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1.
몇 번이고 그를 붙잡으려 드는 아멜리아를 뿌리친 시우는 오두막에 들어오자마자 짐을 챙겨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마차로도 꽤 시간이 걸렸던 거리지만 머릿속에 있는 좌표이동식을 사용하니 1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어 보인다.
아멜리아의 저택의 발을 들였을 때 시우가 느낀 감정이었다.
노예 겸 조수 생활을 했던 시우가 보는 저택과 어린 시절을 아멜리아와 함께 보낸 저택.
같은 장소임에도 너무 다르게 보였다.
머릿속이 흙탕물처럼 변한 기분이다.
“.........”
시우는 아무 말도 없이 방 안에 남은 짐을 챙겼다.
에아와 싸울 때 마력수도 죄다 써버렸고, 챙길 것이래야 아멜리아가 맞춰주었던 양복, 오르골 그리고 쌍둥이가 이별 선물로 준비한 자질구레한 물건 정도였다.
침대 시트 위에 갖은 물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넣고 보따리 싸듯이 감싼다.
떠나는 시우를 붙잡지 못하고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아멜리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우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발! 왜 이렇게 안 묶여.”
보따리의 매듭을 꽉 졸라맸던 시우는 마음처럼 되지 않자 욕설을 내뱉었다.
가슴이 먹먹하다.
모든 잘못은 아멜리아의 것인데 왜 이런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펄펄 날뛰며 화라도 낼 걸 그랬나.
뺨이라도 한 대치고 올 걸 그랬나.
담담하게 생각하려 해봐도 좀처럼 마음의 부글거림이 가시질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아멜리아가 쫓아오기 전에 저택을 벗어나는 것이다.
바라만 봐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만큼 더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얼추 짐을 챙긴 시우는 안대를 벗고 정신을 집중했다.
“피어라.”
그의 좌표이동식은 그가 그간 연구하던 차원이동식에서 파생한 것으로 이미 에아 사달멜리크와 격돌할 때 이미 완성되었다.
더군다나 그때와는 달리 외부의 마력보충도 필요 없다.
영창과 동시의 안대에 가려져 있던 시우의 좌안이 빛나며 주변의 마력을 맹렬한 기세로 빨아들였다.
마력의 흐름이 보이는 그에겐 형형색색의 실들이 나선형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물론 이렇게 열심히 끌어들인다고 해도 대기 중에 부유하는 마력은 아주 형편없는 정도의 양이다.
그러나 시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족한 마력은 증폭시키면 그만이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몸에 익혔던 것처럼, 마치 그노시스의 알을 통해 처음으로 그림자를 다루게 되었던 것처럼.
기억을 되찾은 시우는 자연스럽게 ‘거듭증폭’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런 것 분명 배운 적도, 누군가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세 번에 걸쳐 증폭된 마력은 그가 공간이동을 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그렇게 집결 및 증폭시킨 마력이 마치 낙인에 담기듯이 좌안에 차곡차곡 포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정신을 가다듬음과 동시에 시우의 심상에 복잡한 그물망이 생겨났다.
이 그물은 공간의 좌표를 형상화해낸 것이다.
그가 한 번이라도 발을 들였던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뻗어있었다.
아카데미 내부의 대부분 장소는 물론, 저 멀리 굴피나무 숲, 타로 타운, 보더 타운, 아르스 마그나 타운까지 말이다.
그 가닥을 조심스레 더듬어가던 시우는 한 곳의 좌표를 특정했다.
이 복잡한 마음을 풀 장소가 필요했다.
먼저 좌표를 특정했으면 그에 걸맞은 식을 계산해야 한다.
좌표까지의 거리는 물론, 이동하려는 물체의 체중, 부피와 형태까지.
이미 한번 해봤던 것이어서인지 계산이 한결 수월했다.
시우의 발밑에 떠오르는 찬연한 금빛의 원.
솟아오른 금빛의 마력이 그의 몸을 감싸고.
시우는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2.
아무리 마녀의 도시더라도 남자가 마법을 쓰는 광경은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따라서 시우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타로타운의 어둑한 골목으로 이동했다.
둥글게 떠오른 금빛의 마법진 위에 나타난 시우는 보따리를 짊어진 채 주점으로 향했다.
흰고래 주점.
당장 술집 하니 생각나는 곳이 이곳이었다.
“아, 오늘 휴일이구나.”
어쩐지 거리부터 북적이더니 주점에 가까이간 시우는 곧장 오늘이 휴일임을 알아차렸다.
아직 대낮인데도 술집에 사람이 가득 차서 소음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흥청망청 각자의 방식대로 술을 즐기는 술꾼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창가 쪽에 자리가 하나 나 있었기에 짐을 내려놓고 분주히 움직이는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주문 좀 할게요.”
“예! 어서오십시오!”
머리에 두건을 쓰고 땀을 뻘뻘 흘리던 주인장은 행주로 닦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접객용 미소를 띠었다.
머릿속의 번뇌와 혼란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제일 독한 술로 한 병 주세요.”
“예?”
“안주는 제일 비싼 거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주시고요.”
웃음을 짓고 있던 주인의 눈이 미묘하게 변한다.
아멜리아가 직접 지어준 옷을 입고 있는 시우는 깔끔하긴 해도 썩 근사한 옷차림이 아니었다.
게다가 게헨나에서 동양인은 죄다 현세에서 잡혀 온 노예이다.
시답잖은 말씨름을 할 기운도 없었기에 시우는 품에서 금화 두 장을 내려놓았다.
“최고의 요리로 보답하겠습니다.”
“술 먼저 주세요.”
“네!”
금화를 바라본 주인장은 금방 함박웃음을 지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기야 가게 주인으로선 노예가 이런 큰돈을 들고 다니건 말건 무슨 상관일까?
시우는 자리에 털썩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푸근한 인상의 주인장이 커다란 병을 들고 왔다.
시우가 보는 앞에서 손수 코르크 마개를 개봉해주더니 얼음 바스켓에서 얼음을 꺼내 온더락 잔에 담았다.
옆에는 종이에 감싸여진 초콜릿을 내어주었다.
“저희 양조장의 위스키입니다. 맥주를 만든 것과 같은 보리를 사용하니 마음에 드실 겁니다. 허허. 그럼 금방 요리도 내오겠습니다.”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는 주인장.
돈만 많이 주면 노예라도 왕대접을 해주는 것이 꼭 현세의 사람 같았다.
근데 솔직히 그 이상의 감상은 안 든다.
살짝 머리가 마비된 것 같았고, 이 이상으로 마비시키고 싶었다.
시우는 골골골 술잔에 술을 채워놓고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빨리 취하고 싶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아무것도 떠올리기 싫다.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를 받은 기러기 아빠처럼 술을 마시는 시우.
주인장이 첫번쨰 안주를 나를 때쯤 시우는 벌써 위스키 한 병을 동내고 있었다.
기겁한 주인장이 말한다.
“아이고 젊은 양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술 그렇게 마시다간 죽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여유는 없었다.
벌써 취기가 돌아있는 시우는 주섬주섬 품에서 금화 하나를 더 꺼내서 가게 주인의 손에 올려주었다.
“한 병 더 주세요.”
만취해 눈이 풀린 시우를 보며 주인은 혀를 끌끌 찼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알 법하다는 눈치였다.
보통 젊은 사람이 대낮부터 독한 술을 들이켜며 돈을 뿌리는 경우는 딱 두 개.
아리따운 여자와 동석했거나, 실연했거나이니.
가게 주인은 새로운 위스키를 가져다주었다.
대금도 차고 넘을 만큼 받았겠다, 술집에서 손님이 제 돈 내고 술 마시겠다는데 안 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젊은 양반, 적당히 마시고 토하고 싶으면 저 얼음통에다 하쇼. 괜히 다른 손님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예, 예... 알겠습니다.”
시우는 대충 손을 휘적이고 새로운 위스키를 얼음 잔에 채웠다.
뜨거운 알콜이 목구멍으로 꿀렁꿀렁 넘어갈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머리는 몽롱해져 간다.
복잡한 생각들도 잊히고 쓸데없는 잡념들도 알코올의 파도 속으로 가라앉는다.
“시발... 시발.... 시발년....”
시우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끝끝내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3.
“언니 나 심심해.”
타로 타운의 별장.
오딜의 표현을 빌리자면 궁금한 것들을 알아가기 위한 쌍둥이의 전초기지에서 나른한 휴일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던 중 오데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오딜도 오데트도 침대의 한구석을 차지한 채 대자로 누워있다.
갈리나 시녀장이 보았더라면 당장 체통 없는 몸가짐은 그만두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흐느적거리는 자세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심심한데.
“휴일이라 나오기는 나왔는데. 진짜 할 게 없네.”
“조수님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
휴일날이라 의무적으로 전초기지까지 오기는 했는데 정말정말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예전에는 둘이서 타로타운을 거닐기만 해도 재밌었다.
분수대에서 피리를 부는 남자의 공연을 두 시간 세 시간 동안 지켜보기도 하고, 그냥 의미 없이 타로 타운의 모든 가도를 밟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구석구석 쏘다닌 적도 있다.
시장에 들러서 산 빨간 사과를 손에 들고 우적우적 씹으며 길거리 공연을 보는 것도, 하다못해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는데...
겨우 시우가 없다는 것만으로 뭔가 동력 자체가 바닥난 기분이다.
침대 위에 누운 오데트는 쭉 뻗은 발을 손뼉 치듯 탁탁 부딪히며 물었다.
“조수님은 언제쯤 돌아오실까?”
“나도 모르지... 부교수님이랑 요양 중이라는데.”
“아무리 부교수님이라지만 월권행위야! 나에게도 귀여운 조수님이랑 놀 권리가 있다고!”
“맞아, 그건 그래.”
듣고 보니 그렇다는 듯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오딜.
“그때 조수님은 참 귀여웠지.”
“볼살을 쪽쪽 빨고 싶을 정도였어.”
“같이 대욕장에 갔을 때도 참 재밌었는데....”
그리 멀지 않았던 옛 기억으로 속닥속닥 거리다 힐끗 시계를 보니 벌써 7시를 넘어가고 있다.
아주 잠깐 타로타운을 산책한 이후 침대 위에 누워있던 것뿐이지만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
오딜은 휙 상체를 일으켜 오데트의 허벅지를 툭툭 두들겼다.
“영차! 일어나 오데트. 가야지.”
“진짜, 너무 싫다...”
모처럼 금싸라기 같은 휴일이 허비되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오딜은 어깨가 축 늘어진 오데트를 다독여주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드레스에 주름이 지지 않았는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한 쌍둥이는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층계참까지 도착했을 때 갑자기 멈춰선 오데트.
오딜을 슬쩍 성질을 내며 오데트의 등을 밀었다.
“꾸물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가 오데트.”
“어...언니...”
“왜?”
“저거 안보여?”
바들바들 떠는 목소리로 오데트가 가리킨 곳은 불이 캄캄하게 꺼진 1층 거실.
거기에 누군가 있었다.
소파에 드러누운 채였는데 굉장히 기형적인 자세로 팔다리가 이리저리 꼬여있다.
그 덕에 깜짝 놀란 오딜이 숨을 집어삼킨다.
“힉!”
“언니도 보이지? 맞지? 귀신 아니지?”
“놔, 놔봐! 너무 달라붙지 마!”
오데트는 오딜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오들오들 떨었다.
“여기서 기다려, 오데트. 귀신같은 게 어딨다고 그래.”
“그....그치만... 나 1층에서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단 말야...”
오데트의 입장에서는 문 열리는 소리도 없이 찾아와 저런 자세로 누워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인간이라고 여기기 힘들었다.
잠깐 긴장하던 오딜이 손을 한번 휘젓자 거실의 장식불이 모두 환하게 켜졌다.
“누구야! 정체를 밝혀!”
오딜은 마력을 끌어모은 채 신중한 걸음으로 소파로 향했다.
여차하면 공격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오딜은 이내 마력을 쏙 집어넣었다.
“엥?”
“쿠우우우.... 쿠우....”
거기에는 요가의 달인처럼 몸을 비틀고 자는 중인 시우가 있었다.
게다가 어린 모습이 아니라 성인이 된 시우의 모습 그대로.
“조수님?”
“조수님? 조수님이야?”
계단에서 얼어붙은 듯이 서 있던 오데트의 표정이 환하게 펴지더니 오도도 거실로 달려왔다.
시우는 아멜리아 부교수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 요양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만나니 굉장히 반갑다.
“조수님!”
시우에게 달려가던 오데트는 오딜과 같은 장소에 우뚝 멈췄다.
엄청난 냄새가 풀풀 풍겨왔기 때문이다.
“조수님 술독에서 헤엄치고 오셨나?”
“그런 것 같은데?”
다름 아닌 알코올 냄새였다.
그가 푸후푸후 숨을 쉴 때마다 쌍둥이까지 취할 지경이다.
“조수님 일어나 봐.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조수님! 조수님!”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몸을 흔들어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고 숙면 중인 시우.
오딜과 오데트는 고민에 잠겼다.
“어떡하지?”
“여기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잖아. 침대로 옮겨드리자.”
“그건 그런데.... 이대로 돌아갈 거야?”
쌍둥이는 집에 갈 시간이다.
그러나 눈앞에는 한 달 만에 보는 조수님이 있다.
그냥 귀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었다.
“흐음... 어쩌지....”
“우선 침대로 옮겨놓고 생각해보자.”
“응, 언니.”
오딜은 염동을 이용해 술로 떡이 된 시우를 두둥실 띄워 침실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