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1.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우는 얌전히 게헨나에서 떠나기 위한 채비를 끝냈다.
사실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챙길 짐도 없고, 굳이 만나서 인사를 나눌 사람도 타카쇼 정도이다..
아멜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제머나이 백작이 쌍둥이를 확실하게 관리하는 것인지 오딜과 오데트는 얼굴도 내비치지도 못했다.
“오데트가 많이 섭섭해하겠네.”
그나마 오딜은 밤산책이라는 좋은 추억이라도 만들었는데 오데트는 시간이 엇갈려 서로 인사하지도 못했으니.
나름 친근한 사이라고 여겼던 만큼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괜히 이 일로 오딜과 싸우거나 하진 않겠지?
조금은 염려됐다.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일과가 다채로울 리 없다.
기껏해야 혼자 술을 마시다가 타카쇼가 일이 끝날 시간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아카데미에 들러서 이야기나 나눈다.
타로타운에 들러 맥주를 마시거나 대충 안줏거리를 나오는 나날.
이미 낙인을 지니고 영체가 된 시우에게 음식과 수면은 부가적인 문제였지만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인지 꼬박꼬박 세끼를 챙겨 먹고 잠도 시간에 맞춰 잔다.
하지만 깨어있는 시간을 전부 취해있던 탓일까?
모든 순간이 비몽사몽 간에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토록 고대했던 현세 복귀가 다가오는데 아무렇지 않다.
흥분도, 기대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현실감각이 마비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틀 남았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제머나이 백작이 다시 찾아오기로 한 기일까지 고작 이틀이 남았다.
한 손에 새끼줄에 묶인 햄을 들고 터덜터덜 타로타운의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
“....저기요?”
처음에는 워낙 작고 소심한 목소리라 자신을 향한 것인지도 몰랐다.
계속 갈 길을 걷던 시우는 등을 콕콕 찌르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묶은 듯한 올림머리에 편안한 듯한 원피스.
그 위로는 갈색의 카디건을 덮고 있는 여자였다.
큼직한 가슴과 순산형 골반, 온화해 보이는 눈매와 커다란 눈망울까지.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저 부르신 것 맞나요?”
시우는 아리송한 시선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한참이나 시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여자는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신시우 씨... 맞죠? 회복이 끝나신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엉망진창에 가까웠던 시우의 몸을 치료해준 마녀가 있더랬지.
타카쇼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한국 여자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길거리를 걷는데 회복이 끝났냐는 둥 말을 건 이 여자도 피부가 완전 새하얗긴 하지만 동양인이다.
그렇다면...
“혹시 스미르나 마녀님 되시나요?”
“네,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다고 들었는데 감사해요.”
“아, 아니에요! 고생은요... 저는 의사로서 소임을 끝까지 다하지 못했는걸요...”
“아닙니다.”
스미르나가 할 수 있던 것은 반시체나 다름없었던 시우를 무지성 마법머신으로 만들었던 것까지다.
그 이후로는 모든 치유 행위를 시우 쪽에서 차단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때 담당했던 환자가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
“........”
예빈에게 시우를 100일 가까이 옆에서 지켜봤을 뿐만이 아니라 처음으로 제대로 치료해본 환자였고, 또 첫 경험 상대였지만 시우에겐 그 당시의 기억이 없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만 알고 있는, 굉장히 낯선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애매한 감정의 격차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소환했다.
“어, 음... 이것도 인연인데 저희 집에 들러서 차나 한잔 하실래요?”
“아... 좋죠?”
결국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예빈이었다.
시우 역시 그를 치유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다던 예빈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어색한 와중에도 조건을 수락했다.
“그럼, 이쪽으로....”
“아, 네.”
숨이 막힐 듯한 어색함과 함께 두 사람은 타로 타운의 광장 쪽으로 향했다.
2.
예빈 스미르나는 시우를 치유해 준 대가(비록 완벽하게 성공하진 못했지만)로 게헨나의 시민권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제머나이 백작은 그녀가 원하는 곳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예빈이 선택한 곳이 바로 이 타로타운.
게헨나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타운이었다.
시우를 치유하는 것에 실패한 이후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예빈은 마법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그녀의 능력으로 많은 시민을 돕기 위해 무상으로 진료해주는 치료소를 차렸다.
예빈이 시우를 데려온 곳도 2층짜리 석조 건물.
1층은 치료소로 운영하며 2층은 예빈이 거처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좀 지저분하죠?”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예빈은 부끄러운 듯이 이것저것을 정리했다.
대충만 봐도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알 수 있었다.
소독을 위해서인지 찌릿한 알코올 냄새는 물론 각종 약품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으니 말이다.
“치료소를 운영하고 계시는 건가요?”
“네, 보니까 게헨나는 의료인프라가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부족하지만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던 예빈은 괜스레 제 자랑을 하는 느낌이 되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돌렸다.
“그, 금방 차를 내올게요.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디론가 사라지는 예빈.
시우는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었다.
남들을 위해 치료소를 차리는 마녀라... 그간 지니고 있던 마녀의 이미지와는 꽤 차이가 있다.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 않는 수수한 다기에 차를 우려온 예빈은 소박한 화과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사실 시우 씨랑 이야기해 보고 싶었거든요. 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예빈 스미르나라고 합니다.”
“예빈? 혹시...”
“아, 맞아요. 저희 동향 출신이에요.”
묘하게 친근한 기색이 풍긴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신시우라고해요. 어떤 분인지 뵙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굉장히 좋은 일 하시는 분이셨네요.”
“에이, 그런 건 아니고요.”
연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끄러워하는 예빈.
마녀들이 자신의 능력을 오롯이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만을 봤던 만큼, 대가도 받지 않고 타인을 돕는 그녀의 행동은 꽤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시우 씨도 멋진 분이시잖아요. 견습마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공적과 대치했다는 것도, 어지간한 용기로는 못 하는 일이니까요.”
“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시우가 멋쩍어할 차례였다.
이게 남의 일이었더라면 ‘대단한 사람이구먼’하고 생각했을 텐데, 정작 본인의 일이 되니 지금 와서 생각해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밖에서는 무슨 일 하셨나요?”
잠시 동안 서로 얼굴에 금칠하기가 끝난 이후 예빈의 질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화.
한동안 뭍으로 나온 낙지처럼 흐느적거리는 생활을 보내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눈앞의 마녀가 그만큼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일까.
시우는 오랜만의 대화가 퍽 즐거웠다.
게다가 둘 다 한국 출신이라는 점, 고향을 그리워도 가지 못했었다는 점이 더해지자 대화는 더욱 활발해졌다.
본래 대화란 서로의 공감대에서부터 출발하는 행위이니 말이다.
“아, 치맥 너무 먹고 싶어요... 밤샘 레포트 중에 야식으로 먹는 치킨이 최고였는데.”
“저도 사실 그거 먹으려고 현세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시민권이 생기셨으면 얼마든지 밖에 가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전 위계에 비해서 전투 능력은 없다시피 하거든요. 괜히 밖에서 무슨 일에 휘말릴까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치료소가 아직 자리를 못 잡아서 조금 더 제가 관리해야 할 것 같아요.”
뭐 이런 자질구레한 말들부터.
“그거 기억나세요? 동네 문방구가면 딱지 파는 거.”
“아, 그 작고 동그란 종이 딱지 말씀하시는 거죠? 위에 캐릭터 그려진 거!”
“네, 맞아요! 그거.”
“이것도 아시려나요? 과학의 날마다 만드는 물로켓.”
“와, 전 그거 한 번도 성공해 본 적 없어요. 이상하게 만드는 족족 망가지는 거 있죠?”
순수함을 간직하던 문방구 시절 추억팔이까지.
간질간질한 옛 기억과 향수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두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 뒤였다.
오래간만에 꽉 막혀있던 속을 풀어줄 만한 즐거운 대화이자 힐링 타임이었다.
어느새 뉘엿뉘엿 지는 해가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이 감정은 예빈도 마찬가지였는지 시계를 보는 시우의 모습을 보고 아쉬운 기색을 풍긴다.
사실 예빈은 시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나와 지내야 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도 한참이 지났으니.
그런 부분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즐거운 대화였어요.”
“그러게요, 그간 못했던 대화 다 한 것 같아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체험판을 한 기분이다.
기뻐하는 시우를 보며 싱긋 웃고 상체를 숙여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예빈.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가만히 있기는 뭐 했기에 시우도 냉큼 도왔다.
“앉아계셔도 괜찮은데.”
“에이, 양심이 있어야죠. 어떻게 얻어먹기만 하고 갑니까?”
“그럼, 저쪽에 다용도실이 있으니까 거기 두시면 될 것 같아요.”
“아, 제가 하겠습니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 탓인지 살랑살랑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약간 달콤한 파우더 냄새라고 해야 하나. 우유 냄새인 것 같기도 하고...
딱히 향수를 쓴 것 같지도 않은데 달콤한 향기가 유혹적으로 코를 스치자.
“왜 그러세요?”
발기했다.
그것도 무슨 정력제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풀발기했다.
시발 이거 갑자기 왜 이래?
시우는 다급하게 다리를 꼬며 바지를 뚫고 나가려는 자지를 억누르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거 어디로 가져다 놓으면 될까요?”
시우의 바지는 슬랙스에 가까운 편안한 면바지.
게다가 자지의 각도가 아주 좋지 않다.
위로 잘 세워 수납해 놓지 않은 결과 피가 쏠린 시우의 물건은 텐트를 쳤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바지를 들어 올리고 있다.
이 테이블을 벗어나는 순간 예빈의 눈에 이 치태가 모두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먼저 치우겠다고 말을 꺼낸 주제에 그녀를 보낼 수도 없고 말이다.
뭐 사실 발기야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도 일어나는 생리현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한 의심을 남겨 좋을 것이 뭐 있겠는가?
잠시 방법을 궁리하던 시우에게 탈출구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테이블 아래 깔려있던 냅킨까지 함께 챙겨 들었다.
“치우는 김에 냅킨까지 정리할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아까 대화 할 때부터 생각했는데 엄청 꼼꼼하신 편인가 봐요.”
“제가 좀 그렇습니다.”
예빈은 딱히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니 이제 이 냅킨을 접시 아래로 늘어뜨려 거시기를 가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시우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예빈은 스쳐 다용도실에 그릇을 내려놓으러 갔다.
“....휴우.”
예빈은 시우가 사라진 부엌을 힐끗 바라보다가 참았던 숨을 쉬었다.
맞겠지?
아마 맞겠지?
사실 시우를 우연히 보았을 때 말을 걸지 말지 망설였다.
우선 치료를 위해서라 한들 허락도 받지 않고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데다가 꽤 낯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은 예빈이 치료한 첫 환자이기도 하고 한번 꼭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사람인만큼 집으로 초대했다.
조심스레 대화를 나눠본 결과 비밀스러운 관계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저건 뭐란 말인가?
그의 바지에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던 방망이.
그 앞을 가린 냅킨까지 들어 올린 것의 정체는 아마도... 커다란 물건.
사실 전부 기억하면서 모른 척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지.”
그렇게 음흉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메리골드 남작의 저택에서 머물며 그를 치료하던 때가 생각났다.
알몸으로 그의 위에서 헐떡였던 것과, 머리채를 붙잡은 시우가 뒤에서 거칠게 몸을 범하던 일.
매일 밤 예빈이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꼼지락거리게 했던 기억이 말이다.
그때는 분명 일 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 잊겠다고 다짐했는데...
새삼 이렇게 멀쩡해진 그와 독대하니 자꾸 야릇한 쪽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게다가 말할 때마다 미소짓던 얼굴, 소매를 정리하던 손짓, 차를 마실 때마다 호쾌하게 움직이던 목젖, 마지막으로 옷 위로 보아도 우람한 그의 물건까지.
남성미 넘치는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번뇌가 파고든다.
“으으.... 미치겠네.”
화끈거리는 얼굴을 토닥이는 예빈.
조금 밝히는 편인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식으로 몸이 달았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시우가 돌아왔다.
“좋은 차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려고 하는데요.”
예빈이 예의주시하고 있던 곳은 시우의 다리 사이였다.
우뚝 솟았던 그의 가랑이 사이는 어느샌가 푹 꺼져있다.
그렇다면 아까 그게 잘못 봤던 게 아니라는 의미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그냥 보낼까?
고민하던 예빈의 눈이 번개같이 포착한 것은 그가 테이블 위에 옮겨두었던 통햄.
예빈은 그 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술안주로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