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1.
“저는 당신이 현세로 돌아가 주었으면 해요.”
알비레오와 독대하게 된 시우.
데네브가 나가자마자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데네브가 제안한 ‘가신으로서 제머나이 백작가에 남는다’라는 선택지는 없는 것으로 생각해주세요.”
시우를 향하던 호의가 조금은 식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일까?
아직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가 차곡차곡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시우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가요?
불과 삼십 여분 만에 그의 얼굴을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알비레오가 입을 연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마력이 일렁이는 것이 시우의 왼눈으로 포착되었다.
“오늘 밤, 오딜과 나가서 무엇을, 했나요?”
순간적인 집중.
왼눈으로부터 퍼져나간 그의 집중력은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현상을 슬로우 모션처럼 받아들였다.
알비레오가 입을 여는 순간 그에 호응하듯이 일렁이는 주변의 마력.
그녀의 음성은 호흡과 성조, 발음, 음의 높낮이에 의해 하나의 마법식처럼 구현되었다.
성대를 진동하며 나온 폐부의 공기는 주변 마력과 융화되어 아주 미세한 검은색 깃털을 형상화했다.
그렇게 생성된 수십 개의 깃털이 시우를 향해 날아올 때.
그의 왼눈이 빛났다.
시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것들을 쳐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은 마력에 둘러싸인 시우의 손은 깃털을 흐트러뜨리고 그대로 파훼했다.
굳이 디스펠을 행사한 것은 알비레오가 사용한 마법의 정체가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타이밍에서, 자성마법을 사용한다면 그 용례는 단 하나.
아마도 자백의 시.
쌍둥이와 있던 모든 일을 술술 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니?”
그건 시우가 처음 듣는 알비레오의 당혹성이었다.
알비레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백의 시가 흐트러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알비레오가 사용하는 자백의 시는 쌍둥이와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
그만큼 은밀하고, 그만큼 자연스러우며, 그만큼 파훼가 어렵다.
그저 귀를 막고 소리를 차단하는 것으로 방어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우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감지했으며, 또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식의 구성을 흩어버렸다.
“어떻게 한 거죠?”
“어, 저도 모르게 그만...”
“어떻게 한 건지 물었어요.”
다른 마법도 아니라 자성마법을 즉석에서 디스펠하다니.
마도의 길을 걷는 자로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냥 눈에 보이는 마법식을 걷어냈습니다.”
“.....시우 군은 번번이 저를 놀랍게 하네요. 제 자성마법이 보였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몸이 회복된 이후로... 마력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보여요.”
알비레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력의 흐름이 보인다?
단순히 마력의 흐름을 관측할 수 있으면 자성마법을 파훼할 수 있다고?
그럴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신비로운 왼눈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도 깨닫겠지.
알비레오는 꿈틀거리며 충동처럼 솟아오르는 마법에 대한 학구심을 느꼈다.
마녀에게 학구심이란 인간이 식욕, 성욕, 수면욕을 느끼듯이 아주 자연스럽고 강렬한 욕구다.
그러나 그 충동을 꾹 억누른다.
지금 이 자리는 그녀의 마법 연구를 위한 자리가 아니다.
“갑자기 마법을 사용해서 미안해요. 아무래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것이 있는 것 같아서요.”
“........”
그렇다고 다짜고짜 자백의 시라는 끔찍한 마법을 사용하다니.
오딜에게 한 번, 오데트에게 한 번.
이미 두 번이나 당해본 적 있는 시우로서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마법이다.
“시우 군은 우리 쌍둥이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죠?”
역시 백 년이 넘게 살아온 마녀의, 그리고 어머니의 촉은 시우가 간단히 속여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마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미 의심스러운 정황이 충분히 포착되었다는 의미다.
이미 심증이 빵빵한 상태에서 굳이 거짓을 고해 그녀의 심사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시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두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결국 들키고 말았지만, 이러나저러나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조금 전 새롭게 알게 된 잔혹한 진실은 시우에게 커다란 낙담을 안겨주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고 해도 별다른 생각이 들 것 같지 않다.
5년간의 꿈이, 바라보며 의지했던 목표가 순식간에 부서진 것이다.
알비레오는 무덤덤하게 말하는 시우를 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미 직감하고 있던 사실 아닌가?
시우가 쓰러진 이후 쌍둥이가 일주일마다 꼬박꼬박 그의 병문안을 한 것도, 애틋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것도, 단순히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향한 것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비레오가 모르는 모종의 관계가 섞여 있으리라고는 예상했다.
“후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답을 듣는 순간 불쑥 떠오른 분노를 잠시 가라앉히고 머리를 식힌다.
알비레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의 분노의 기색도 남기지 않은 채 깔끔하게 씻겨나가 있었다.
“시우 군이 착실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무분별하게 견습마녀에게 접근 했을 리는 없죠. 관계를 먼저 시작한 것도 쌍둥이의 호기심 때문이었나요?”
“그렇습니다.”
알비레오의 지적이 너무 정확해서 살짝 놀란 시우.
“남녀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나무랄 정도로 쌍둥이를 과보호하려는 건 아니에요. 오딜도 오데트도 사랑에 눈을 뜰 나이죠. 감히 판단을 내리자면 시우 군은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고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알비레오는 엄격한 목소리로 의사를 전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를 존중하지 않을 생각은 없어요. 시우 군이 저희 가문의 은인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고요. 그렇지만 저는 제머나이 알비레오이기 이전에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스승이에요. 당신을 계속 쌍둥이의 곁에 두기엔 너무 위험하고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네요.”
설령 시우에게서 강제로 떨어뜨려 놓는다 한들 그가 게헨나 내부에 있다면 쌍둥이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공사다망한 백작이 쌍둥이의 옆에만 달라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지금은 유사 성행위나 그 이외의 방법(짐작은 가나 자세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등으로 그릇이 오염되는 걸 방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순간의 실수로 일이 영영 잘못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따라서 그의 원래 소망대로 그를 현세로 돌려보내고 쌍둥이와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이라 생각되었다.
“오딜과 오데트가 정식으로 낙인을 승계받게 된다면 제가 구태여 이런 간섭을 할 필요도, 할 방법도 없어져요. 길진 않을 거예요. 앞으로 5년 정도만, 부덕한 어미의 마음을 이해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시우로서도 큰 불만은 없었다.
처음에야 쌍둥이가 스타트를 끊었다 한들 그 이후부터는 얼마든지 거절한 깜냥이 됐던 상황이니까.
결국 욕망에 진 게 아니던가?
오히려 알비레오의 반응이 굉장히 점잖다고 생각하며 겸허히 처분을 받아들일 예정이었다.
“시우 군으로서는 제멋대로라고 느껴질 수 있겠네요. 멋대로 잡혀 와서 이제는 멋대로 나가라고 하는 꼴이니. 미안해요.”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거기에 어차피 게헨나로 잡혀 오지 않았더라면 죽은 목숨이었던 거잖아요.”
잠시 침묵.
“그 전에, 제 부탁이 시우 군의 의사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것이면 좋겠네요. 현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여전한 건가요?”
“네,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하고 싶은 일도 있고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죠.”
시우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한 위험성은 시우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사안이다.
알비레오는 내심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시우 군이 나가서 생활할 터전을 마련하는 것과 게헨나 시청에서 절차를 밟기까지 대략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그 기간 안에 이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해 줬으면 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전까지는 이 별장에서 기거해도 좋아요. 가능한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네.”
알비레오는 2층으로 올라가더니 옆구리에 쿨쿨 잠이 든 쌍둥이를 끼고 저택으로 돌아갔고, 집 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시우는 술을 꺼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혼자 홀짝였다.
2.
인생사 무상함을 느낀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여자는 실은 그가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여자였고, 5년 동안 좆뻉이 까면서 기도하던 현세로의 복귀는 새로운 고난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엠~병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워낙 골목 그늘진 곳에 지어진 까닭에 대낮에도 어스름한 거실.
시우는 소파에 늘어져 병나발을 불며 넋두리했다.
그 옆에는 산더미 같은 술병들이 널려 있었다.
오딜이 사준 맥주나 마시려고 지하 저장고로 내려갔는데 무슨 비싸 보이는 술이 이리 많은지 죄다 가져와서 하나씩 맛을 비교하는 중이다.
하나 같이 더럽게 맛없고 독하기만 한 술들.
근데도 왜 이렇게 술술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공허한 탓일까.
시우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여기서 술만 퍼먹다가는 마음에 곰팡이가 잔뜩 낄 것 같다.
우선 누구라도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시우는 곧장 포탈을 이용해 아카데미로 향했다.
어차피 여기서만 쓸 수 있는 금화도 많고, 당장 현세에 나가도 빵빵한 지원을 약속해 주었으니 딱히 돈이 아깝진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회랑을 거쳐 동쪽 교사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마치 NPC처럼 슬렁슬렁 비질을 하고 있는 타카쇼였다.
“옷...! 오오옷..! 오오오오옷!!!”
“시끄러워 임마.”
시우를 발견하자마자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 타카쇼는 덥썩 그를 끌어안았다.
역시나 어마어마한 괴력이었기 떄문에 거의 토할뻔한 지경이 된 시우.
“이 새끼! 살아있네. 멀쩡하네!”
“야, 야야, 좀 떨어져 징그럽게.”
그 뒤에도 한참이나 눈물을 글썽이며 시우를 환대하던 타카쇼.
복도에서 수선을 떨 수는 없으니 자리를 옮겨 인근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갑자기 일어나서 어디로 사라졌길래 뭔가 했어 이 친구야.”
“병문안 자주 왔다고 전해 들었어. 고맙다.”
“짜식, 친구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데 당연히 가야지. 근데 너무 자주 가면 니가 나 보기 싫어서 계속 잠들어 있을까 봐 냅뒀다. 그나저나 안대는 뭐냐? 카카시야?”
“그럴만한 사정이 있지.”
“그나저나 너 치료해주시던 마녀님 진짜 예뻤는데. 종종 연락하고 지내?”
“아니, 누군지 얼굴도 몰라. 안 그래도 감사 인사 한 번 드려야 하는데.”
처음엔 반갑게 시우를 반겼던 타카쇼도 뭔가 미묘한 시우의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다.
몸이 완치되었으니 팔짝팔짝 신을 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굉장히 침울하다.
게다가 술 냄새도 풀풀 나고 말이다.
“무슨 일 있냐?”
“있지. 있으니 이러지.”
시우는 토하듯이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아멜리아와 있던 일, 그로 인한 복잡한 심경.
현세로 돌아갈 때 생길 일등.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주구장창 늘어놓았다.
우스운 것은 눈물은커녕 눈가에 물기 한 줌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휴.... 참, 내가 뭐라 할 말이 없네. 너도 참 심란하겠어. 친구.”
타카쇼는 시우의 등을 탁탁 두들겼다.
“그래서 이 지경이 됐는데도 꼭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괜히 내 욕심 때문에 붙잡는 것 같아 보일까봐 말 안 하려 했는데. 그냥 여기서 같이 지내면 안되냐?”
“부모님 얼굴은 그래도 봐야지. 얼마나 걱정 많으셨겠어.”
시우를 만류하려던 타카쇼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그, 아멜리아 부교수 일은.”
“그냥 잊고 살아야지. 그래도 나 살린답시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는데 그거는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 시발 모르겠네.”
“그 정도 인사는 괜찮잖아? 네 말대로라면 앞으로는 안 볼 사이가 될 거고,”
“그것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
왜 그랬는지도 물어보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물어보고 싶다.
아직도 주저앉아 울고 있던 아멜리아의 모습이 뇌리에서 씻겨나가질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
따뜻했던 기억과는 정반대인 그녀의 차가운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든 미소가 기만에 불과했다는 배신감이 차게 굽이쳤다.
비단 5년의 세월이 문제가 아니었다.
게헨나의 모든 것은 시우를 더욱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시우는 고개를 떨군 채 타카쇼에게 받은 담배 연기를 짙게 뿜어냈다.
눈물은 역시나 흐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