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21화 (121/917)

#121

1.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은 나의 업이다.

2.

시우는 눈을 떴다.

“뭐야.”

분명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을 텐데 정신을 차리자 서 있는 곳은 아인과 같이 어두컴컴한 공간 속.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미로처럼 늘어선 계단이 있었다.

계단 끝마다 형형색색의 문이 있었다.

자각몽 또는 루시드 드림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분명 처음 와보는 공간임에도 언젠가 들렀던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시우는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그러던 중 이변을 발견했다.

약 8할에 달하는 문은 열려있었지만 2할가량은 검은색 리본으로 칭칭 감겨있는 채이다.

“뭐지 이건?”

리본에 감싸인 문 하나를 골라잡고 손잡이를 돌리려던 시우.

그 순간 모든 리본이 일제히 풀려나기 시작한다.

연이어 익숙한 감각이 시우의 몸을 덮는다.

아멜리아가 준 물약을 먹었을 때나 느꼈던, 온갖 기억이 순식간에 되돌아오는 느낌.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어지럼증과 메스꺼움과 동시에 잠겨 있던 모든 문이 투박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당황할 사이도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영상과 소리.

관리인 조금 깔끔하게 작업할 수는 없나요? 설마 불만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죠? 배수구 도랑 쓸데없는 일은 좀 그만 좀 맡겨줬으면 좋겠다. 5년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일 텐데요. 앞으로 일주일간 오후 업무를 끝내고 제 연구동을 청소하도록 하세요. 마녀란 그런 것이에요. 만약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하는 것처럼 다음 배속지에서 행동했다간 당신은 죽을지도 몰라요. 협박까지 하는 것도 좆같네. 이게 좋아하는 거라고? 타카쇼 이 새끼는 진짜 정신 나간 새끼 맞지.

계단 위에 웅크려 머리를 쥐어 잡고 있던 시우의 좌안이 빛난다.

찬연한 빛무리 속에서 흩어진 퍼즐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많은 것들이 재결합된다.

관리인 고향이 그립나요? 예예 당연히 그립죠 이 좆같은 도시에서 노예 생활하는 것보다 박사님 노예생활 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허름한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잠을 자라는 거지? 시발 햄스터 키웠을 때도 이것보다는 좋은 집을 줬던 것 같은데. 마녀답게, 그리고 귀족답게 살아라. 그게 스승님이 제게 남기신 유언이었어요. 언제나 그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죠. 귀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타인의 구제에 의한 회복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나아간다.

아멜리아가 개 같은 년이긴 해도 잡혀가 죽을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지. 게다가 추방자의 약속을 믿고 밖으로 나가라고? 난 그건 못하겠다 솔직히. 관리인, 건강에는 문제가 없나요? 전염병이라던가, 피부병이라던가. 있다면 미리 말하세요. 하루 꼬박꼬박 샤워하는데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도 참 그렇네. 그나저나 양복도 맞춰주고 나름 출세하긴 했구먼. 아니 근데 아멜리아랑 같은 집에서 숙소에서 살아야 한다고? 이건 또 무슨 개지랄이냐.

거절했어요. 예? 당신은 유용한 조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고작 그딴 이유로 거절해? 내가 5년 동안 이 개 좆같은 곳을 탈출하려고 그렇게 그렇게 참아왔는데. 신시우, 당신은 제 소유에요. 저의 밑을 벗어나 멋대로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어요. 따라서 허가받지 않은 탈출 계획에 대해선 상응한 조처가 내려질 거에요. 상응한 조처? 멋대로 잡아 온 사람이 누구인데? 그렇게 잡혀 온 사람을 앙심을 품고 괴롭힌 사람은 너잖아 아멜리아. 진짜, 다 참고, 넘겨보려고 했는데 못 해 먹겠어요. 넌 진짜 나쁜 년이다. 나한테 바라는 게 도대체 뭐야? 말해 보라고 했잖아! 나한테 원하는 게 뭐길래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니까? 내가 5년 전에 그쪽 알량한 자존심에 상처 낸 건 미안한데, 이 지랄하면서 간 보고 괴롭힐 거면 차라리 죽여주면 안 될까? 대답해!

.....

아쉽게도 미리 약속은 되어있지 않아요. 그리고 관계는... 친구라고 해두죠. 아멜리아가 친구가 어딨어! 이년아. 예상대로 아주 악독한 년이야. 이대로라면 죽을 것 같은데. 쌍둥이도 얄짤없이 잡혀가서 노예 행인데. 그래도 그간 마법을 공부한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네. 피어라 피어라 피어라 피어라 피어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길 수 없는 벽이라는 건 존재하는 모양이야. 그래 그래, 예쁘다. 더 귀엽게 울어봐. 사람 눈을 마취도 안하고 파헤치는 게 어딨어 시발. 자아, 기다려봐. 잘자.

뇌가 뇌수 대신 사이다 속에 퐁당 담가진 듯한 감각.

진탕된 머릿속에서 단말마처럼 떠오르는 사념.

신시우, 자신을 제물로 바친 자, 분수의 경계를 넘으며 사달멜리크는 저물었다, 시우가 씌워줄래요?, 콜라 마시고 싶다, 행복한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아도 되는가, 게헨나의 달은 언제나 금빛으로 빛난다, 창조의 아름다움, 현묘한 원주의 값 파이여,  3.14159265355820.....5248973025...그 다음은 뭐였더라? 아.... 1526720393159734450 몇 자리까지 외웠을까, 마침내 도달한다, 첫 번째 999999, 파인만 포인트, 두 명의 남자가 속삭인다, 반쪽 눈을 뜨고, 기억을 돌이키며 나는 자유롭지 못했노라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0의 세계 속에서 금빛의 여명은 또다시 태동하며, 영원히 이 몸을 불태우소서.

.......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고마워요 돌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멜리아 님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까요? 시우가 누워있는 동안 노예 증서를 파기했어요. 같이 잘까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상하다. 정원에 돗자리를 펼게요. 같이 차 마셔요. 케이크도 가져오고요. 듣고 싶은 곡이 있나요? 시우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짐을 챙겨오겠어요? 정말 예뻐요. 시우는 손재주가 좋네요. 이상하다. 시우! 너무 깊은 곳으로 가면 안 돼요. 월척이네요. 오늘은 이걸로 저녁을 먹어요. 이렇게 발로 꾹꾹 밟아서 거품을 내는 거예요. 쉽죠? 시우도 신발 벗고 들어와요. 너무 추우면 말하세요 별을 보는 것도 좋지만 감기에 걸리면 안 되거든요. 사과가 너무 퍼석거려요. 망한 것 같아요.  고마워요, 시우. 이상하다. 나중에 기억을 되찾게 되어도. 절. 용서해주실 수 있나요? 이상하다. 저도 시우가 원하는 걸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제게는 자격이 없어요. 이럴 자격이 없어요. 이상하다.

미안해요.

이상하다.

3.

부지런한 새조차 깊게 잠든 채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시우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 앉았다.

“........”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시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분화하는 화산처럼 복잡한 마음은 채 정돈되지 않았다.

“씨발.....”

이를 바드득 물며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믿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말로 느껴져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불끈 쥔 주먹으로 무엇이든 후려치고 싶었다.

“이런 개 씨발.....”

모조리 되돌아온 기억들이 죄다 엉망진창으로 엮여있다.

마치 트르먼 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모든 걸 알고 있던 아멜리아는 관중이었고, 시우는 트루먼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꼼짝없이 속아 넘어가서.

시우는 두 개의 가슴에는 두 갈래의 기억이 흘렀다.

23살에 게헨나에 잡혀 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아멜리아에게 사사건건 괴롭힘을 받았던 시우.

11살부터 아멜리아와 함께 오두막에서 이런저런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시우.

기억과 신체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그가 겪은 한 달의 기억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시우에게 하루는 곧 반년이란 시간이었다.

하루를 자고 일어나면 어제 먹었던 밥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높은 밀도의 시간이었다.

“욱....”

구역질이 나왔다.

알고 있던 것, 느끼고 있던 것들이 정신없이 뒤엉켜서 끔찍한 두통을 자아내고 있었다.

시우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두 뺨엔 어느샌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4.

밤새 고뇌와 슬픔에 잠겨있던 아멜리아는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완전히 다른 태양의 위치를 보며 오늘은 늦잠을 자버렸구나 깨달았다.

머리가 멍했다.

슬픔도 괴로움도 후회도.

잠이 든 순간만큼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면 어둑하게 늘어지는 그림자처럼 덩치를 불려왔으니.

그래도 이 잠시의 평화는 아멜리아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아.”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큰일이다.

시우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최근에는 시우가 먼저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는 때도 많았으니 먼저 아침 식사를 끝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멜리아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 오두막 1층으로 갔다.

“어?”

시우가 없다.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차려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어제 가지런히 청소를 끝냈던 가구나 모포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 아예 내려온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시우?”

어제 그 일로 시우도 생각이 많아져 늦잠을 잔 걸까?

창으로 슬쩍 정원 쪽을 보아도 안 보이고 그다지 넓지 않은 집을 구석구석 기웃거려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시우?”

다시 계단을 올라가 시우의 방문 앞에선 아멜리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아직도 자고 있는 걸까?

-똑똑

노크를 하며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시우, 들어가도 될까요?”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아멜리아의 앞에 슬쩍 문이 열린다.

사실 어제 같은 일을 겪고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부끄럽긴 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얼마 남지 않는 그와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함께 보리밭 언덕에 가 완성하지 못했던 그림을 마저 그릴 예정이었다.

그 전처럼 커다란 캔버스와 이젤을 챙겨서 말이다.

“........”

그리고 안대를 차고 있는 시우가 방 앞으로 나왔을 때 아멜리아는 깜짝 놀랐다.

“시우, 얼굴이 왜 이래요?”

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퀭해 보였던 것이다.

아멜리아는 손을 뻗어 시우의 뺨을 슬쩍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감기라도 걸린 건가요?”

“.........”

불길한 침묵이 길어지던 사이.

아멜리아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설마 이제 정말로 기억을 되찾은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자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무척이나 힘겨워 보이는 미소였다.

“괜찮아요. 아멜리아 님은 잘 주무셨나요?”

“저는, 좋아요. 그보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요?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뒤꿈치를 들어 시우의 이마를 만져보는 아멜리아.

시우는 슬쩍 몸을 비틀어 그녀의 손을 떨쳐냈다.

“아.....”

“정말 괜찮아요. 두통이 살짝 있어서 그런가 봐요.”

그에게는 아직 어색함이 남아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 배려가 부족했다고 반성한 아멜리아는 제 팔을 감싸 안으며 묻는다.

“오늘 함께 그림 그리러 가지 않을래요? 도시락은 제가 준비할게요.”

잠시 망설이던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문을 닫고 들어가려던 시우의 뒷모습에서 명백한 이질감을 느낀 아멜리아.

그녀는 시우를 멈춰 세웠다.

“시우.”

그와의 거리감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저 어젯밤의 해프닝 때문이라 치부하기에는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이다.

“네.”

하지만 진실을 캐물을 용기는 아멜리아에게 없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슬쩍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다릴게요.”

“네.”

우두커니 서 있는 아멜리아의 앞에 방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닫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