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1.
“끄어어어....”
시우는 침대에 내려놓자마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가 뒤척일 때마다 지독하게 풍기는 술 냄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을 한가득 채웠다.
“으으.”
“창문 좀 열어야겠다.”
“그래야겠어.”
이대로라면 오크통에서 잠수하는 기분이 될 것 같아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오딜과 오데트.
“조수님 일어나.”
“으으으으...”
“일어나세요 조수님!”
“으으으으으....!”
이후에도 몇 번이고 시우를 흔들어 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괴이한 신음과 함께.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이기나 할 뿐이다.
쌍둥이는 시우를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좋아, 이제 어떻게 할지 정하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몸이 되돌아온 걸 기념해서 한 잔 거하게 걸치신 거 아니야?”
“그럼 부교수님은?”
“흐음....”
쌍둥이는 ‘조수님이 어째서 타로 타운의 전초기지 1층에 고주망태가 된 채 뻗어있는가’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나누었다.
하지만 모든 전말을 알고 있는 시우가 입을 떡 벌리고 자고 있는 이상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일단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하나는 이대로 두고 가는 거?”
“응,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조수님이랑 같이 있는 거.”
“하지만... 외박은 절대 허락받지 못할걸?”
애초에 타로타운을 가는 것도 몰래몰래 하는 쌍둥이다.
아무리 휴일이라지만 외박을 하겠다는 말이 나오면 엄격한 갈리나 시녀장은 물론이고 온화한 스승님까지 화를 내실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허락받지 않고 해야지. 물론 걱정하실 테니까 비둘기는 보내두자.”
“통보만 한다고....?”
오딜의 대담한 일탈 제안에 화들짝 놀란 오데트.
가끔씩 나오는 언니의 파격적인 발상은 새가슴인 오데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곤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어, 언니. 그냥 집에 갔다가 밤에 몰래 나오면 안 될까? 나 혼나기 싫단 말이야.”
“나는 여기에 조수님이랑 같이 있을 거야.”
“그럼 나 혼자라도 그렇게 할래...”
“그것도 안 돼!”
오데트 혼자서 귀가한다면 갈리나는 분명 오딜의 행방을 물을 것이고 꾸중을 들은 오데트는 모든 사실을 술술 불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간 잘못하면 조수님과의 밀회도 영영 안녕이다.
“왜 굳이 계속 있어야 하는 건데....”
“오데트, 너 이렇게 술에 취했는데도 우리를 찾아오신 조수님의 진의를 모르겠어? 그만큼 우리가 그리웠단 거잖아!”
“그, 그런가....?”
“그런 조수님이 눈을 떴을 때 옆에 아무도 없다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
“그런가....?”
“나는 그런 잔혹한 행동 못 해. 차라리 나중에 조금 혼이 나더라도 조수님의 옆에 있어 주고 싶어!”
“그렇네....”
오데트를 설득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새 첫 번째 선택지인 ‘이대로 두고 간다’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오데트가 툴툴거리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언니를 아주 잘 따르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전서구는 내가 날릴게.”
“으으... 무서운데....”
“오데트, 우리 오늘 휴일을 너무 의미 없이 보냈잖아. 조수님 덕에 지금부터 의미가 있어지는 거야! 좋게 생각하자.”
“응, 알겠어 언니.”
옥상으로 가서 제머나이 백작가로 비둘기를 날리려는 오딜.
시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오데트가 오딜을 불러세웠다.
“언니, 언니. 잠깐 와 봐.”
“왜? 이야기 끝난 거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 조수님... 좀 바뀌지 않았어?”
“뭐가?”
뻗어있는 시우를 찬찬히 살피던 오딜도 뭔가 알아챘다.
“그치? 이상하지?”
“그러게?”
뭐랄까. 우선 전의 조수님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이제 이십 대 초반의 용모라고 해야 하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좀 더 잘생겨지지 않았나?”
“나도 그 생각했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진 채 이상한 표정으로 자고 있어서 몰랐는데.
지금의 시우는 확실히 예전 모습과 달랐다.
우선 군데군데 있던 여드름 흉터도 모두 없어져서 마치 신생아 같은 피부이다.
원래도 잘생겼던 시우긴 했지만 군데군데 균형이 맞지 않았던 골격까지 싹 수정된 듯했다.
물론 아주아주 자세히 보아야 눈치챌 정도로 미미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 더 잘생기셨었나?”
“모르겠네. 일단 언니는 다녀와.”
“응, 알겠어.”
2.
어느새 고요해진 방안.
침대에 누워있던 시우는 쪼개질 듯한 이마를 잡고 눈을 떴다.
“뒤지...겠다....”
눈을 뜨고 살짝만 움직였을 뿐인데 저절로 죽는 소리가 나온다.
솔직히 에아에게 뇌를 꿰뚫릴 때가 덜 아팠던 것 같다.
목구멍이 쩍쩍 갈라진 것처럼 메마른 가운데 머리에서는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야....”
흰고래 주점에서 두 병째 위스키를 시키고 코르크 마개를 연 것까지만 기억난다.
그 이후로는 뭘 어떻게 했는지 필름이 싹뚝 잘려나가 있었다.
시우는 눈을 찡그린 채 어둑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천개가 드리워진 침대와 익숙한 방 구조를 보아하니 아마 타로 타운에 있는 쌍둥이의 별장 같았다.
일단 일어나려는데 양팔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왼쪽의 오딜.
오른쪽의 오데트.
“.....코오....”
“.....흠냐....”
잠옷 차림의 쌍둥이가 각각 시우의 한쪽 팔을 베개 삼아 몸을 웅크려 자고 있었다.
사실 잠옷이라기보다는 헐렁한 이너 원피스에 드로워즈라는 속옷 차림이다.
쌍둥이가 항상 옷 안에 받쳐입고 다니는 속옷 말이다.
“어?”
혹시 존나 큰 실수 같은 거 했나?
살짝 식겁한 시우는 조금만 움직여도 아픈 머리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쌍둥이의 옷차림은 아주 정갈했다.
기껏해야 잠결에 조금 흐트러진 정도라 안심했다.
인사불성이 되어 기억도 없는 채로 쌍둥이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같은 일은 없었나보다.
“후우....”
놀라서인지 조금 말똥해진 정신.
뒤늦게 따끔따끔 심장이 따가워진다.
아멜리아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억지로 무시한 채 쌍둥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팔을 빼냈다.
우선 물을 좀 마셔야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당장 뒤질 것 같거든.
시우는 어기적어기적 문을 열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갑작스레 진동이 가해졌기 때문인지 속이 뒤집힌다.
“욱....우웩....웩....!”
시우는 난간을 붙잡고 구역질을 했다..
여기서 토하면 안되는데! 라고 다급하게 생각할 틈도 없었다.
식도를 활짝 연 채 다 토한 것 같았는데...
“어....?”
좆됐다, 라고 생각했다.
정작 발밑에는 침 몇 방울과 신물만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이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몇 시간 만에 소화가 끝났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쓰읍.”
시우는 입가에 대롱대롱 늘어진 침을 대충 닦았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머리는 한 차례 물이 끼얹어져 아릿한 연기가 피어나는 잿불 같았지만 한밤의 공기는 살깣에 차게 달라붙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새로 주방에 도착한 시우는 레몬 세 조각이 들어있는 물병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알코올의 묵은내와 함께 속이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느낌.
턱밑으로 물이 줄줄 새서 옷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고 절반에 가까운 양을 단번에 들이마셨다.
“크흐.... 이제야 살겠네.”
멍해진 머리로 물병을 든 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엇부터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심장이 꾹꾹 조여와서 피가 통하지 않는 듯한 감각만이 시우와 함께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되는 거야.
“어.....”
주르륵 눈에서 무언가 흘렀다.
뭐가 슬픈지 모르겠는데, 왜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그저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코가 시큰거리지도, 눈이 따갑지고, 목이 잠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마음이 망가진 것 같았다.
“조수님?”
물병을 내려놓고 돌아가려던 때.
뒤에서 비몽사몽 잠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눈을 비비적거리며 하품을 참는 오딜이 보였다.
“어디 간줄 알고 놀랐잖아. 하아암...”
결국 하품을 한 오딜이 입을 틀어막는 통에 이너 원피스가 슬쩍 올라가면서 배꼽에 슬쩍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오딜 님...”
“보아하니 기억은 다 돌아온 거야?”
“....네.”
쌍둥이가 시우를 반가워했던 것에 비해 그는 별다른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기에 조금 서운하긴 하다.
근데 어쩌겠어.
술이 아직 안 깬 거일 수도 있고, 졸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오딜은 거실 창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서 있었고, 시우는 어두컴컴한 식당의 안쪽에 서 있었기에 오딜은 아직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물 줘. 목마르네.”
슬리퍼를 찍찍 끌며 다가온 오딜은 시우에게 팔을 내밀었다가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댕그랗게 변한 눈으로 시우를 올려보는 오딜.
“어... 뭐, 뭐야? 어디 아파?”
시우는 소매로 눈을 쓱쓱 닦았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굳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괜찮은 거 맞아?”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건가요? 뭔가 실례되는 짓은 안 했어요?”
의도적으로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시우.
오딜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갑자기 남의 별장에 들어와서 요상한 자세로 누워있긴 했지만 그 외엔 딱히?”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뭐 있어? 그새 잊은 거야? 조수님은 우리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준 은인이라고. 별장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은 이상 신경 안 써. 아니, 불질러도 한 번은 용서할게.”
엄청 풀 죽어 보이는 시우를 위로하기 위해 오딜은 최대한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며 시우의 팔을 툭툭 쳤다.
“안해요, 그런 짓.”
시우는 힘없이 피식 웃는다.
오딜의 익살덕인지 그래도 혼자서 멍하니 서 있었을 때보다는 훨씬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아무튼, 물 줄래?”
“네.”
시우는 선반 옆에 놓여있던 컵에 물을 따라 오딜에게 건넸다.
오딜은 물잔을 받아 들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시원해.”
사실 영체는 굳이 물을 마실 필요가 없지만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시우를 쿠션삼아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목이 칼칼했다.
오딜은 잔을 내려놓고는 아직까지 정신이 콩밭에 가 있는 듯한 시우에게 말한다.
“그, 조수님.”
시우는 오딜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앞에 있어도 반쯤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이제야 그녀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예?”
어둑한 달빛에 비스듬히 선 오딜은 드레스 자락을 꾹 쥐고 괜스레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망설이던 그녀가 입술을 달싹인다.
“굳이 캐묻지는 않을 건데. 힘든 일 있으면 말해도 돼.”
힐끗 시우를 보았다가 다시 눈을 돌리고 말을 잇는다.
“난 조수님 편인걸.”
그 다정한 말을 듣는 순간 간신히 몸을 지탱하던 막대기가 쓰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의 마개가 빠져나간 것 같다.
콸콸 정신없이 무엇인가 흘러내렸다.
시우는 저도 모르게 눈앞의 오딜을 와락 끌어안았다.
작고 부드러운 몸이 시우의 양팔에 단단히 고정된다.
“으겍!”
어찌나 기세가 강했는지 찌부러지는 소리를 내는 오딜.
“조, 조수님...!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달려든 시우에게 깜짝 놀랐던 오딜이지만 이내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맞닿은 곳으로부터 온기가 느껴지자마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이 뚜렷하게 색칠된 것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누구에게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딜의 어깨가 눈물로 축축해졌다.
들썩이는 시우의 머리를 오딜은 천천히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 어디 안 갈 거야.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조수님.”
그의 등을 토닥이며 머리를 안아주던 오딜.
괜히 코와 눈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시우가 진정할 때까지 한참이나 그를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