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25화 (125/917)

#125

1.

시우는 등을 감싸는 따뜻함을 느꼈다.

시우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오딜의 몸이 마치 포근한 쿠션처럼 그를 감싼다.

정신없이 튀는 공처럼 혼란스러웠던 마음도 조금은 차분해졌다.

오갈 곳 없이 떠도던 마음의 벡터가 조금은 정리된 것 같았다.

“속 시원해?”

시우는 느릿하게 오딜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커다란 곰 인형을 안는 것처럼 그를 안고 있던 오딜도 슬쩍 그의 어깨를 놔주었다.

일시적인 마취임은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아멜리아의 상반된 모습이 떠오른다면 시우는 분명 괴로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우는 남아있던 눈의 물기를 쓱 훔치고 씩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오딜 님.”

“뭐야, 이제 와서 인사하기야?”

시우가 웃자 따라 웃는 오딜.

어쩐지 그녀의 코끝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말이다.

코를 훌쩍인 오딜은 시우의 손목을 끌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자, 여기 앉아.”

“주무시지 않으셔도 되나요? 이미 늦었는데.”

벽난로 옆 괘종시계는 어느새 오전 3시를 가리키고 있다.

초목도 잠들 야심한 시각인데 오딜은 꽤 활기가 넘친다.

경황이 없어 떠올리지 못했던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시우.

“잠깐만요. 지금 여기 별장이죠?”

“응.”

“저택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셔도 되나요?”

“오늘 하루는 외박하겠다고 허락받았어. 조수님은 걱정 마.”

시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설마 자신이 기어들어 온 까닭에 그를 돌보기 위해 무단으로 외박을 한 것이라면 무척 신경 쓰일 뻔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오딜이 말한다.

“조수님이 돌아오게 되면 엄청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어제도 본 것 같아. 이상해.”

“그런가요? 저는 한참 전에 뵌 기분인데.”

“기억은 어디서부터 있어? 우리가 매주 병문안 갔던 건 기억나? 우리랑 같이 대욕장 갔던 건?”

대욕장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시우는 우뚝 굳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쌍둥이를 따라 대욕장까지 쫄레쫄레 따라갔던 기억이 있다.

워낙 인상적인 경험이어서인지 시우의 뇌리에도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이었다.

예를 들어 오딜이 시우의 자지를 꼼꼼하게 씻겨주려고 했던 일이라던가...

“어려진 이후부터 기억은 있는데. 쓰러진 뒤의 기억은 없어요. 매주 찾아와 주셨다니 감사하네요.”

“당연히 찾아와야지! 조수님이 누구 때문에 다친 건데.”

소파 위에서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하는 오딜.

조금 미안하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슬쩍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특별한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

조금 전까지 은근히 들뜬 기색이던 오딜은 시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마자 차분해졌다.

묘한 표정으로 무릎에 손을 얌전히 모은다.

괜히 했나 싶었던 시우가 손을 떼고 나서야 오딜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번만이야, 허락도 없이 머리를 쓰다듬게 해주는 건.”

“네, 알고 있어요.”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뭔가 그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인데 슬픈 기억들을 잠시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오딜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긍정적인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조수님, 눈은 안 나은 거야? 계속 안대를 차고 있는데.”

“아, 이건...”

시우는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그로서도 알 도리가 없지만 현재 그의 좌안은 마녀로 치면 ‘낙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주변의 마력을 흡수해 자기화하고 그의 자성마법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기존에 시우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1부터 100까지 일일히 계산했다면 이제는 50~70까지는 계산이 완료된 채 시작하는 느낌이다.

마법의 가장 기초적인 3요소가 연성, 변화, 전개라면 낙인이 자동적으로 연성과 전개부 일부를 담당한다.

시우는 변화 파트에서 변수만을 살짝씩 바꿔 대입해주면 자동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몇 개의 경로를 거칠지도 그때 결정해주면 그만이니 마법을 사용하는 속도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문제는 자성마법은 둘째치고 남성이 낙인을 지녔던 예가 역사상 전무후무하다는 것.

도서관의 과거 기록을 뒤져보다 보면 종종 자신만의 낙인을 만들어낸 마녀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남성’의 경우는 없었다.

그 말은 어지간한 마녀는 눈을 뒤집고 쫓아올 연구 거리라는 소리다.

“미안, 괜한 걸 물었네...”

“아니에요.”

오딜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먼저 사과했다.

아마 이 장애는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

“.........”

잠시 감도는 침묵을 먼저 찢은 것은 오딜 쪽이었다.

“조수님, 이제 올라가서 잘래? 늦기도 늦었고.”

소파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탈탈 터는 오딜.

그러나 먼저 일어나 올라가자고 한 주제에 시우의 곁에서 어물쩍거리는 것이 거동이 수상쩍다.

뭘 원하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시우.

“그럴까요?”

“아니다, 조수님 많이 피곤해?”

오딜은 갑자기 말을 뒤집었다.

솔직히 별로 피곤하지는 않다.

저녁부터 술기운에 쓰러져서 잠이 들어버린 탓인지 지금이 아침인 것처럼 정신이 쌩썡했다.

“아니요, 피곤한 건 아닌데....”

“그럼 나랑 밤산책 갈래?”

“밤산책이요?”

“이 시간에 타로타운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 궁금하기도 해서.”

산책이라.

괜히 지금 침대에 들어가봤자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실컷 뒤척일 게 뻔했다.

그럴 바에는 산뜻한 밤공기나 마시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래! 그럼 나 준비해올게!”

“아, 오데트 님은요?”

“오데트는 자고 있으니까 내비 두자고.”

언제 하품을 했냐는 듯 신나는 미소를 지은 오딜이 어디론가 뾰로로 달려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녀는 입고 있던 옷 위로 커다란 후드 망토를 뒤집어쓰고 양손에 맥주병을 들고 나타났다.

“짠! 조수님 깨어나면 이걸로 축배를 올리려고 한 박스 준비해 놨어.”

“이, 이건....”

시우는 차게 식혀진 맥주병을 들고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익숙한 갈색병, 시원시원한 폰트로 박힌 로고에, 뾰쪽뾰쪽 톱니가 있는 알루미늄 병뚜껑까지.

너무나도 익숙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KASS.

“조수님 고향에서 제일 유명한 맥주라고 해서 구했어. 마차에도 있으니까 나중에 마시고 싶어지면 말해.”

“오딜님....”

“너무 격한 감사 표현은 사양할게.”

아까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벅찬 감동이 온다.

이번에도 꽉 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슬금슬금 피하는 오딜.

그러면서도 씩 웃는 것이 준비한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이 기분 좋은 모양이다.

“정말 고마워요.”

“뭐 이 정도로.”

콧대가 높아진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오딜의 뒤를 따라 시우는 별장을 나섰다.

2.

시우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산책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활기로 가득했던 타로 타운도 밤이슬 아래에서는 고요히 숨을 죽인다.

가도 주변으로 늘어선 건물은 죄다 불이 꺼진 채 그림자만을 줄 지웠다.

어찌나 조용한지 오딜이 한번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 전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흐음~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야.”

오딜은 방방 거리는 걸음새로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휘적휘적 걸었다.

그 뒤를 느긋하게 쫓아가던 시우도 싸구려 맥주에 흥이 오르고 있었다.

흰고래 주점에서 파는 생맥주에 비하면 그야말로 오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끔찍한 맛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정겹다.

너무도 그리웠던 맛이다.

“조수님, 그게 정말 맛있어? 난 솔직히 별로라 필요하면 내 것도 줄게.”

무대 위에 선 가수처럼 달빛을 받으며 가도 위를 걷던 오딜은 성수를 마시듯 맥주의 맛을 음미하는 시우를 보더니 기묘한 것을 봤다는 듯이 웃음 지었다.

하긴 맥주를 마셔도 최상품 수제 맥주만을 마셨을 오딜에게 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공장 맥주는 입에 맞지 않을 것이다.

“네, 그리운 맛이라 좋네요. 여기에 치킨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인데.”

“치킨? 닭?”

“닭을 소금에 절인 다음에 튀김 옷을 입혀서 기름에 튀기는 건데요. 현세에선 국가 불문하고 많이 먹어요.”

“그런 게 또 있구나.”

워낙에 조용한지라 거의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나누는 오딜과 시우.

선선한 밤공기가 폐부를 채우고 실없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이 둘은 어느새 타로 타운의 분수 광장에 도착했다.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가판대도 없고, 호객 행위 중인 호객꾼들도 없다.

울퉁불퉁하게 깔린 도로를 밟으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말 발굽 소리와 수레바퀴 소리도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광장 한가운데에 선 커다란 분수대가 은빛의 천을 너훌너훌 휘날리며 고즈넉한 거리를 굽어볼 뿐이다.

“예쁘다.”

“네.”

둘은 분수대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물을 뿜어내는 분수를 바라보았다.

수면으로 튀기는 물소리는 뭔가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나 보다.

“더 가까이서 볼래? 물방울은 좀 튀겠지만.”

“좋죠.”

오딜은 시우의 손을 잡고 분수대 근처로 그를 이끌었다.

바닥에 깔린 동전들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거 알아? 분수대에 던져지는 행운의 동전은 시청에서 수거해서 분수대 관리비용으로 쓴다?”

“몰랐던 사실이네요.”

“어? 그런데 저거 금화 아니야?”

“금화요?”

시우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대충 금화 한 장의 가치는 한화로 80만 원 안팎이다.

사치품보다 생필품이 현저하게 저렴한 게헨나의 물가를 고려한 것인데 아무튼 금화 한 장은 꽤 큰 돈이다.

그걸 분수대에 던지는 미친놈이 있다고?

상인들이 많긴 하던데 일종의 게헨나식 액땜인가?

갖은 생각을 하며 분수대를 굽어보는 시우의 등을 톡 오딜이 밀었다.

애초에 금화를 보라고 했던 것 자체가 이것을 위한 것이었나보다.

“그악!”

“꺅!”

갑자기 중심을 잃은 시우는 엉겁결에 오딜의 망토를 잡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함께 분수 안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첨벙!

시원하게 퍼지는 물소리.

겨우 허리까지 오는 높이였던 만큼 허우적거릴 필요는 없었지만 인당수에 몸을 던지듯 화려하게 입수했으니 머리카락까지 홀딱 젖는 것은 당연했다.

딱히 화난다거나 하진 않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하니 냅다 분수대 안으로 밀어버릴 줄이야.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이게.”

“으으, 조수님! 순발력이 제법인걸? 거기서 동귀어진을 선택할 줄이야.”

“그냥 쫄려서 덥썩 잡은 거거든요?”

“아무튼 간에.”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다람쥐 꼴이 된 오딜은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강아지처럼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한다.

“그냥 예전부터 이 분수 볼 때마다 한번은 들어가 보고 싶었어. 지금처럼 사람 없을 때 말고는 들어갈 때가 없잖아.”

“제 의사는요?”

“하도 침울해 보이길래 같이 수영이라도 시켜주려고 했지.”

그런데 오딜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이 분수는 지하수를 직접 끌어다 사용하는 것이기에 물 온도가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날씨가 많이 따뜻해진 봄날이라지만 밤은 여전히 쌀쌀하다.

“근데 더럽게 춥네. 차갑고.”

“그렇죠? 힘 빼지 말고 올라가요. 제가 들어 드릴게요.”

사다리 같은 것도 없어서 오딜 혼자 올라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뭐, 분수대는 들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니 당연했지만.

“그 전에 잠깐만.”

솔선해서 발 받침대가 되려는 시우를 잠시 만류한 오딜이 허리까지 오는 수면을 가르며 시우에게 걸어왔다.

“조수님, 우리 계약 기억해?”

“계약이요?”

“응, 오르골을 넘겨주는 대가로 하기로 한 거.”

“아.”

불과 얼마 전 기억을 되새김질한 덕에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오딜이 불쑥 시우의 방에 찾아와 제안했던 일이다.

하나가 함께 영산에 갈 것.

하나가 오딜의 뒷구멍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것.

마지막 하나가 아마...

“조수님이 나한테 사랑을 알려주기로 했잖아.”

사랑.

불과 오늘 이런저런 일을 겪은 시우로선 듣기만 해도 밉살맞은 감정이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난 필요 없어!’ 같은 생각을 속으로 외치며 평생 모쏠로 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문드문 들 정도로 말이다.

오딜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그녀의 큼직한 눈망울과 영롱하게 빛나는 자색의 눈동자 뺨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카락까지 훤히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조수님이 쓰러지고 나서 나도 이것저것 책을 좀 읽었는데 사랑에 빠진 남녀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짓을 하더라고. 그걸 따라하면 좀 알게 될까 해서.”

“얼빠진 짓이요?”

“응, 예를 들어 이런 거.”

서서히 다가온 오딜이 시우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입술을 겹쳤다.

솔직히 그녀와 입술을 맞대기 전까지만 해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 정도로 감정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오딜의 까슬한 혀가 시우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무엇인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편하게 기대도 좋을 상냥함으로 끌리듯이 시우는 오딜의 허리를 꽉 안고 진하게 혀를 섞었다.

“푸하!”

키스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시우의 적극적인 호응에 오딜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금방 입을 떼버렸으니 말이다.

한참 동안 떨리는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던 오딜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새겨진다.

이윽고 수줍게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었다.

그 모습에서 겹치듯 떠오르는 사람이 아멜리아인 것은 오딜에게 크나큰 실례가 아닐까?

시우가 속으로 죄악감을 느끼는 것도 모른 체 오딜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분수대에 빠져서 홀딱 젖은 채로 키스하기. 엄청 멍청해 보이지 않아?”

오딜 위로 흐릿하게 덧씌워졌던 아멜리아의 환영이 떠났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것은 오딜이었다.

그제야 시우도 가까스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네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