부쉈는데 그 정도나 나온다고요?”

타로 타운만 됐더라도 그렇겠거니 싶었는데 보더 타운이 집값이 비싼 편도 아니다.

아무리 빌리지 한 블록을 부쉈다고 해도 저 정도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이 생길까?

덤태기 쓴 거 아니야 이거?

“공방을 날려버리면서 연구자료가 함께 날아간 마녀들이 집단소송을 걸었거든... 이제 빚 얘기 그만하자 위가 꼬이는 것 같아.”

샤론의 어깨가 밟은 눈처럼 푹 꺼졌다.

불야성을 장막처럼 뒤덮던 소나기가 지나가고.

어느새 밤하늘을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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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던 팬아트 이제야 올립니다 ㅜㅜ

멘탈박살난환쟁이 님이 그려주신 에아 사달멜리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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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샷은 용량이 너무 커서 팬아트 갤러리에 올려두겠습니다!!!

토끼 만낙 님이 그려주신 문두드리는 아멜리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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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귀엽게 잘나온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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