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1.
게헨나의 여름은 지중해성 기후와 흡사하다.
여러 지역을 긁어모아 만든 이면 세계인 만큼 모든 곳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우가 주로 시간을 보내던 레노먼드 타운은 그랬다.
이게 무슨 의미이냐면 여름에 일조량이 많아 고온 건조한 ‘건기’가 이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잊고 있었다.
한국의 여름은 무척이나 덥고 무엇보다 어항에 빠진 듯한 끔찍한 습도를 자랑하며.
그 여파를 해가 기울어도 열대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아프리카 룰라 주세요.”
“4500원이요.”
여느 때처럼 담배를 사고 편의점 앞 골목에서 흡연 중인 시우.
낮시간 동안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는 열기가 등줄기를 훅훅 볶는 듯하다.
손끝에 쥔 담배꽁초에서 나오는 열기조차 뜨겁기 그지없었다.
“더워.”
덥다.
너무너무 덥다.
똥오줌을 안 싸게 해줬으면 기왕이면 땀도 안 나게 해주면 안 되나?
괜스레 툴툴거린 시우는 담배꽁초 케이스에 꽁초를 넣은 뒤 에어컨의 은총이 가득한 집으로 돌아왔다.
“후우....”
한껏 온도를 내려놓은 덕에 단숨에 몸의 열기가 가시고 오돌토돌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열대야조차 비껴가게 하는 과학의 축복도 근본적으로 시우의 근심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도 어언 3개월이 지났다.
지금까지 못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치우면서도 시우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마법연구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의식을 잃고 있던 사이 비약적으로 성장해버린 그의 자성 마법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감으로만 알고 있던 부분은 마법식으로 상형화하는 일련의 작업은 뿌듯한 충족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매일매일 괄목상대하는 마법 실력은 덤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 달은 뭐랄까.
썩 즐겁지 않다.
게헨나의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지식의 창고였다.
당장 도서관에 가면 영감의 원천이자 마법적 지식이 한가득 쌓인 서적들을 몇 권이고 읽을 수 있었다.
쌍둥이든 아멜리아든 모르거나 막히는 부분이 생긴다면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현대.
마법 서적이라고 해봐야 아무 의미 없는 오컬트 서적이나 설정 집 등이 돌아다닐 뿐이고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도 없다.
모름지기 학문이란, 발전을 위해선 기반 지식이 필수로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시우가 독자적인 마법 체계를 구축한다지만 그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이래서야 짙은 안개 속에서 랜턴도 없이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핵심에서 벗어난 문제만을 겉돌게 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우는 너무나도 뛰어난 마법적 직감을 가진 탓에, 이 문제가 결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시우는 잠시 마법 연구를 내려놓았다.
대신 좀 더 방탕한 일들, 낭비와 시간 때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맥주를 꺼내오고 소파에 누운 채로 아까 보던 영화를 마저 보기 시작한다.
거실에는 이것저것 택배로 시킨 잡동사니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
뇌를 통과하는 영화의 스토리.
시우는 지금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궁리를 시작했다.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 잠깐 연구에서 손을 떼고 있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한다 해서 새로운 발상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공식과 배열이 25개나 된다.
공식이 없는 상태에서 마법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막막한 벽일 뿐이어서 시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2.
연이 끊어진다.
유령이 된다.
세상에서 오려져 나간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느낄 수 있었다.
위조된 명의로 개통한 휴대폰은 다행히 멀쩡했다.
그러나 배달 앱에 무지막지하게 쌓였던 포인트는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없어졌다.
머리를 식힐 겸 게임이라도 할까 싶어 컴퓨터를 주문하고 새로 나온 게임을 해봤는데 오프라인은 상관이 없지만 온라인 게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정이 사라졌다.
정확한 기준선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잘려나간 자신의 빈자리를 확인할 때마다 조금 공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화할 사람도 없다.
깊은 관계를 만들 여건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서로 간의 좋은 기억을 쌓았다 한들 길어야 일주일 뒤면 모두 없던 일이 되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 기껏해야 현세에 존재하는 추방자나 되어야 그럴듯한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겠지.
물론 그 추방자가 시우에게 호의적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말이다.
“재밌네.”
아무리 목숨의 대가라고 하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피커의 볼륨을 더욱 키웠다.
시끄럽게 울리는 펑크록의 소리가 조금은 집 안의 적막을 덜어주었다.
“배달 음식도 좀 질리고....”
뭐랄까 처음에는 너무너무 행복해서 이것저것 주워 먹었는데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뭔가 공통된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결국엔 하루 다섯 끼도 세 끼로 줄어들고 음식을 시키는 것도 검증된 맛집에서만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알게 된 한 가지 진리가 있는데.
한우와 갑각류, 그리고 참치는 언제 얼마나 아무리 먹어도 맛있다는 것.
시끄러운 비트와 드럼 소리에 박자를 타며 현대인의 풍류를 즐기던 시우의 귓가로 무슨 소리가 파고들었다.
-쾅쾅쾅쾅!
-...기요...! 저...요...!
시우는 스피커를 껐다.
귀를 웅웅거리게 만들던 소음이 사라지자 좀 더 확실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와 문이 부서지라 두들기는 소리였다.
제법 오래 못 듣고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둘 다 감정이 실려있었다.
-쾅쾅쾅쾅!
“저기요! 문 좀 열어봐요!”
뭐지? 소음이라고?
시우에게는 오르골이 있다.
마법을 사용했을 때 마력이 밖으로 발산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소지하고만 있어도 주위의 기척을 줄여준다.
“아.”
그리고 시우는 알아차렸다.
24시간마다 한 번씩 감아주어야 하는 오르골의 태엽이 모두 풀려있다는 것을 말이다.
기본적으로 낙인에는 저장하고 있는 마력의 발산을 억누르고 감추기에 사실 외출할 때와 마법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안일함에 잠깐 태엽 감는 것을 잊어버리고 본의 아니게 소음공해를 유발해 버렸다.
그래도 시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피어라.”
어둑한 그림자의 입자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제련해 기다란 창을 만든다.
야밤의 불청객이 꼭 이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지금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저 여자가 추방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은가?
사실 예빈만 보아도 모든 추방자가 사악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추방령’은 후대의 마녀에게까지 연좌되니 정작 본인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외부에서 지내는 마녀도 많다....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시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열기 전까지 이를 악물고 문을 두드리던 여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따발총처럼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저기요, 몇 시인 줄 알아요? 안 그래도 시험 기간 밤샘하느라 죽겠는데 집중 안되.....”
찰랑이는 단발에 운동복 바지 위에 과잠, 방금 집에서 대충 걸치고 나온 듯한 편한 스타일이다.
미간을 찌푸리던 여자는 화를 내던 도중 시우의 얼굴을 보고 우뚝 말을 멈췄다.
다행히도 이 세이프 하우스가 추방자에게 들통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말은 조금 실례인 것을 알고 있지만 마녀는 기본적으로 용모가 굉장히 뛰어나다.
그 사악한 에아조차 아름답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
물론 눈앞의 이웃 아가씨도 예쁜 편에 속하긴 했지만 마녀라고 보기엔 어렵다.
보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꽤 확실할 것이다.
시우는 안도하며 그림자의 창을 흐트러뜨렸다.
“죄송합니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줄은 몰랐네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한참이나 시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여자는 눈을 몇 번 끔뻑끔뻑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앞으로는 조심해주세요.”
“넵.”
이제 대화도 끝났겠다 슬슬 돌아갈 타이밍 것 같은데 괜히 어정쩡하게 서 있어서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이사 언제 오신 건가요?”
갑자기?
시우는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해 주었다.
“한 석 달 정도 된 것 같네요.”
“아하, 그러시구나. 전혀 몰랐네요. 이상하다. 저는 앞집 4호 살아요. 같은 층이요.”
혼자서 중얼거리는 정도의 크기로 말하던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어서 어리둥절해 하는 시우에게 또다시 뜬금없는 타이밍으로 질문을 던지는 여자.
“그건 패션 아이템 같은 건가요? 멋지네요.”
“아, 이거요? 그렇죠.”
여자는 시우의 안대를 손으로 척 가리키며 물었다.
아무래도 어물쩍거리더니 이 멋진 안대 덕이었나보다.
병원에서 눈병 걸리면 주는 조잡한 물건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장식된 검은 안대이다 보니 확실히 이목을 끌긴 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조용히 해주신다니 감사해요.”
“아뇨, 제가 부주의했던 건데요.”
이제 진짜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또 황급히 말을 거는 여자.
“이 근처 대학 다니시는 건가요?”
“아뇨, 그냥 백수인데요.”
“아하... 그러시구나아.... 담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종종 인사해요.”
“그러죠.”
“넵,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예, 안녕히 가세요.”
거의 문짝을 뜯어갈 정도로 화내더니 돌아갈 때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하고는 순한 양처럼 돌아간다.
“뭐야?”
별 이상한 여자를 다 봤네.
시우는 문을 닫고 오르골을 켠 뒤 다시 음악을 빵빵하게 틀었다.
조금 전의 만남을 곱씹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인사나 하자니...
어차피 며칠 뒤면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릴 텐데 ‘언제 시간 나면 밥이나 먹자’보다 기약 없는 말이다.
“쌍둥이는 뭐하려나.”
그나마 가장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제머나이 가의 견습마녀, 오딜과 오데트가 떠올랐다.
게헨나의 마녀들은 어지간하면 현세로 견습마녀를 내보내지 않으니 지금쯤 시우를 만나러 오기 위해 열심히 공부 중이지 않을까?
그게 대충 5년 정도 걸린다고 치면 이 생활을 4년 9개월 내외로 더 해야 한다는 소리이다.
“음... 여행이나 갈까?”
알비레오가 주고 간 위조여권 사이에는 명함이 하나 꽂혀있다.
제머나이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항공사의 VIP 직속 연락책이라고 한다.
여기로 전화 한 통만 하면 전용기도 대여할 수 있고 일정에 맞춰 인근 호텔도 대신 예약을 잡아준단다.
남의 돈으로 즐기는 영앤 리치 라이프.
노예적 시절을 떠올리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치 중인데 왜 이렇게 가슴에 응어리가 진 것 같은지.
예전에 로망처럼 생각했던 세계 일주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끄러미 카드를 내려보던 시우는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얼마나 부자인 거야?”
카드사에 항공사.
시우가 받은 혜택은 여기까지였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모회사를 검색해 본 결과 돈이 될 것 같은 금융, 보험, 철강, 각종 천연자원과 석유산업에 관여함은 물론이고,
항공우주, 자동제어, 특수화학 같은 분야까지 다각화를 시도 중인 거대기업이었다.
시가총액 505조로 기준 세계 12위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을 때는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게헨나에서만 부자인 줄 알았는데 현세에서는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의 갑부였다니.
그 코퍼레이션 전체가 오롯이 제머나이의 소유일 리는 없지만 살짝 얼떨떨하긴 하다.
“아무튼 간에....”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삶이 아니게 되었다.
어차피 수학을 열심히 연구한다 한들(그마저도 어찌 된 연유인지 잘 안 되지만) 이름을 날릴 수도 없고, 돈이 부족해서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끽해야 마법 연구가 끝인데 그마저도 요새 진전이 없다.
제머나이 가문의 따뜻한 젖꼭지만 빨고 있으면 되는 인생이 된 것이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싫은 건 아니지만... 권태?
“머리가 복잡할 땐 먹어야지.”
시우는 머리를 휘휘 털었다.
맛있는 걸 먹다보면 또 근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날 인근 횟집에 가서 활어조 하나를 통째로 회 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