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1.
오두막을 벗어나 굴피나무 숲을 벗어나 동쪽으로 난 들판 길.
그 길을 30분 정도 따라 걷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온다.
숨 하나 가빠지지 않고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언덕에는 늦겨울을 이겨내고 뻗은 새파란 야생 보리들의 군총으로 빽빽하게 덮여 있다.
인간의 손에 길들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대로 이리저리 뻗은 보리는 생명력 넘치는 옥빛의 잎을 자랑하며 바람에 맞춰 이리저리 고개를 틀었다.
언덕 한가운데 심겨 있는 이름 모를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아멜리아와 시우는 각각 이젤을 펼쳤다.
산들바람에 종이가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이젤 뒤에 나무판을 고정한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조용히 선을 그으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오두막 근처에는 풍경화의 소재가 될만한 장소가 많았지만 아멜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이 보리 언덕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즐거운 시우와의 소풍임에도 아멜리아는 자꾸만 연필을 놓았다 잡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오늘따라 유달리 말이 없는 시우가 멍한 표정으로 도화지를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시우.”
“.........”
“시우.”
“...네, 아멜리아 님.”
아멜리아가 불러도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건성건성 흔들고 있는 연필 끝도 하얀 종이 위에 무의미한 선을 찍찍 긋고 있을 뿐이다.
아멜리아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충분히 그의 상태와 지금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배고픈가요? 하긴 아침을 안 먹고 왔죠.”
“괜찮습니다.”
그러나 입에 담아버리는 순간.
그에게 말하는 순간, 아무런 여지도 없이 달콤한 꿈이 조각조각 부서질 것 같다는 불안함에 억지로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시우가 좋아하는 연어도 잔뜩 넣었어요.”
“정말 괜찮습니다. 입맛이 없어서요.”
아멜리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초조함과 불안함의 합주는 불편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박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최대한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그러니까 오두막에 함께 살면서 시우에게 하던 말투 그대로 다시 말을 걸었다.
“시우, 전에도 알려줬잖아요. 연필을 잡을 때는 손끝으로....앗!”
시우의 손등 위를 쥐어 연필 잡는 법을 고정해주려던 아멜리아의 팔이 매섭게 내팽개쳐진다.
시우의 거센 저항에 튕겨 나간 아멜리아는 멀뚱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가, 갑자기 손잡아서 화났죠? 어제 일 때문에 그런...거죠?”
아멜리아를 바라보지도 않고 연필을 쥐던 시우의 손이 미미하게 떨린다.
그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이런저런 대화거리를 늘어놓았다.
“시우가 기분 나쁠 법해요. 저도 너무 경솔했다고 생각 중이에요... 반성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그러니까 화풀어요...”
“.........”
“아니면 정말 몸이 불편한 곳이 있는 건 아니죠? 돌아가서 같이 쉴까요?”
이렇게 하면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것처럼.
그녀가 그토록 미루고 싶어하던 파국의 날이 돌아오지 않게 될 것처럼.
눈을 꾹 감고 모른 척 한다.
시우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아멜리아를 향했다.
아멜리아는 그 눈빛이 과냉각된 물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했다.
지금은 차분하게 찰랑거리지만 약간의 충격을 가하는 순간 눈꽃처럼 얼어붙으리라는 상상을.
아멜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꾹 울음을 참고 말을 잇는다.
애달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같이 차를 마셔요. 밀크티에 스콘이, 좋겠죠? 엊그제 타로타운에서 버터도 사두었어요.”
물거품처럼 사라질 헛된 희망을.
“그다음에는 저녁까지 책을 읽어요... 시우가 좋아하는 마법공부도 같이해요.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같이 별을 보는 건 어떨까요? 지붕 위에 누워서 보는 거... 시우도 좋아했잖아요.”
아마도 오지 않을 행복한 오늘을 입에 담는다.
“오랜만에 잠도 같이 자요. 이제 시우도 훌쩍 자랐으니 침대가 조금 좁긴 하겠지만 제가 옆으로 비켜 잘게요. 그다음엔, 그다음엔....”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다음엔 무엇이 있을까.
방울방울.
아멜리아의 눈가를 엉망으로 만들며 흐르기 시작한 눈물에도 시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알아요.... 이미 알아요....”
아멜리아가 조금만 당황하는 시늉을 하면 걱정스레 달려오던 시우는 이제 없다.
눈물을 흘리면 다정하게 위로해주던 시우도 이제 없다.
“돌아, 왔군요.... 완전히.”
“네, 아멜리아 메리골드 부교수님.”
지독히도 이기적이던 봄날의 꿈도 끝났다.
2.
아멜리아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우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소중했던 아멜리아가 자신의 냉정한 행동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체가 숨이 막힌다.
당장이라도 몸을 낮추고 그녀를 껴안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작은 몸을 품에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멜리아도 그렇게 해 주었으니까.
아멜리아도 어린 시우의 응석을 받아주었고, 아름답고 소박한 행복을 보여주었고, 언제나 시우를 미소짓게 만들고, 가슴 떨게 만들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엉망진창으로 얽힌 기억 속에서 아멜리아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비웃고 있었고.
진흙탕처럼 혼탁하게 뒤섞인 감정 속에서 시우는.
사랑하고 있었고.
증오하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윽...우욱...흑.....”
아멜리아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번번이 눈물과 울음에 파묻혀 휩쓸려나 갔다.
시우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그러나 담배는 없었다.
시우는 신경질적으로 옷깃을 털었다.
후련한 척 억지로 높인 목소리로 고백한다.
“부교수님 말대로예요. 기억이 다 돌아왔네요. 새벽에 일어났더니 모조리, 모조리 다 생각났어요.”
시우는 아멜리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멜리아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비틀비틀 일어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진짜 싫어하고 미워하던 사람이 되는 기분 알아요?”
차라리.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아멜리아가 잘해주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녀가 계속 미운 아멜리아였더라면.
차라리.
그녀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맹렬한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멜리아를 채근하며 괴로운 듯 찡그린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이 없었더라면.
이보다 조금은 그녀를 덜 미워했을 것이다.
“고민했어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까? 이대로 예전 일을 모두 잊을 수는 없을까? 아니면 이 지랄맞은 기분, 토 나올 것 같은 혼란, 배신감을... 진짜 어떻게 해야 되돌려 줄 수 있을까? 내가 느낀 기분을 백배 천배로 갚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아멜리아의 의도를 알 수 없다.
기억을 잃고 어린아이가 된 시우에게 왜 갑자기 잘해주었던 것인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 것인지도 조금도 종잡을 수 없었다.
되갚아주고 싶었다.
치가 떨리는 이 배신감을,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이 실은 이 도시에서 가장 미워했던 사람으로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이 상실감을.
그로 인해 허공에 내던져지는 느낌을 그녀가 나눠 받길 원했다.
“근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어요.”
그러나 할 수 없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새파란 냉기가 흐르던 시우의 오른눈에 핏발이 선다.
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아멜리아를 붙잡고 말했다.
“그러니까, 절 납득시켜요. 왜, 왜, 왜. 하필이면 그 엿 같은 짓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 나였던 건지. 왜 뒤늦게 잘해주는 척 사람을, 사람 기분을 그냥 개좆대로 휘저어놓고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워야 하는 건지 이유를 말해요.”
“시우.....”
“이거 놔!”
애처롭게 뻗어진 아멜리아의 손이 시우의 팔에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통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닌 시우가 이런 매서운 눈빛과 절절한 원망, 그리고 혐오를 쏟아낸다는 것이 두려워서 아멜리아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내가 아직도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것 같아?”
“시우, 시우... 다, 다 설명할게요... 화내지 말아요...”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어찌 이리 가증스럽게 보이는 걸까?
예전 그녀는 이렇지 않았다.
언제나 차가운 얼굴로, 냉엄한 시선으로 시우를 바라보았고 일말의 자비도 없이 모진 일을 떠넘겼다.
모든 것이 가식으로만 여겨졌다.
진실이 어쨌든, 설령 그녀가 유용한 조수를 잃어버릴 뻔했던 경험에 의해 변한 것이라고 해도.
시우는 이해할 수 없다.
도저히 머릿속에서 두 이미지가 융화되지 않았다.
노예는 마녀에게 기어오르면 안된다.
22위계의 아멜리아에게 하대하며 감정적으로 싸움을 거는 것 자체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우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가 느끼는 분노와 배신감에 비하면 목숨의 무거움은 한 올의 깃털만도 못한 것이었다.
아멜리아는 비틀비틀 걸어와 시우에게 안겼다.
일말의 호응도 없이 굳게 닫혀있는 팔꿈치를 억지로 파고들어 그의 몸통을 억지로 끌어안는다.
“미안해요... 시우 제가 잘못했어요... 지금까지 괴롭힌 것도, 시우에게 분풀이 한것도, 잔업을 시킨 것도.... 5년 동안 축사에서 지내게 한 것도... 다 제 잘못이에요... 용서받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제발....”
흐느낌과 뒤섞여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아멜리아의 사과.
그럼에도 송곳처럼 정확히 귀를 파고든다.
그러나 시우의 마음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 속 그녀의 괴롭힘이 치기 어린 소행이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던 거구나라는 실감만이 절절히 느껴질 뿐.
“왜 그랬는지 말해요. 왜 날 괴롭혔는지만 말하면 돼요.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거니까.”
아멜리아는 시우를 보았다.
시우는 아멜리아를 보았다.
“시우를 사랑... 하니까요.”
아멜리아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지 못했던 말을 그에게 쏟아낸다.
“시우를 잃게 될뻔하고 나서야... 제 감정을, 인정할 수 있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시우는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대단치 못한 이유였기 때문이 아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얄팍한 사정 때문에.
어리게 변한 시우를 정성껏 돌보던 그녀의 모습마저 그녀의 욕심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뒤덮인다.
결국엔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심이었다.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제가 그렇게 밉다면.... 앞으로 저도 축사에서 살게요.. 시우 기분이 풀릴 때까지 종처럼 부려도 좋아요... 괴롭혀도 좋아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아멜리아 님.”
조금은 온건해진 시우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것이 얼마나 헛된 기대였는지를 깨닫는다.
“제가 기억을 되찾게 되어도... 용서해 줄 수 없냐고 물었죠?”
비겁하다.
기억을 되찾은 시우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품을지, 어떤 절망에 잠길지 일 분이라도 아니 일 초라도 생각해봤다면.
그녀는 그 말을 해서는 안 됐다.
결코.
그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만하죠 이제, 용서할게요.”
아멜리아는 그의 눈동자에서 읽었다.
짙은 체념과 환멸을.
“제발, 그러지, 말아줘요.”
그와 아멜리아를 연결하던 모든 끈이 가닥가닥 끊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뭐가요? 용서했으니까. 아멜리아 님의 바람대로 됐잖아요.”
아멜리아는 뒷걸음질 치다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예 증서도 파기했으니까. 저는 아멜리아 님의 전속 노예가 아니겠네요. 그래도 남작이시니 최대한 예우를 갖출게요.”
마지막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시우의 한 마디가 싹뚝 남아있던 모든 끈을 끊어내었다.
“아멜리아 님이 사랑하던 시우는 죽었어요. 아니, 애초에 있는 것도 아니었죠.”
아멜리아는 눈물을 쏟을 힘조차 사라진 것처럼 흐릿하게 변한 눈으로 그의 최종 선고를 기다렸다.
“아멜리아 님을 사랑하던 시우도 죽었어요. 이것도 마찬가지네요.”
씁쓸한 조소를 머금은 시우는 도화지를 접고 이젤을 챙겼다.
터벅터벅 멀어져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아멜리아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다.
“아 맞다.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시우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아멜리아가 희망을 품을 새도 없이 마지막 말이 떨어진다.
“당신은 정말 끔찍하게도 이기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