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1.
시우가 일어났을 때 아멜리아는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었다.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 가방이 3개.
아멜리아는 그 안을 필요한 물품들로 채워 넣었다.
개당 1주일 정도를 보낼 수 있는 양이라치면 넉넉히 삼 주를 바깥에서 지낼 수 있는 생필품들이 들어있었다.
시우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시우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짐을 챙겨오겠어요?”
“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우는 아멜리아에게 건네받은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몇 벌 안 되는 옷(아멜리아가 사다 준)과 잠옷, 그리고 종이와 볼펜을 챙긴다.
2층 계단을 내려가자 아멜리아는 로비에서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 챙겨왔나요? 칫솔은요?”
“넣었어요.”
“수건 같은 건 따로 필요 없어요. 제가 넣었거든요.”
“네네, 말씀하셨어요.”
시우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아멜리아 옆에 섰다.
시우가 지금껏 느낀 바에 따르며 게헨나라는 도시는 굉장히 아름답다.
잠깐 아멜리아와 산책을 하러 가도 그렇고, 가끔 레노먼드 타운이나 아르스 마그나 타운을 둘러봐도 그렇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쁜 장소밖에 없다.
따라서 당장이라도 여행을 갈 것 같은 아멜리아의 채비는 시우를 들뜨게 했다.
어디가 됐건 예쁜 곳으로 간다는 말이 아닌가?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제가 예전에 살았던 오두막집이요.”
“캠핑인가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아멜리아는 자연스럽게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시우도 그 손을 받아들였다.
시우는 지금까지 아멜리아가 미소짓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무뚝뚝함과는 별개로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가요.”
아멜리아와 시우는 정원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 뒤편에 짐을 올려놓고 함께 마차로 들어갔다.
푹신푹신한 쿠션과 아름다운 실내장식이 달린 마차에서 아멜리아가 손을 흔들자 마차가 덜컹이기 시작한다.
“비행기 타는 기분이네요. 짐가방도 챙겨 들고.”
시우는 싱글싱글 웃으며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비행기? 아, 비행기요.”
아멜리아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현세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마차중에 가장 빠른 교통수단.
하늘을 나는 쇳덩어리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타본 적이 있나요?”
“네, 처음에 탔을 때는 엄청 무서웠어요. 그때가 아마 열 일곱 살 때였....어?”
시우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지금 시우의 모습은 아무리 봐주어도 어린 소년이다.
열일곱도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사춘기도 오지 않은 외견인 것이다.
아멜리아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그가 기억을 되찾는 듯한 단서들이 툭툭 떨어질 때마다 아멜리아는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했다.
이 행복과 평화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멜리아는 꾹 닫혀있던 입술을 열어 간신히 시우를 다독였다.
“기억에 혼동이 오는 걸 거예요.”
“그런가 봐요.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해요.”
“좀 누울래요?”
“네, 그래야겠어요...”
소피아에게 제공받은 아멜리아의 마차는 따로 공간 굴절 마법이 걸려있지 않다.
그런 건 망해도 30대는 먹고살 제머나이 백작이나 하는 사치이다.
그래도 시우가 발을 뻗고 누울 자리 정도는 있었다.
그때 아멜리아가 쓱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 쪽으로 왔다.
“응?”
“여기에 머리 놓아요.”
아멜리아는 물색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톡톡 두들겼다.
시우는 당황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냥 이대로 있어도 좋아요.”
“머리가 불편하잖아요.”
“아멜리아 님이 힘드실 텐데...”
“괜찮아요.”
몇번의 실랑이가 오갔지만 결국 시우는 아멜리아의 말을 따랐다.
덜컹거리는 의자에 머리를 눕히는 것보다는 푹신한 그녀의 허벅지가 더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뭔가 죄송하네요.”
“그럴 것 없어요.”
푹신하면서도 탄력 있는 아멜리아의 허벅지가 뒤통수로 느껴진다.
그대로 시선을 위로 향하자 턱 밑에서 위로 올려보는 자세임에도 전혀 빛바래지 않는 아멜리아의 미모가 보였다.
봉긋하게 튀어나온 가슴도 보였고 말이다.
“오래 걸릴 테니 조금 눈 붙여도 괜찮아요.”
아멜리아는 시우의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적당한 진동, 편안한 허벅지 베개, 그리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가느다란 손길은 그 어떤 수면제보다도 효과가 탁월했다.
푸른 보리밭 사이로 굽이친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마차는 열심히 달리는 동안 시우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2.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아멜리아와 시우가 굴피나무 숲까지 도착했을 무렵엔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간 한 번도 깨지 않았던 시우의 어깨를 두드려 깨운 아멜리아는 짐을 챙겨 숲길에 발을 들였다.
“와... 이뻐요.”
무분별한 개발이 일어나지 않는 만큼 게헨나는 자연의 보존상태가 좋다.
게다가 이 굴피나무 숲은 그 어떤 타운에도 속하지 않은 레노먼드 타운과 타로 타운 사이의 무인지대이다.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 굴피나무들은 죄다 키가 커다랬다.
“그렇죠?”
시우의 감탄사에 아멜리아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칭찬받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고는 회갈색의 나무 기둥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뾰족둥글한 잎새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펄럭였다.
길이 들지 않은 산길을 걸어가다 보면 직경 30M 남짓한 공터가 나온다.
굴피나무 숲 안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그늘져있기에 햇볕이 잘 닿지 않지만 이곳은 달랐다.
항상 햇볕을 많이 받는 덕택인지 잔디가 깔린 땅에는 한가득 아름다운 야생화와 들꽃들이 피어있었다.
이름 없는 야생화들의 군집, 그 소담하고 아름다운 양탄자의 한가운데 자그마한 통나무집이 두둥실 떠 있었다.
산뜻한 햇살 아래서 아기자기하게 서 있는 오두막과 옆에 딸린 조그마한 별채 하나.
아멜리아의 인생에서 행복이란 곧 이 조그마한 오두막의 나날을 뜻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그와의 시간이라면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조그마한 욕심이 있었다.
“짐 풀죠.”
“네!”
사실 숙소라는 말이 죄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아멜리아의 저택이나 그가 지금껏 보고 다닌 건물에 비하면 굉장히 허름하고 별볼이 없는 건물이다.
그래도 숲 한가운데 있는 통나무집은 뭔가 소년의 로망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우도 신이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했다.
두 사람이 생활한다면 서로가 서로의 시야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작고 아기자기했다.
“괜찮나요?”
“네! 정말 좋아요!”
시우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집안을 살폈다.
작은 찬장이 있고, 벽난로 앞에는 흔들의자가 있다.
오랫동안 사람이 없었던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말끔하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2층으로 가면 침실이 있어요. 구경해볼래요?”
“2층도 있어요?”
“따라와 봐요.”
시우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아멜리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을 그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려나.
아멜리아는 시우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오두막이라는 특성상 크고 넓게 짓기는 힘들다.
그래서 2층에도 아주 작은 방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이쪽이 저의 스승님 방이었고, 이쪽이 제 방이었어요.”
아멜리아는 견습마녀 시절 그녀가 사용하던 방에 들었다.
지붕의 바로 아래이기 때문에 천장이 대각선으로 내려오는 구조였다.
남향으로 난 조그마한 창에는 아리따운 굴피나무 숲이 그림처럼 걸려있었고 그 아래는 한 사람이 겨우 잘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침대가 있다.
물건 하나 쌓여있지 않은 작은 책상과 의자가 방의 모서리를 채웠고 그 외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조그마한 상자에 담긴 채 침대 밑에 쌓여있다.
“시우는 이쪽 방을 쓰도록 해요. 조금 좁지만 깨끗할 거예요.”
“주기적으로 청소하시는 건가요?”
“네.”
시우는 비밀기지라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색으로 제 물건들을 방에 풀어놓았다.
옷장에 옷을 걸고 테이블에 종이와 책을 놓자 짐 풀기가 끝나 버렸지만 말이다.
“바로 맞은 편이 제 방이에요. 짐 풀기, 도와주지 않을래요?”
“네! 도와드릴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는 1층에서 캐리어를 들고 아멜리아와 나란히 2층 방으로 돌아왔다.
아멜리아의 방과 선대 메리골드의 방은 대칭 구조였지만 이쪽이 조금 더 넓고 침대도 더 크다.
캐리어를 열고 하나씩 물품을 빼내는 시우와 아멜리아.
정말 사소하고 별일 없는 일인데도 아멜리아는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
시우의 손에 들린 그녀의 속옷을 발견하기 전까지 말이다.
“아.....”
“어.....”
게다가 불행한 사실.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소피아의 조언.
진정한 어른이라면 어른스러운 속옷을 입어야 한다는 소피아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에 따라 아멜리아의 팬티와 브래지어는 대부분 란제리였다.
가슴을 반쯤이나 드러내고, 엉덩이 부분이 고스란히 비치거나, 끈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한 속옷들.
기쁘고 들뜬 마음에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아멜리아는 아차 싶었다.
시우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아멜리아.
힐끗거리는 그의 시선이 가슴과 하반신 그리고 속옷을 오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멜리아는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기분이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쳐봐야 시우도 아멜리아도 곤혹스러워질 뿐이다.
게다가 저런 상태의 시우를 상대로 뭘 부끄러워하는 걸까?
설령 다른 마녀들이 그녀의 속옷 차림을 본다 하더라도 아멜리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침착하고 차분하게...
“그던....! 그건 제가 따로 정리할게요.”
....말하려던 아멜리아는 콰득 혀를 씹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굉장히 허둥지둥거리는 모양새이다.
“네....”
시우도 얼굴이 빨개진 채로 조용히 아멜리아에게 란제리를 건넸다.
-부스럭 부스럭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아주 어색한 기류만이 흐를 뿐이었다.
3.
샌드위치로 짧은 점심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함께 오두막 앞 공터로 나갔다.
드물게도 주변에 핀 들꽃들을 눈여겨봤던 시우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가르쳐주셨어요. 이렇게 토끼풀을 모아서 머리띠를 만든 다음에요...”
아멜리아는 토끼풀 위에 쪼그려 앉아 시우가 열심히 뭔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토끼풀의 길쭉한 꽃대를 모아 매듭을 짓는다.
한 뼘 반 정도 되는 꽃대를 엮고 엮다 보면, 새끼손가락 두께의 둥그런 머리띠 같은 것이 되는데 시우는 그 사이사이마다 들꽃을 하나씩 꺾어 꽂아주었다.
“이런 식으로 꽃으로 장식해주면 예쁜 화관이 돼요. 멋지죠?”
분홍, 초록, 보라, 주황, 남색, 빨강.
하얀 토끼풀 꽃 사이로 쏙쏙 형형색색의 꽃들이 박혀있는 소박한 왕관이 완성되었다.
“원래는 좀 더 크게 만들 수 있는데... 오랜만이라 잘 안 되네요. 꽃대도 길쭉한 게 별로 없고...”
“정말 예뻐요. 시우는 손재주가 좋네요.”
사실 잘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뭔가 머리띠도 삐뚤빼뚤하고 매듭을 너무 세게 묶은 탓에 여기저기 부러진 꽃대가 눈에 들어온다.
옆에서 지켜보며 방법을 익힌 아멜리아가 따라 한다면 훨씬 더 정교하고 미적인 화관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칭찬한다.
귀여웠기 때문이다.
잠깐 망설이던 시우는 쓱 그것을 내밀었다.
“아멜리아 님께 드릴게요.”
“저한테요?”
아멜리아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시우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시우는 쑥스러운 듯이 아멜리아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항상 잘 챙겨주시고, 잘 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런 거라도 드리고 싶어요.”
“..........”
아멜리아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왜일까?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나열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감정이어서.
아멜리아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유보했다.
“시우가.... 씌워줄래요?”
“네!”
아멜리아는 살짝 고개를 낮췄다.
살포시 머리에 무언가 얹히는 느낌이 들자 아멜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 시우의 눈에 비친 것은.
화관을 머리에 쓰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들꽃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멜리아였다.
“고마워요. 시우.”
시우가 마주한 아멜리아의 표정은,
스승님이 돌아가신 뒤로 처음으로 되찾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