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1.
아멜리아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았다.
사막의 열사 같던 흥분의 열기가 가시자 자괴감이 몰려온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와 더불어 자신의 약함을 탓한다.
지금의 그와 몸을 섞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아직 시우는 완벽하게 돌아온 것이 아니다.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시우를 몸으로 유혹하고 어중간한 욕심을 채우는 것은 아멜리아가 그토록 경멸하는 비겁한 짓이다.
용서를 구하는 말 따위도 해서는 안 됐다.
하물며 기억을 되찾아도 용서해줄 수 없냐니, 파렴치한 소행이다.
“흑....윽...윽...”
그러나 너무 두려웠다.
다시 돌아온 그가 보낼 눈빛이.
모든 사실을 떠올린 그가 품을 증오가.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모진 말을 들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시우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마음이 무뎌졌다.
약해졌다.
돌변하는 그의 모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승님... 스승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리 애원해도 누구도 답을 주지 않는다.
갑갑한 어항 속에서 숨 쉬는 기분이었다.
-팅!
행여 시우에게 들릴까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죽여 울던 아멜리아의 발치에 뒹구르르 구르는 약병.
아멜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주워들었다.
“이것만 없으면....”
케테르 공작이 주고 간 정체불명의 물약만 없다면 영원히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행복한 추억이 조금 더 늘어난 이 오두막에서 아멜리아에게 친애의 눈빛을 보내는 시우와 함께 지낼 수 있다.
잊혀진 진실 위로 세워진 거짓말 속에서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함께 마법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파이를 굽고, 산책을 하면서.
“행복...하게....”
아멜리아의 손에서 마법의 입자가 떠오른다.
고작 작은 약병 따위는 내용물과 함께 통째로 증발시킬 수 있는 초고열의 입자였다.
조금만 비겁해지면 되는 거야.
조금만 타협하면 되는 거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망치는 것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의 자유의사를 짓밟는 일이니.
하지만 시우 또한 이 생활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아멜리아의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5년 동안 본 미소보다, 그와 함께하며 지낸 요 한 달 동안 본 미소가 훨씬 많았다.
대신.
대신에 앞으로 더 행복하게 해주면 된다.
아멜리아가 그에게서 빼앗았던 행복만큼 십 년 이십 년 아니 평생에 걸쳐 그가 늙어 이 세상을 뜰 때까지.
몇 배로 되돌려준다면...
서서히 가까워진 아멜리아의 불꽃이 병에 매달린 태그를 그을릴 때쯤 아멜리아의 시야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시우가 선물로 만들어 주었던 화관.
아멜리아는 화관에 보존 마법을 걸어 드림캡처처럼 창가에 매달아 두었던 화관이었다.
아직 꼬마이던 그가 처음으로 아멜리아에게 주었던 선물.
그것을 보는 순간 손아귀의 마법이 흩어진다.
그녀를 몰아붙이던 광기에 가까운 충동 또한 씻겨나가듯 사라졌다.
“못...해요....”
그런 일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아멜리아는 몸을 서서히 웅크렸다.
소리 없는 그녀의 오열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2.
이불을 정리하며 입술을 매만졌다.
시우가 한 사람분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부터 아멜리아는 그를 돌봐주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즐거웠다.
지루하고 따분한 청소조차도 아멜리아만 옆에 있다면 특별한 이벤트가 된다.
아멜리아는 시우의 은인이자, 믿음직스러운 스승이였고 또 그가 처음으로 연모의 마음을 품게 된 여자였다.
“돌겠네 진짜...”
시우는 머리를 쥐어 싸매며 털썩 침대에 앉았다.
그런 그녀와의 뜨거운 키스.
그 잔열이 남은 듯이 입술과 혀가 화끈거렸다.
아멜리아와 진득하게 혀를 섞는 순간 시우는 이성의 끈이 끊어진 것을 느꼈다.
아직 그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무슨 생각인지 확신을 가지고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침대로 넘어뜨렸다.
사실 아멜리아의 가슴이라면 본 적도 있고, 만진 적도 있고 심지어 빨아본 기억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워낙에 어렸고 한 달만에 10년치의 기억을 되찾은 시우에게는 한참 전의 일처럼 흐릿하게만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어렸을 때 응석 부리듯이 하던 행동과, 몸과 마음이 자란 이후에 확고한 의지를 갖추고 하는 행동은 그 의미도 결과도 다르다.
아멜리아는 도대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거 느낌 존나 싸한데.”
시우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 아멜리아가 시우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보호자로서 피보호자에게 보이는 애정 같은 것인지,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것인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지만 일단 오늘 아멜리아는 적극적으로 키스를 받아들였다.
몸을 더듬는 시우의 손길에조차 저항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마지막 순간에 시우를 거부했는가?
시우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저도 시우가 원하는 걸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제게는 자격이 없어요... 이럴 자격이 없어요.’
그렇게 말한 아멜리아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내가 원하는 걸 바라고 있다...”
그게 뭐였는지 확실히 알고 말한거긴 할까?
“하지만 자격이 없다...”
무슨 자격을 의미하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는 제대로 모르겠지만 대충 비슷한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시우의 친구 중에 한 명이 있었다.
그는 학교의 여학생 A 양과 미묘한 관계, 소위 말하는 썸을 타는 단계였다.
그래서 A양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해왔을 때 발기한 자지 사진을 찍어서 보냈고, 경악한 A양의 신고로 그대로 퇴학당했다고 한다.
“정신 나간 새끼.”
시우는 얼토당토않은 일화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처음 그 썰을 들었을 때 ‘너는 호스트라도 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무튼 이것도 비슷한 예가 아닐까 싶다.
물론 타카쇼만큼은 아니지만 대충 그런 맥락으로 급발진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우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타카쇼?”
그게 누구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
허름한 방 안에서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
상대의 얼굴은 베일에 가려진 것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두통이 몰려왔다.
“아, 또 이러네.”
아멜리아가 준 물약을 먹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들이 뒤엉킨다.
수십 개의 TV를 동시에 틀어놓고 시청하는 것처럼 온갖 영상과 음성들이 머릿속에서 난무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한 메스꺼움 잠시, 시우는 왼쪽 눈에 극심한 격통을 느꼈다.
“끅!”
마치 송곳으로 푹 쑤시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극악의 고통이었다.
한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없이 지옥과 같은 통증을 맛보던 시우.
약 10분간 계속되었던 격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환통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우의 온몸은 격통으로 인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뭐, 뭔데....?”
급하게 아멜리아를 찾으려 했던 시우.
결국 그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은 아멜리아가 주는 물약이다.
그녀에게 이상 상태를 보고해야 했다.
비틀비틀 일어나 걸으려던 시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왼쪽 눈이 캄캄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멜리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싸움에서 왼쪽 눈을 잃었다.
텅 빈 눈구멍을 의안으로 채우고 그 위를 안대로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어둠은 다르다.
아예 안구가 존재하지 않아 인식을 못 한다기보다는 마치 무엇인가에 가려진 것 같다.
시우는 뒤통수를 감싸던 끈을 풀고 안대를 벗었다.
그와 동시에 안구를 태울 듯이 빛이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곳에 갇혀있다가 갑자기 빛을 본 사람처럼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시신경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크윽....!”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은 금세 빛에 적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시우는 한쪽 눈을 감싸고 어기적어기적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뭐야 왜 이래 이거.”
의안에 불과하던 안구가 원래부터 그의 일부였던 것처럼 데굴데굴 움직이고 있다.
왼쪽 눈으로도 확실히 물체가 식별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시력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오른쪽 눈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왼쪽 눈동자의 색깔만 찬연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변 흰자에는 문신을 새기기라도 한 것처럼 복잡한 수식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우의 혼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깜짝아!”
주변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무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시우.
눈앞에 무엇인가 둥둥 떠다닌다.
형형색색의 선이 보인다.
희끄무레한 마치 선들이 기류처럼 방안은 물론 곳곳을 떠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마주한 빛에 놀란 시신경이 환각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내 시우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이것은 마력의 흐름이다.
그가 손끝으로 휘적일 때마다 수면 위에 떠도는 실을 감는 것처럼 마력의 흐름이 흐트러졌다가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거참.... 신기하네...”
시우가 지닌 마법적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일반적으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의 흐름은 매우매우매우 미세하다.
게다가 관측하려는 순간 흐트러져 버리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이렇게 정갈한 마력의 가닥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법을 사용해 관측하려는 순간 그 마력이 흐름을 깰테니 말이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돌려 책상 위를 바라보던 시우는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가 기억을 더듬으며 휘갈겨 적어놓은 마법식을 바라보는 순간 몇몇 개의 글자와 수식들이 3D 영화를 보는 것처럼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시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인에서 마법진은 3차원 혹은 그 이상의 차원으로 구성된다.
마법식은 그것을 2차원의 종이에 옮겨 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마법식을 바라보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아인에 있는 것처럼 마법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악보를 읽었을 뿐인데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오케스트라가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몹시 기이하고도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시우는 손을 들어 왼눈을 가린다.
그러면 입체 모형은 사라진다.
다시 손을 내리면 입체 모형이 드러난다.
“신기하네.”
최근 수학을 뒷전으로 할 정도로 마법적인 탐구에 열이 붙은 시우에게는 몹시도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아멜리아에게 이 신기한 현상을 알리기에 앞서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사실 불과 몇 분 전에 그런 겸연쩍은 해프닝을 두고 곧장 얼굴을 보는 것이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시우가 꺼낸 것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것을 그대로 옮겨적은 마법식이었다.
아주 조금도 해석해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우의 기억은 200장에 달하는 복잡한 식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기억이라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 종이뭉치를 팔랑팔랑 넘겨 읽는 순간 시우는 머리에 벼락이 꽂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가는 느낌과 함께 끝없는 암흑 속으로 침잠, 계속 계속 가라앉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시우는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있었다.
마치 우주처럼 끝없는 어둠만이 펼쳐진 이곳은 ‘아인’.
자성마법을 갈고 닦은 마녀만이 지닐 수 있는 관념과 사고의 세계.
말로만 들었던 그 공간 속에 초대된 것이다.
어두컴컴한 아인의 중앙에는 커다란 구조물이 서 있다.
그것은 동그란 원 같기도 했고, 검은 그림자가 뭉쳐있는 것 같기도 했으며, 커다란 베틀 같기도 했으며.... 또 하나는 알아볼 수 없었다.
분명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인식할 수 없음에 인지 부조화가 왔다.
동일한 차원의 것이 아닌 고차원의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
그 앞에는 신시우가 있었다.
지금의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신시우.
나이를 좀 더 먹어 20대 후반 정도가 되면 저런 모습일 것 같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그림자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 구조물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게 있다고 했던가?”
아인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지만 그 공간 속에 다른 누군가(설령 그것이 자신의 모습일지라도)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신시우의 고개가 돌아간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시우의 온몸을 휘감는 검은 쇠사슬.
엇 소리를 할 새도 없이 시우는 아인에서 퉁겨져 나왔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시우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칠 무렵.
또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마법에 관한 기억들.
그동안 억류되어있던 댐을 개방하듯이 무수히 많은 지식이 뇌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시우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것을 받아들였다.
무엇인가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