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30화 (130/917)

#130

1.

제머나이 백작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오딜은 분명 백작이 현세에 나가 있으므로 한 달가량 연락이 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터인데.

여자친구가 부모님 여행 가서 집이 비니까 놀러 오라 해서 온갖 짓을 하며 즐기다가, 갑자기 돌아온 부모님과 맞닥뜨리는 그런 상황 아닌가.

물론 그런 끔찍한 경험은 해 본 적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비유이지만...

오딜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오딜, 이리 오렴.”

제머나이 백작의 시선은 오딜을 향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지만 평상시와 무게감이 다르다.

그 안에 담긴 책망과 꾸짖음은 시우조차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 이, 이건 제가 다 설명할게요.”

“설명은 나중에 들을게. 일단 어서와, 오딜.”

오딜은 미안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시우를 보더니 쭈뼛쭈뼛 거실로 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기가 눌려 오딜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는 시우.

눈발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데네브가 오딜의 팔목을 가볍게 잡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검진하듯이 오딜의 손목을 한참 동안 잡고 있던 데네브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외박을 통보한 견습마녀가 남자와 함께 밤늦게 나갔다가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으니 ‘그릇’에 손상이 간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라고 할 수 있겠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파악한 데네브는 꽁! 하고 오딜에게 꿀밤을 때렸다.

“아얏!”

“누가 허락도 없이 밖에서 외박하래! 너희들 찾아서 얼마나 헤맸는지 아니?”

“죄송해요... 하지만 조수님이 깨어나셨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서...”

“잘 들어 오딜, 이번 일은 절대로 가볍게 안 넘어갈 거야.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올라가서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꾸나.”

백작이 현세에 외출 중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이 실수였을까?

시우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알비레오가 그에게도 말을 건넸다.

“신시우 군은 이곳에 남아주세요.”

“스승님, 제가 설명할게요. 조수님은 잘못 없어요! 제가 먼저 밤 산책하자고 꼬드기고 별장에서 자고 가라고 꼬드겼어요!”

다급한 오딜의 변호를 칼같이 잘라낸 사람은 데네브였다.

“오딜, 우리가 직접 이야기 할 테니 올라가렴.”

“하지만....”

“올라가.”

쌍심지를 치켜세운 데네브의 기세에 주눅이 잔뜩 든 오딜.

시우의 사정을 설명해 줄 변호사가 법정에서 퇴출당하게 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면 이런 기분일까.

이거 진짜 좆된거 아닌가? 라는 생각만 돌림노래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오딜, 네가 날 더 화나게 하지 않게했으면 좋겠구나.”

알비레오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리자 오딜도 마냥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저 정도로 화난 스승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올라갈게요, 올라가는데, 스승님. 대신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네가 지금 그런 말을 할 떄니?”

“해야겠어요!”

뺵 소리를 지른 오딜이 꿋꿋하게 시우를 위한 마지막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었다.

“만약 스승님이 조수님을 헤치신다면 저는 앞으로 스승님 얼굴 절대로 안 볼 거에요. 절대로!”

“요 녀석이 정말!”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당돌한 말을 늘어놓는 오딜에게 꿀밤을 한 대 더 먹이려는 데네브.

그런 그녀를 자리에 앉아 카스를 마시던 알비레오가 만류한다.

“데네브, 됐어.”

“언니! 요 맹랑한 녀석 말버릇 좀 봐! 지금 누가 잘못했는데! 게다가 옷차림은 이게 뭐니? 세상에! 속옷에 망토만 입고 밖에 나다니다 온 거야?”

“데네브 됐다니까.”

알비레오는 대충 손을 흔들더니 오딜과 눈을 마주친다.

오딜은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로서도 먼저 잘못했다는 자각이 있지만 시우의 안위는 엄한 스승님의 꾸중을 듣는 것보다 중한 일이였다.

“오딜, 신시우 군을 헤치지 않을 것을 맹세할게. 이제 됐니?”

오딜은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었으니 올라가서 자렴. 그와는 따로 이야기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네... 멋대로 나서서 죄송해요...”

시우의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진이 빠진 듯이 꾸벅 사과한 오딜은 시우에게 입모양으로 ‘미안해 조수님’이라고 말하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렇다.

오딜은 모든 상황이 끝났을지 몰라도 시우에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 좀 나눌까요?”

알비레오는 손을 뻗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시우에게 맞은편 소파를 권했다.

2.

가시방석 이제 그런 진부한 표현은 필요 없다.

이건 지뢰 방석이다.

일단 헤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받아내었지만 제머나이 백작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런 빽도 없는 시우를 엿먹이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오딜을 꾸짖던 데네브가 소파에 앉으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본론에 앞서 쾌차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미리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네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에요.”

겉으로나마 정중한 안부 인사를 건네는 알비레오와 다르게 데네브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있었다.

예리한 자색의 시선이 가슴을 꿰뚫는 것 같다.

“데네브.”

“알았어, 이제 안 할게. 미안해요. 신시우 씨.”

“아니요, 괜찮습니다.”

후우후우 심호흡을 하는 데네브 백작.

굉장히 점잖고 정숙한 첫인상과는 다르게 꽤 감정적인 모습이 엿보였다.

다름 아닌 견습마녀의 일이 걸린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법하다.

시우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부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지금부터 하는 말에는 거짓말 없이 대답해주면 좋겠네요.”

“....네.”

“이 시간에 오딜과 밖에 나가서 무엇을 했죠?”

첫 질문부터 말문이 턱 막혔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걸 사실대로 말하는 게 맞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부모나 다름없는 백작 앞에서 오딜의 뒷구멍을 희롱했다?

게다가 파고파고가다보면 오데트의 개통사실도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걸 정말 말하라고?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만다.

“밤 산책을 했습니다.”

“그것만요?”

“키스...도, 네, 키스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데네브는 어지럽다는 듯이 하늘을 바라보며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고 알비레오는 차분한 눈빛으로 시우를 응시했다.

시우는 무릎을 모으고 정자세로 앉은 채 ’제발 여기까지만 물어봐라, 제발 여기까지만 물어봐라’ 기도했다.

열성적인 기도가 통했는지 알비레오는 지그시 눈을 감고 주제를 돌렸다.

“죄송할 일은 아니죠. 나이가 찬 남녀간의 마음이 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가뜩이나 신시우 군은 우리 쌍둥이에게 잔뜩 호의를 얻고 있으니까요.”

“키스 이상은? 다른 이상한 건 안 했겠죠?”

“데네브, 자꾸 방해할 거면 잠시 나가서 머리 좀 식히던가 해.”

찰나의 틈을 타 등골을 얼어붙게 만드는 데네브의 추가심문이 있었지만 알비레오 덕에 제지되었다.

“오딜의 그릇도 멀쩡하고, 다른 무엇을 떠나서 신시우 군은 제머나이 가문의 은인이야. 경솔하게 그의 행동을 책망할 순 없어.”

“나도 알아, 알긴 아는데. 후우... 후우... 안되겠다. 나도 술 좀 줘.”

데네브는 맥주병을 뺏어 들더니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제아무리 예법을 중시하는 백작이라도 쌍둥이의 일이 걸리면 정신을 반쯤 놓는 모양이다.

시우는 진심으로 제머나이 백작이 쌍둥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데네브만 있었다면 참사가 일어나도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미안해요. 제가 감정이 앞섰어요.”

“아, 아닙니다. 제가 같은 상황이었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고개를 드시죠.”

잠시 머리를 숙여 사과한 데네브는 한결 이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진짜 다행이다.

“먼저 감사의 말씀을 않을 수 없겠네요.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용맹함과 지략으로 우리 쌍둥이를 구해주었으니.”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의에 맞서며 의를 행하는 마음에는 신분의 고저를 떠나 경의를 표할게요.”

“본래 바로 드렸어야 했던 인사지만 아시다시피 신시우 군은 줄곧 쓰러져있던 상태여서.”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합니다.”

백작은 나란히 고개를 숙였고 시우는 저번처럼 손을 휘휘 저으며 난처해했다.

감사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다.

그냥 그런 상황이 되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을 뿐이기도 하고.

“아닙니다, 제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일인데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제머나이 백작이 고개를 조아린다는 부담감, 대뜸 칭찬받는 것에 대한 쑥스러움, 여기서 어떻게 일이 틀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잘 버무려진 샐러드가 되어 시우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기품있게 감사 인사를 끝낸 알비레오가 먼저 묻는다.

“몸은 완전히 회복된 건가요?”

“네, 다행히도...”

“메리골드 남작께서 무척 기뻐하셨겠네요. 밤낮으로 신시우 씨의 옆자리만 지키고 있었는데.”

“........”

메리골드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시우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지금의 시우는 아직 그 이름을 듣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진정된 상태가 아니다.

오딜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잊고 있던 혼란이 되살아난 기분이었다.

“메리골드 남직께서 시우 씨를 살리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치유의 마녀를 불러들이기도 했고, 아무튼 옆에서 보는 제가 다 숙연해질 정도로 보살폈....”

아멜리아가 시우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슬쩍 그녀의 노고를 일러주는 데네브.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은 아멜리아의 필사적인 발버둥에서 기인했던 것이니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리라 여겨 가벼이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시우의 인상이 팍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시우도 황급히 표정을 폈지만 이미 어색한 기류가 형성되고 난 이후다.

알비레오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아무튼 보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해요. 시우 군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보상을요.”

시우는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멜리아, 아멜리아, 아멜리아.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어디든 누울 자리 보면서 발을 뻗어야 하는 법이다.

제머나이 백작은 그의 게헨나 탈출을 이뤄줄 유일한 동아줄 아닌가?

굳이 추태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생각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현세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곳을 떠날 것이다.

다시 돌아가 차분하게 살아가다 보면 이것저것 골치 아픈 일들도 잊히겠지.

5년 동안 그것만을 바라왔던 만큼 새삼 생각이 바뀔 일은 없었다.

현세로 돌아가는 일이란, 미워하던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또 좋아하던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둥 극심한 혼란을 겪는 시우가 유일하게 확고한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인생의 부표였다.

“흐음....”

“노파심에 묻는 거지만... 현세에 나갈 경우 생길 일들을 남작께 들으셨나요?”

“네?”

현세에 나갈 경우 생길 일들?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남자가 생겼으니 마녀들이 눈독을 들일 것이라는 말인가?

더군다나 지금은 ‘낙인’까지 생겨버린 듯하니 조금 더 몸을 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오딜에게 받은 오르골도 있고, 무엇보다 시우가 낙인을 지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 일테니 잘만 숨기고 다닌다면야.

“저희는 달리 시우 군을 설득하거나, 혹은 현세로 못 가도록 막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신시우 씨가 어지간한 마녀들이 군침을 흘릴만큼 희소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니까요.”

“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만... 신시우 군이 현세로 돌아가게 됐을 때 벌어질 일들에 대해 조금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저희의 얘기를 듣고도 생각이 같으시다면 그 의사를 존중할게요.”

갑자기 심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조금 당혹스럽다.

나가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안대를 벗어봐요.”

“예?”

혼란스러워하는 시우에게 알비레오를 제 왼쪽 눈을 가리키며 말한다.

“확실히 해야 할 문제이니까요.”

여기서 눈을 보이는 것이 과연 맞는 선택지일까?

시우는 쌍둥이를 믿는다.

조금은 철없고 까불거리긴 하지만 천진한 오딜과 오데트는 그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제머나이 백작은 어떨까.

단순히 쌍둥이의 스승이라는 이유만으로 믿어도 좋은 걸까?

“절대 발설하거나 허투루 유출하지 않아요. 제머나이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요.”

잠시 망설이던 시우는 비스듬히 씌워져 있던 안대를 풀렀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찬연한 황금빛의 눈동자가 드러난다.

알비레오는 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역시, 낙인이 새겨졌군요.”

“세상에...”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어려진 시우의 육체.

게다가 사소한 흠결까지 완벽하게 수정되었음에도 시종일관 안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알비레오가 짐작했던 일이기도 했다.

데네브는 짐작도 못 했다는 듯이 떡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나요?”

“당장은 아니지만 곤란한 문제로 번질 우려는 충분하죠.”

“경청하겠습니다.”

향후 인생 설계를 논하기 위해 진중하게 귀를 기울이는 시우의 앞에서 제머나이 백작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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