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1.
가볍게 시야가 출렁인다.
케테르 공작이 만들어 낸 ‘문’의 마법은 시우와 꽤 깊은 연관이 있는 마법이다.
그래서인지 익숙한 마력의 흐름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좀 건져갈 게 있을까 싶어 집중하기도 전에 어느새 천지가 변해있었다.
앞에서 플래시 라이트를 터뜨린 것처럼 확 밝아지는 시야.
강렬한 울렁임과 함께 탁 트인 밝은 하늘.
전면이 유리로 덮인 고층빌딩이 해일이 덮쳐오는 것처럼 늘어선 것이 보였다.
-빠아아아앙!
건물 외벽에 반사되어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경적과 차 소리는 ‘원래 이렇게 시끄러웠나?’ 싶을 정도로 커다랗다.
장소 대부분이 한적하고 조용한 게헨나에 비하면 도심 특유의 소음은 당장 전쟁 중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귀에 피로감을 주었다.
“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시우는 숨을 쉬었다.
크게, 크게, 더 크게.
폐가 빵빵하게 변할 때까지 들이쉬었다.
폐포를 파고드는 찌릿찌릿한 쓴맛.
목구멍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칼칼한 스모그가 비강을 후비며 아릿함을 남겼다.
시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도시를 양단하는 강.
그 위를 수직이 되도록 가로지르는 드넓은 대교와 내달리는 차들.
한동안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유명했던 빌딩도, 저 멀리까지 뻗은 커다란 한강과 그 주변의 산책로까지도 전부 눈에 들어온다.
가로등은 저렇게 생겼었지, 빌딩은 이렇게나 높았었지, 아스팔트는 물에 젖으면 이런 색으로 변했었지.
상상 속에서만, 혹은 꿈속에서만 보았던 풍경들이 현실이 되어 눈앞을 지나갔다.
“돌아, 왔다.”
돌아왔다.
어쩌면 절대로 밟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현세에, 한국에, 서울에, 한강공원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왔다... 돌아왔어...”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무릎을 꿇은 시우는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시우는 강렬한 확신을 원했다.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주변에 나 있는 잡초와 흙을 긁어모아 마구마구 입으로 쑤셔 넣었다.
서글서글한 모래와 잡초 뿌리가 입안을 할퀴면서 진한 흙 맛과 쌉싸름한 풀 맛이 났다.
신토불이렸다.
이것이 그리웠던 한국의 흙 맛이다.
“엄마! 저 형 흙 먹어!”
“쉿! 눈 마주치면 안 돼!”
시우는 쏟아지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동안 몸을 웅크린 자세로 흙과 잡초를 한가득 입에 문 채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아낌없이 쏟아내었다.
2.
시우는 산책로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들러 1.5L짜리 코카콜라와 아프리카 룰루를 샀다.
게헨나에는 이상하게 콜라가 들어오지 않고 담배도 한정된(완전 오래된 브랜드)만 들어오기 때문에 예전부터 피어오던 국내 담배를 접할 기회는 요연했다.
꽤 많은 것이 변한 편의점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다가 치킨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것도 한 마리 샀다.
계산할 때, 편의점 알바가 희귀하게 생긴 카드를 다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시우를 보고 미친놈은 오래 상종하기 싫다는 듯 급히 계산을 끝내고 치킨을 포장해주었다.
“요즘엔 편의점에서 닭을 튀겨주네.”
기껏해야 냉동 치킨을 생각했는데, 바스락거리는 튀김옷과 기름 향이 솔솔 올라오는 것을 보아하니 가슴이 떨린다.
오랜만에 밝아보는 폴리우레탄 재질의 조깅로를 꾹꾹 밟아 걷던 시우는 다리 옆의 벤치에 앉아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도를 넘어가는 짜릿한 탄산.
탄산수 따위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흙이 남긴 입안의 텁텁함을 시원하게 날려줄 최고의 음료수.
게다가 어찌나 진열대에 잘 보관되어 있던 것인지 머리가 시릴 정도로 차갑다.
“끄어어어어!”
거의 반병을 벌컥벌컥 들이마시자 목이 너무 따가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망설이지 않고 종이박스에 담겨 있는 닭다리를 골라서 잡아 뜯는다.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바스러지는 튀김옷과 그사이에 스며들었던 기름이 물방울처럼 터진다.
편의점 치킨은 편의점 치킨인지라 퀄리티가 썩 훌륭하진 않았지만 시우에게는 그것을 분간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거의 마시듯이 닭다리 하나를 먹어 치우고 다음 다리로 손을 뻗고 있었으니까.
자칫 조금만 부주의했더라면 뼈를 통째로 씹었을 것이다.
주마다 한번 야식으로 시켜 먹었던 치킨도 그렇게 맛있었는데 5년 만에 먹는 치킨 맛은 어떻겠는가?
시우는 볼이 미어터지라고 치킨을 우적우적 쑤셔 넣으면서 목이 너무 막히면 콜라를 입에 부어 삼키는 것을 반복했다.
그 짓을 5분 정도 하자 어느새 치킨이 한가득 담겨 있던 포장지는 텅텅 비어있다.
“와... 시발, 이게 섹스네.”
지금까지 했던 섹스는 섹스가 아니었다.
강변 공원 벤치에 앉아 과학 문명이 이룩한 도시를 배경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치킨과 콜라를 함께 먹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섹스다.
시우는 지금까지 섹스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던 자신의 무지함에 통곡했다.
초여름에 들어선 계절 탓에 직사광선은 뜨거웠지만 당장 그늘진 대교 밑은 솔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콜라까지 전부 마셔버린 탓인지 불룩 튀어나온 배를 잡고 몸을 뒤로 젖히자, 순간 착각이 들었다.
게헨나에서 있던 모든 일이 찰나의 꿈이고, 사실 자신은 계속 이런 생활을 보내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전역한 다음 날 같았다.
5년이 그렇게 길다고 느껴졌었는데 막상 나오자마자 까마득히 전의 일인 것처럼, 그것도 찰나인 것처럼 여겨지다니.
흡연자 특유의 감으로 어슬렁어슬렁 흡연 구역을 찾아 나선 시우는 목구멍의 기름기를 칼칼한 담배 연기로 쓸어내렸다.
여기서 담배 한 대만 딱 피우면....
“시발 섹스... 존나 좋아...”
그래도 아주 바뀐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람들의 옷차림이 조금 바뀌었다.
아무래도 패션은 유행에 민감하고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해마다 유행하는 트렌디한 패션이 있으니.
다들 깔맞춤이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만 바뀐 옷차림으로 강변을 어슬렁거린다.
왠지 남자들 머리도 당연하다는 듯이 포마드 아니면 베이비 펌이고.
여자들은 죄다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산책로를 달리고 있다.
“미친 저건 또 뭐야.”
이상한 전동 퀵보드 위에서 사람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같은 디자인의 퀵보드를 타는 것을 보아하니 단체로 대여라도 한 모양이다.
게헨나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마법이 그렇게 신기했는데.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십 층 높이로 쌓여있는 빌딩과 매연을 내뿜으며 느릿느릿 지나가는 차들이 더 신기하다.
이런 광경을 보면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도 썩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시우는 담배를 비벼끄고 흡연 부스에서 나왔다.
그래.
이런 걸 원했다.
당연한 일상과 당연한 풍경.
피부색과 인종이 다르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초리 하나 없고, 잠깐 앞을 들르면 편의점에서 콜라를 비롯한 이것저것을 사 먹을 수 있고, 괴상한 마법을 부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군림하는 지배계층이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그리웠던 광경.
이것이 시우가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던 파라다이스였다.
가슴을 메마르게 만들었던 향수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완치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엄마 아빠나 보러 갈까?”
시우는 삐뚤어진 안대를 고쳐쓰고 강변의 비탈을 올라가 택시를 잡았다.
이제 돈도 좀 생겼겠다.
거리에 상관없이 떡하니 모범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모범택시답게 친절한 미소를 짓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시우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의자에 붙였다.
2.
오랜만에 찾는 부모님.
빈손으로 가기에는 뭐해서 꽃다발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샀다.
참고로 꽃다발은 엄마 거, 소주는 아빠 거다.
게헨나의 건물이 고풍스럽고 고급스럽다면 현대의 건물은 조금 졸부 느낌은 나지만 훨씬 깔끔하고 친근하다.
회전문을 열고 들어가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겨 명부를 작성했다.
“엄마 아빠, 나 다녀왔어.”
아무리 바빠도 6개월에 한 번, 적어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찾아뵀었으니 이렇게 오랜만에 들른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 많이 보고 싶었어? 말도 없이 갑자기 안 찾아와서 놀랐지? 자, 이건 엄마가 좋아하는 안개꽃이고, 이건 아빠가 좋아하는 빨간 소주.”
시우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부모님과 시선이 맞는다.
활짝 웃은 채로 싸구려 등산복을 입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부모님의 사진.
“너무 안 왔다고 뭐라고 하지는 마. 5년, 아니 이제 거의 6년 만이긴 한데. 나도 진짜 엄마 얼굴 보려고 노력 엄청나게 했어.”
시우는 사진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리웠던 부모님의 얼굴도 조금은 색이 바랬다.
빛을 많이 쐬서 그런 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솔직히 말해도 안 믿을 것 같긴 한데. 나 판타지 세계에 납치돼서 마녀로 전직했어.”
시우는 자기가 생각해도 얼척이 없다는 듯이 얼굴을 가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녀니 판타지 세계니.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인데 배경이 현대로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위화감이 느껴질 줄이야.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웬 미친 여자도 만나고.... 뭐 그래도 나중에 알고 보니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또 귀여운 쌍둥이 여자들이랑도 같이 놀고. 아 아빠! 그리고 일본인 중에서도 좋은 사람 있더라. 가서 일본인 친구도 사귀었는데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교육했어, 잘했지?”
시우는 봉안당의 캐비넷을 열고 사진을 꺼내 들었다.
원래는 가족사진이었는데.
부모님 사이에 있었어야 할 시우의 모습은 포토샵으로 편집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진 상태이다.
“나 이거 가져가도 되나? 엄마 아빠 사진, 이거 없어서 얼굴 까먹는 줄 알았어.”
갑자기 가슴에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이상한 일이다.
“엄마랑 아빠는 나 기억하지? 안 잊어버렸지?”
우스운 노릇이었다.
사후 세계를 진정으로 믿어본 적도 없었는데 연이 잘려나가며 모든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자 괜히 우문이 떠오른다.
“아, 맞다.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 좋으려나?”
시우는 사진을 붙잡고 시시콜콜 잡다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너무 고생했던 얘기만 하면 걱정하실 게 뻔하니 적당히 좋은 경험 위주로 말했다.
예를 들어 보더 타운의 모습이나,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계절마다 변해가는 게헨나의 자연 풍경, 마법 식물 재배지로 이름 높은 영상의 라티푼디움.
“진짜 앞으로 어디 여행 갈 필요가 없다니까? 이제 어지간한 여행지가 눈에 차겠어? 유럽도 괜히 관광객만 더럽게 많아서 북작스럽기나 하고 소매치기 조심해야 하고....”
마법을 구사하는 괴물을 때려잡은 일, 무시무시한 추방자에 맞서 두 사람을 대피시켰던 일 등등.
“솔직히 그 장면 매드무비로 만들어서 내 장례식에 틀어야 한다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목이 아플 때까지 떠들어댔다.
“....그냥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나 진짜, 잘 지냈어요. 이제 평생 돈 걱정도 없어졌고...”
시우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의 사진이 담긴 작은 액자를 소중하게 품 안에 넣는다.
조금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쓱 닦았다.
“아무튼, 오랜만에 봐서 좋았어요. 저 이제 가볼게요.”
시우는 마지막으로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자주 올 테니까. 좀 심심해도 두 분이서 잘 지내고 있어요.”
고향을 떠난지 2025일.
시우는 한국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