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1.
어째서 행복한 순간들은 이리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걸까?
시간은 손틈으로 흘러가는 모래처럼 붙잡을 틈 없이 지나갔다.
매일 일어나 함께 아침을 먹는다.
아멜리아의 요리는 썩 훌륭한 편이 아니었다.
아멜리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창한 재주를 부리기보다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음식을 주로 만들었다.
계란프라이에 베이컨, 소시지와 빵 따위를 말이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면 점심이 되기 전까지 도시락을 싸고 어디로든 나들이를 나갔다.
하루에 하나씩 특별한 일을 하기로 했으니까.
어떤 날에는 이젤과 캔버스, 그리고 연필을 챙겨 들고 관리되지 않아 삐뚤빼뚤 자라난 보리밭 언덕에 앉아 함께 그림을 그렸다.
어떤 날에는 바이올린을 켜며 시우만을 위한 연주회를 하기도하고.
또 어떤 날에는 근처 호수에서 함께 낚시를 하거나 헤엄을 쳤다.
지붕 위에 올라가 나란히 드러누워 함께 별을 보거나,
거품이 가득한 대야 안에서 침대 시트를 발로 밟으며 열심히 세탁하거나,
가끔은 재료를 사와 별채의 오븐에서 함께 사과 파이를 만들어 먹었다.
아멜리아가 스승님에게 받았던 모든 따뜻한 나날을 시우에게도 나눠주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빛나는 순간이었다.
“아멜리아 님.”
“네?”
“오늘따라 멍하시네요.”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요.”
아멜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시우를 보았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공식들을 정리 중이었다.
이제 아멜리아는 그의 설명이 없으면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다른 마녀의 자성 마법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가 연구하던 마법은 워낙에 독자적인 색이 강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가 한번 감정을 잃은 뒤에는 더욱 그 색채가 짙어진 느낌이다.
“굳이 옆에 안 계셔도 괜찮아요. 이젠 저 혼자도 할 수 있는데요.”
“아니에요. 그래도 가끔 막히는 곳이 나오잖아요.”
시우의 목소리는 굵어져 있었다.
약병의 절반이 넘게 비워지고 그는 어느덧 사춘기가 끝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조금 앳된 기색이 있으나 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아멜리아가 알고 있던 시우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피곤하시면 먼저 주무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저는 마녀예요. 이 정도로 피곤하진 않아요.”
“그래도 요즘은 꼬박꼬박 주무시던걸요.”
“습관이 들었나 봐요. 하지만 자지 않아도 되는 건 마찬가지죠.”
짧아도 일주일, 길면 몇 달 동안이나 잠을 자지 않던 아멜리아도 어느새 꼬박꼬박 일정한 수면 패턴을 가진 마녀가 되었다.
“제가 없으니 외로워서 그러신 건 아닌가요?”
아멜리아와 시우가 한 침대에서 자지 않게 된 것도 꽤 시간이 흘렀다.
하루가 다르게 훌쩍훌쩍 자라는 시우가 먼저 남사스러움을 느껴 동침을 사양했기 때문이다.
시우는 태연한 척 그러나 역시 부끄러운 듯이 말꼬리를 흐리며 묻는다.
이 말을 꺼낸 것 자체를 살짝 후회하는 듯도 했다.
“그럴까요?”
“아.”
멋쩍어하던 시우를 더 멋쩍게 만드는 아멜리아의 한마디.
뇌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흘러가듯이 나온 말이었다.
시우는 멍하니 입을 벌렸고 아멜리아는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어린아이 같다는 수식어가 어색한 용모이다.
그 조그맣던 소년이 어느새 이렇게 자라나 버렸다.
실제로 함께한 시간은 고작 한 달 남짓인데, 어렸을 적 모습부터 지금까지 성장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탓인지 굉장히 오랜 시간을 함께한 기분이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이라면 일 년 일 년이 하루처럼 느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시우도 그랬나요? 저도 농담이었는데.”
아멜리아는 책상 위에 머리를 기대며 배시시 웃었고 시우는 괜스레 손으로 턱밑을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헛기침이 나왔다.
워낙에 많은 기억이 농밀한 밀도로 재구축되는 탓인지 시우에겐 정말 하루하루가 1년처럼 느껴졌다.
고작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몸도, 마음도, 기억도 바뀌어 있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온종일 옆에 붙어있는 아멜리아에게 시우가 느끼는 친밀감과 친애는 고작 한 달의 분량이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어린 시우를 키워주기라도 한 것처럼 어떨 때는 어머니로, 어떨 때는 누나로, 어떨 때는 스승으로 또 어떨 때는...
“시우.”
시우의 생각을 헤집고 아멜리아가 불쑥 고개를 들이민다.
이제는 시우보다 작아진 아멜리아의 손에는 절반도 남지 않은 약병이 들려 있었다.
매일 밤이 되면 아멜리아는 시우에게 약을 먹였다.
이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도망치고 피하고 싶다는 마음 역시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멜리아의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무사히 회복되어가는 시우의 모습을 보면 안도를 느낌과 동시에 잿불에 타들어 가는 듯한 슬픔 역시 공존했다.
시우는 그런 아멜리아의 속도 모른 채 태연하게 스푼 위에 물약을 받아 마셨다.
“이 정도는 저 혼자 마실 수도 있는데요.”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시우는 얌전히 아멜리아가 준 스푼을 입에 물고 약을 넘겼다.
그 모습을, 어째서인지 슬픈 눈으로 지켜보던 아멜리아.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진 말아요. 저는 들어갈게요.”
“네, 아멜리아 님.”
그의 얼굴을 더 바라보고 있다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마음에 자리를 뜨려던 아멜리아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선다.
건장하게 자라나는 시우의 모습을 보니 일직이 단념했다고 생각했던 미련이 되살아났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비겁하고, 치졸하고, 비열한 행위이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이 끝나가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차곡차곡 쌓아온 초조함과 절박함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고 말았다.
“시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네?”
시우가 공부하던 책상 옆에 비스듬히 선 아멜리아.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시우는 짐짓 긴장한 기색으로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애절한 그녀의 눈빛이 가슴을 꿰뚫는 것만 같다.
그녀는 슬퍼하고 있었다.
침울한 아멜리아의 얼굴을 보니 시우의 가슴도 함께 욱신거린다.
저런 표정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웃는 얼굴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고 있습니다.”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않는 아멜리아를 위해 조심스레 배려해주는 시우.
아멜리아의 아름다운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한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나중에....”
아멜리아는 울음을 한 번 삼키고 시우에게 말했다.
결코 입에 담지 않기로 결심했던,
찰나의 위안을 위한 이기적인 말을.
“나중에 기억을 되찾게 되어도... 절... 용서해주실 수 있나요?”
“........”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초라하고 약해보이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시우는 팔을 뻗어 셔츠의 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아멜리아 님.....”
아멜리아는 그의 너른 품에 달려가 안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두 알리고 매달리고 싶다.
애원하고 싶다.
이렇게 미안하다고,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고, 절대로 버리지 말아 달라고 목 놓아 울고 싶다.
간청하고, 빌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가까스로 그 불경한 충동을 막아냈다.
시우의 두꺼워진 손이 등을 토닥이는 것이 느껴진다.
“저는 아멜리아 님이 저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장담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연약하고 이기적인 모습에도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바싹 울리자 거짓말처럼 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흑...으윽.... 히끅....”
어깨를 들썩이며 시우의 어깨를 적시는 아멜리아의 머리를 시우는 상냥하게 쓰다듬는다.
“하지만, 용서해 볼게요. 당장은 못 해도 하려고 노력해볼게요. 지금 제게는 아멜리아 님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시우는 아멜리아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어깨를 잡고 살짝 거리를 벌렸다.
단정했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눈물범벅으로 엉망진창이 된 채 시우의 코앞에 있다.
자라온 환경도,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도, 입장도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같은 생각을 했다.
키스하고 싶다, 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포개졌다.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이 겹치고 시우는 아멜리아의 허리와 목덜미를 끌어안듯 감쌌다.
엉거주춤하게 갈 곳을 찾던 아멜리아의 손이 시우에게 매달리듯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는 듯이.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까슬한 혀가 입안으로 들어오자 아멜리아의 몸이 감전된 듯이 찌릿 떨렸다.
도망치려는 듯한 기색에 시우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느다란 허리를 억세게 쥐었다.
아멜리아는 꿈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키스의 감촉을 느꼈다.
까슬하면서도 부드럽고, 말랑거리면서 동시에 끈적하다.
스승님께 배웠다.
당신께서는 키스가 두 사람 간의 신호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을 믿고 있어요’라는 신호.
‘그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허락한다’라는 신호.
신시우는 아멜리아를 믿고 있다.
아멜리아는 시우에게 이 이상의 행위도 허락하고자 하고 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타액과 호흡을 교환하며 시우에게 달라 붙는 아멜리아.
점차 뜨거워지는 숨소리가 작은 방을 한가득 채웠다.
옷깃에 매달린 아멜리아의 손에도 무언의 애절함이 깃들었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시우의 손이 아멜리아의 엉덩이를 잡았다.
그녀의 목덜미로 들어가 있던 반대 손이 커튼처럼 나이트가운을 들쳐 올리며 그녀의 말랑한 맨가슴을 움켜쥔다.
시우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모른다.
본능에 이끌려 아멜리아를 대하고 있을 뿐이다.
아멜리아 역시 자신의 몸을 더듬는 시우에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순순히 몸을 내어주듯 그의 혀를 더욱 정성껏 빨아들이며 숨을 헐떡일 뿐이다.
두 사람은 키스를 멈추지 않고 왈츠를 하듯이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걸었다.
점점 뒷걸음질 치던 아멜리아의 다리가 침대에 걸리더니 풀썩 뒤로 넘어간다.
“하아...하아...”
“하아....”
그 겨를에 입술이 떨어지고, 시우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멜리아를 내려보았다.
침대 위로 흩어져 사금처럼 빛나는 머리카락, 발갛게 상기된 두 뺨.
시우의 손에 의해 올라간 나이트가운은 그녀의 하얗고 매끈한 배와 가슴 한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드레스를 정돈하지도 않았다.
그저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키스로 가빠진 숨을 헐떡이며 시우를 올려볼 뿐..
시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우의 체감상 아멜리아는 십여 년 가까이 시우를 보살펴주고 애정을 쏟아주었던 은인이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아멜리아를 보며 이성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고, 이런 애매한 관계가 아닌 더 깊은 관계를 지니고 싶다고 많이.
아주 많이 생각 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우가 보더라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고 더 깊은 사이가 될 수 있는 그런 흐름.
“.........”
“.........”
정식으로 교제해도 관계는 3년 뒤,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것이 정숙하고 교양있는 숙녀의 몸가짐이니까.
그러나 그의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면.
그의 억센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엉덩이를 받쳐 들면.
이렇게 그의 침대 위에 드러누워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고 있자면.
허락하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의 문을 그가 열어주길 원하게 된다.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키고 상체를 숙여 그녀의 몸 위를 기듯이 덮었다.
아멜리아는 눈을 질끔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결심한 듯이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려는 시우의 뺨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밀어냈다.
“안 돼요... 시우, 이러면 안 돼요....”
“아....”
분위기에 취해 그녀를 취하려던 시우도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돌아온다.
달아오르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급속도로 냉각되는 와중 몸을 일으킨 아멜리아는 헝클어졌던 드레스를 정돈했다.
그녀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시우가 원하는 걸 바라고 있어요....”
아멜리아는 도망치듯이 시우를 지나쳐 문고리를 잡았다.
시우를 등진 아멜리아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작고 초라해보였다.
“하지만... 제게는 자격이 없어요....이럴 자격이 없어요...”
“무슨 자격이...”
“미안해요.”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리고자 하는 사과의 말을 끝으로 아멜리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