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38화 (138/917)

#138

1.

알비레오가 건네준 두툼한 종이봉투에는 시우가 머물 집 주소가 적힌 종이 또한 동봉되어 있었다.

원래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곳인지는 모르겠는데 한국에 총 10곳, 서울에 3곳이 모여 있었고 나머지는 각 도의 광역시마다 하나씩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렇게 보니 무슨 국정원의 에이전트가 되어서 세이프 하우스를 인도받는 것 같다.

시우가 택시를 잡고 향하는 곳은 신촌, 그중에서도 이대역 쪽에 위치한 신축 투 룸 오피스텔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면 마치 브리핑이라도 할 예정이었던 것처럼 사진까지 동봉되어 자세한 설명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월세가 관리비 포함 140이더라.

이동하는 동안 택시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뒤바뀐 세상을 구경했다.

원래도 휴가 나와서 친구들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많이 와본 적 없는 신촌이지만 그래도 거리의 풍경이라던가 달라진 게 많다.

젊음과 유행의 거리답게 유행에 민감한 신촌인 만큼 변화점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버스킹을 하는 가수들은 전보다 많아졌고, 사람들은 선이 달린 이어폰 대신 무선 이어폰을 귀에 꼭 끼고 다녔다.

오기 전에 휴대폰 대리점에서 스마트폰도 개통했는데 디자인이 많이 바뀌었었지.

그가 마지막으로 쓰던 스마트폰으로부터 시리즈가 4개나 더 생겼다.

“폰은 샘숭이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홀린 듯 그리운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상복합 오피스텔의 가장 꼭대기 층이 시우의 집이다.

특별히 펜트하우스라던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신축답게 깔끔하고 살기 좋게 잘 정돈되어 있다.

각종 가구는 물론 식기 도구까지 있어서 조금 놀랐다.

“이야, 맥주도 채워놨네.”

시우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왔다.

거실 창 앞에 서서 잠깐 도시를 내려본다.

경의선과도 가깝고 2호선과도 가까워서 교통은 굉장히 편리하다.

다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황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 뷰와 편의성과 맞바꾼 것처럼 보였다.

물론 막 귀향한 시우는 로터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차만 봐도 가슴이 웅장해졌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대충 풍경을 즐기던 시우는 짐이 든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 오늘 개통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역시 집이 최고다.”

일단 시우의 위장 명의로 개통한 것인데 이게 ‘초기화’되지 않고 계속 잘 될지는 모르겠다.

근데 크게 신경은 안 쓴다.

그때가서 다시 개통하면 된다.

“뭐 어때, 내 돈도 아닌데.”

분명 알비레오 백작이 말하지 않았던가?

전용기 빼고 다 사라고.

어떤 것들이 바뀌었는지 알아보는 데는 뉴스만 한 게 없다.

출소자가 된 기분을 한껏 만끽하며 맥주와 함께 궁금했던 것들을 검색했다.

“이야, 이 게임 진짜 망했네.”

5년 전에 시우가 즐기던 망겜소리 듣던 게임은 정말로 망했다.

“내 이름 진짜 없네.”

수학영재니 수학천재니 마치 제 자식인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던 인터뷰 기사는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추가로 시우가 게헨나로 납치된 날 있던 비행기 사고에 대해 검색해봤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비행기가 추락할 정도면 꽤 큰 사건 일 텐데 외신 언론까지 샅샅이 뒤져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이 역시 아예 없던 일이 된 것 같다.

“와, 시발 이거 사두고 갈걸.”

예전에 존재만 알고 있던 가상화폐는 가격이 수백 배가 뛰어서 사이버판 골드러쉬가 일어난 모양이다.

이때 50만 원 어치만 사뒀으면 지금 얼마야?

시우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눈이 빠져라 액정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을 뒤적였다.

이렇게 느긋하게 소파에 누워서 맥주를 마시고 뉴스를 본다.

이 단순한 것도 엄청 행복하다.

우선 할 게 너무 많다.

밀렸던 영화도 봐야 하고, 중간에 못 보고 온 드라마도 있고, 그 사이 어떤 혁신적인 논문이 나왔는지도 확인하고 싶고, 가보고 싶은 장소도 많다.

지금 당장 그중에서도 일단 가장 중요한 것.

“밥 먹자.”

밥이다.

게헨나의 음식도 물론 훌륭했지만 한식처럼 짜고, 맵고, 자극적인 것이 부족하달까.

시우는 당장 배달 앱을 설치한 뒤 눈에 보이는 먹고 싶은 음식들을 골라 담았다.

삼겹살, 김치찜, 김치찌개, 보쌈, 족발, 치킨, 피자, 곱창 막창, 육회, 참치회, 찜닭, 초밥.

그냥 보이는 족족 먹고 싶다 싶으면 다 골라잡았다.

십 수번씩 초인종을 울리며 들여온 음식을 바닦에 쫙 깔아놓고 TV를 켜놓고 뉴스를 보면서 그립고 그리웠던 고향 음식들을 우적우적 먹었다.

묵은지 특유의 새콤한 매운맛이 담백한 등갈비와 어우러지며 입안에서 춤을 추었다.

꼬릿한 한약재 냄새가 가득 나는 족발을 상추 위에 다섯 조각씩 올려놓고 생마늘과 한입.

버섯과 함께 볶아낸 배달 삼겹을 볼이 터져라 입에 쑤셔넣는다.

부추 절임에 곱창과 막창을 때려부어놓고 크게 한 젓가락한 이후 입가심으로 소주 한 잔.

원래 소주는 싫어하는 편인데 오늘따라 어찌나 혀에 착착 감기는지.

“크으...! 좋아좋아.”

영체가 된 신체는 음식 공급이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늙어 죽지도 않는다.

그런 건 당장 실감이 안 나는데 지금 이 순간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바로 아무리 배불러도 음식이 꾸역꾸역 계속 들어간다는 것이다.

“와, 존나 맛있다.”

시우의 식도락은 장장 5시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2.

굴피나무 숲 속의 오두막.

시우와 종종 함께 잠이 들곤 했던 침대 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던 시우는 그녀에게 입술을 겹쳤다.

말캉하고, 여성의 것보다 훨씬 두툼한 그의 혀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 아멜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매달려 안긴다.

아무리 친애와 사랑의 표시라지만 서로의 침을 교환하는 행위이다.

몹시도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행위.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는 심장엔 그 어떤 거부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허리를 감싸고 목 뒤를 움켜쥐는 두꺼운 팔.

가슴을 쥐는 두꺼운 손바닥.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기에 맞닿아있는 모든 곳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시우....시우....”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 상냥한 눈빛이 돌아온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뱀처럼 몸을 휘감고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톡톡 건드린다.

그때마다 찌릿거리면서 배 안에서 발생하는 전기.

풍선처럼 부푼 열감과 미열이 뜨거운 한숨에 섞여 나온다.

“하아....하....”

시우는 뾰족하게 세운 손톱 끝이 오똑 솟은 아멜리아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 아파요....”

마치 벌을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을 파고들던 날카로운 통증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강렬한 자극이 되고, 아멜리아는 그의 몸 아래 짓눌린 채 침대 위에서 비척였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해달라는 듯이 가슴을 내밀고 두둥실 떠오르는 허리를 강제로 억누른다.

“그래도.. 더, 더 해주세요... 시우....”

아멜리아는 마치 화재가 발생해 대피하는 사람처럼 시우가 입던 셔츠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후각은 오감 중 가장 기억과 밀접한 감각.

시우가 떠나버린 이상, 이제는 직접 맡을 수 없는 그의 체취가 이 옷감에는 짙게 배어있는 채이다.

그것을 깊숙하게 들이마시면 행복했던 나날이 떠올라 마치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시우....웃...우웃....”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며 손톱으로 유두를 지분거리던 아멜리아의 몸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한다.

하늘하늘한 나이트가운만 걸치고 있는 탓에 달빛 아래 드러난 매끈한 다리는 괴로움을 참는 것처럼 바둥거리고, 찰싹 달라붙은 무릎은 비비적거리며 생소한 감각에 저항했다.

그때마다 금실처럼 보드라운 거웃이 비벼지며 사락이는 소리를 냈다.

“흐응... 히으으읍....!”

아멜리아는 힘껏 그의 셔츠로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을 죽였다.

젖꼭지에서 무엇인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감각과 함께 머리와 자궁을 징징 울리게 하는 환락이 파도처럼 몸을 뒤덮는다.

“하아.....으...”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아멜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열리며 하늘빛의 몽롱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아멜리아의 꽃잎에선 제철의 과일을 갈라놓은 듯 진득한 액이 흘렀다.

그 탓에 엉덩이를 받쳐 든 시트까지 온통 축축해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아멜리아의 특제 향수 중 하나인 ‘몽환의 향수’.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일종의 트랜스 상태를 유도하는 향수이다.

그 덕분에 아멜리아는 약간의 상상력과 집중만으로 정말로 시우의 품에 안겨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법 연구에만 몰두하던 아멜리아도 어둑한 밤이 달과 함께 솟아오르면 여지없이 몽환의 향수를 사용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괴로움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저 혼자 달아오르게 하던 뜨거운 공기가 식어버리고 나면, 늘 그렇듯 심연과도 같은 허무함과 무력함이 제자리를 찾는다.

시우가 떠난 이후 아멜리아는 다시 오두막에 틀어박혔다.

스승님을 잃고 난 뒤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골방에 몸을 웅크리고 마법만을 연구한다.

달라진 게 있다고 해봐야 가끔 이렇게 혼자 가슴을 주물거리는 일뿐.

그 외에는 지금껏 지속되었던 아멜리아의 일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아멜리아에게 가장 익숙한 일이고.

아멜리아에게 가장 자신 있는 일이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아멜리아는 마법을 사용해 몸을 깨끗이 하고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았다.

그녀의 시선 맞은 편, 평소에 찻잔을 보관하는 찬장에는 곱게 두 번 접힌 하얀 종이가 있었다.

일주일 전에 오두막을 찾은 소피아가 시우가 남기고 간 편지라며 전달해 준 것이다.

아직도 차마 읽지 못한 스승님의 유언장처럼 아멜리아는 도저히 그 편지를 펼쳐볼 수가 없었다.

저 편지를 읽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 난다.

상상의 여지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도 남기지 못한 채 결말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토록 원망하는 눈빛으로 떠났던 시우가 어떤 편지를 남겼을지...

온종일 그것만을 떠올릴 정도로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정작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정맥을 파고든 살모사의 독과 같이 아멜리아를 마비시킨다.

솔직히 말해 그가 용서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간절한 희망보다는 관계의 종언을 알리는 통보라는 생각에 무게추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저는, 겁쟁이예요....”

시우의 분노가 정당함을 이해하고 있다.

당신은 정말 끔찍하게도 이기적이라고 눈물을 참으며 말했던 시우의 모습을 곱씹고, 곱씹으며 후회로 점철된 나날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멜리아의 입장에서 비유하자면 누구보다 따르고 사랑했던 스승님이 사실은 그녀를 오랜 세월 동안 집요하게 괴롭혀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니.

그 배신감과 상실감은 구구절절 파고들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을 서툰 사랑이라고 포장할 자격이, 적어도 아멜리아 자신에게는 없음에 이렇게 도망치고, 또 도망칠 뿐이었다.

아멜리아는 팔을 뻗어 다시 향수병을 쥐었다.

손목에 몇 방울을 찍어 목과 귀 뒤에 바르고 침대 위로 눕는다.

눈을 감고 베개에 등을 기대면 다시 시우가 찾아왔다.

그의 손은 헐벗은 아멜리아의 몸을 제것처럼 주무르고 달콤하게 입술을 취했다.

“시우....”

번민과 고뇌는 밤과 함께 깊어졌다.

그 뒤에는 애가 끓는 듯한 아멜리아의 애절한 숨소리가 풀벌레 소리와 함께 고요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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