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1.
일주일이 지났다.
아멜리아와 꼬마 시우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아멜리아는 케테르 공작이 쥐여준 물약을 하루 다섯 방울씩 먹여주며 그를 돌보았다.
마치 스승님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딱히 그가 기억을 되찾았을 때 용서받고 싶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우를 향한 아멜리아의 애틋한 마음과 과거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누군가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
그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시우가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아멜리아의 노력 덕택인지.
처음엔 아멜리아를 보기만 해도 무서워하던 시우도 천천히 그녀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아멜리아 님.”
“시우, 케이크 먹고 하세요.”
자기 방 책상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이던 시우는 아멜리아를 보고 폴짝 의자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반겼다.
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고 있었다.
원래 어린아이들은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시우의 경우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키도 하루에 1cm씩은 자라는 것 같고, 기억 역시 빠르게 되돌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특히 마법에 대한 기억은 유독 회복이 빨랐다.
“감사합니다.”
“부족하면 더 말해요. 가져다줄게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아멜리아 님도 드실래요?”
“그럴까요?”
아멜리아가 시우의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내려놓고 그가 열심히 끄적이던 종이를 내려보았다.
그 위로는 기초적인 마법지식이 시우의 나름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공부는 잘되고 있나요?”
“정말 이상해요.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이렇게 마법이 생각나요.”
“...기억이 차차 돌아오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아멜리아 님, 질문이 있어요. 이 부분은 왜 이런 공식이 나오는 건가요? 제 나름대로 증명을 해봤는데 뭔가, 잘 안 풀려요.”
“어디 봐봐요.”
아멜리아는 여백 없이 종이 위를 한가득 채우는 시우의 풀이를 들어 올렸다.
수준이 높다.
그가 유도하고 있는 공식은 예소드 백작이 창안한 ‘예소드 마력장 1 법칙’으로 역장역학의 정수라고도 불리는 법칙이었다.
어떤 기억을 어떤 속도와 심도로 회복하는지는 편차가 존재하는 모양이지만 그런 걸 고려해도 어렸을 적 아멜리아는 손도 대지 못했을 정도로 복잡하고 증명이 까다로운 공식이었다.
“........”
이제까지 아멜리아는 시우가 물어볼 때마다 아주 적절한 대답을 해주었다.
모든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그가 어디까지 자신의 힘으로 추론했는지를 살피고 스스로 깨닫게끔 실마리만 던져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멜리아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공식 증명의 초반까지는 분명 아멜리아도 알아볼 수 있다.
흔하디흔한 공용 마법식으로 풀어내고 적어두었으니까.
그러나 중반부부터는 전혀 다른 해석과 접근 방식이 적혀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것은 과거 시우가 작성했던 마법진 초안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오직 그만의 접근방식과 해석법으로 짜였기에 제삼자인 아멜리아는 윤곽밖에 그릴 수 없는 그런 상황.
비록 그때만큼이나 독자성이 짙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만의 공식’이 섞여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멜리아님?”
시우의 천진한 눈망울이 의아한 듯이 아멜리아를 살핀다.
아멜리아는 살짝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이건, 왜 이렇게 적었나요?”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봤어요. 사실 저 나무를 바라보던 중이었는데 이런 접근 방식이 번쩍 떠오르더라고요.”
시우가 펜으로 가리킨 곳은 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 벽화처럼 새겨두었던 프랙탈 나무였다.
아멜리아가 아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존의 형식을 탈피한 기형적인 마법진이었기도 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했다.
시우의 기억이 점차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뭔가 많이 잘못됐나요?”
“시우, 조금 쉬다 하지 않을래요?”
“네? 왜요? 마침 딱 모르는 게 나와서 재밌었는데...”
못내 아쉬워하는 시우를 아멜리아는 차분히 달랬다.
“너무 하나에만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질 수도 있어요.”
“네, 아멜리아 님.”
“정원에 돗자리를 펼게요. 같이 차 마셔요. 케이크도 가져오고요.”
“네.”
시우보다 한발 먼저 방을 빠져나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는다.
돗자리를 준비하고, 시우가 케이크와 함께 마실 홍차도 준비해야 하는데...
찬장을 뒤적이며 다기를 준비하던 아멜리아는 짙은 한숨을 뱉었다.
“후우....”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잠깐 잊고 있던 현실이 다시 아멜리아의 가슴을 짓누른다.
요 며칠.
최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일주일을 선택할 정도로 아멜리아는 행복했다.
쑥쑥 성장해가며 마법을 배워나가는 시우의 모습을 보고, 하루마다 커져가는 그의 키를 보고, 하루마다 가까워져 가는 그와의 관계를 보며 지난날의 외로움과 고독을 조금은 이겨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일어나 정원을 거닐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식사하고, 제일 좋아하는 키퓌쉬의 케이크를 먹고, 함께 잠이 드는 모든 순간이 아멜리아에겐 작고 소중한 행복이었다.
아멜리아를 믿고 따르는 시우.
아멜리아를 보면 미소짓는 시우.
아멜리아를 꼭 끌어안고 자는 시우.
그리고.
아멜리아를 미워하지 않는 시우.
모든 것이 마법이 만들어 준 찰나의 기적임을 알고 있다.
허나 과거는 청산되지 않았고, 아멜리아가 두려워하는 현실은 여전히 때를 기다리며 몸을 웅크린 채이다.
따스한 나날이 너무나 행복해 억지로 잊어버렸던 기정사실이, 시우의 공식 증명을 보는 순간 떠오른 것이다.
5년이다.
시우의 원망은 길고 길었다.
아멜리아 자신의 업보 또한 마찬가지다.
고작 며칠의 단란한 생활로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만끽하고 싶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가족의 온기를, 평온한 나날이 주는 포근함을, 함께해서 즐겁다는 이 순간을.
미련한 미련 속에서 한없이 더듬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곧 끝이 난다.
아멜리아는 품 안에 손을 넣어 케테르가 주고 간 물약을 꺼냈다.
이미 2할가량이 사라진 물약.
이것은 아멜리아가 헛된 행복을 향유할 수 있을 때까지의 도화선이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지금이라도 그 도화선을 자를 수 있었고, 멈춰 세울 수도 있었다.
이대로 그에게 물약을 먹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게 되는 걸까?
그게 아니라도 그와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이 조금은 더 길어지는 게 아닐까?
도피하고, 외면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차일피일 미룰 뿐인,
실로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역겨운 상상.
달콤한 뱀의 꼬드김처럼 그릇된 욕망의 충동이 가슴을 채운다.
“아멜리아 님!”
어느새 정원으로 나선 시우가 아멜리아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너무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밝고 친근한 목소리는 먹구름처럼 떠돌던 망집을 잠깐이나마 씻어냈다.
아멜리아는 잠시 물약 병을 바라보다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그건 잘못된 일이다.
아멜리아는 언제나 도망쳐왔다.
지금 이 망설임도 도피하고 싶다는 충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했다.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다.
아멜리아는 언제까지 도망만 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우에게 배웠다.
“금방 갈게요!”
2.
하루가 끝났다.
지평선 끝자락에 걸린 별을 보며 아멜리아는 방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케케묵은 바이올린을 꺼냈다.
보존마법이 걸린 케이스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것이었다.
마법은 융합 학문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은 학문이다.
예술적 소양과 단련이 반강제로 요구되는 마녀의 특성상 아멜리아도 한때 열심히 바이올린을 켰었다.
스승님은 피아노, 아멜리아는 바이올린.
모차르트, 생상스, 바흐, 쇼송 크라이슬러.
스승님이 구해온 악보라면 작곡가를 가리지 않았고 협주곡이 있으면 죄다 연주했었다.
마법을 싫어하던 어린 아멜리아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
턱받침대에 턱을 얹고 넥을 잡았다.
오랜만이라 손에 익지 않다.
보존 마법 덕택인지 썩어 문드러지지는 않았지만 조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브릿지의 위치를 조절하고 현을 감거나 풀며 음을 맞춰갔다.
-기이이잉
마녀가 된 이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바이올린은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을 원망하듯이 징징 울어댄다.
한때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손가락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활대를 쥐는 자세조차 어색했다.
하지만 몇 번 활대로 현을 켜자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몸이 기억하는 연주가 시작되었다.
현을 통해 전해지는 손끝의 떨림.
귓가를 맴도는 아름다운 선율까지.
잊어버렸던 것들이 되살아난다.
왜 이제 와서 이 바이올린을 다시 켤 용기가 생겨났는지, 어떤 변덕이 생긴 것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아멜리아는 눈을 감고 기억에 몸을 맡긴 채 한참이나 연주를 계속했다.
“우와...”
갑작스레 파고든 소음에 눈을 떴을 땐 어느샌가 문 옆에 빼꼼 고개를 내민 시우의 모습이 보였다.
끊어진 연주에 시우는 낭패한 표정으로 사과한다.
“아, 아멜리아님... 죄송해요.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아니에요, 소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슬슬 그만두려던 참이었어요.”
시우는 전보다 훨씬 격의 없는 태도로 아멜리아의 방에 발을 들였다.
이제는 들어가도 되겠냐는 정중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사이가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멜리아는 조금 뿌듯함을 느꼈다.
동시에 서글픔도 느꼈다.
“피곤한가요?”
“네, 오늘 마법을 너무 열심히 연구했나 봐요.”
슬슬 시간이 늦었다.
졸려서 반쯤 감은 시우의 눈과 잠옷 차림인 것만 봐도 12시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리할게요. 먼저 침대에서 기다릴래요?”
시우는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 아멜리아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 잠을 잘 자지 않는 아멜리아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시우를 위해 침소에 들었고 말이다.
“그 전에...”
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멜리아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아멜리아 님 연주를 좀 더 듣고 싶어요. 너무 듣기 좋았거든요.”
“그래요?”
이런 소소한 대화 하나가 아멜리아에겐 낯설게 된 것이었고, 그리웠던 것들이다.
조각나고 사라져서 생긴 마음의 결핍을 어느 정도 채워줄 정도로.
아멜리아는 시우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듣고 싶은 곡이 있나요?”
“아무 곡이나 다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아는 게 없거든요.”
바른 자세로 앉아 경청할 준비를 하는 시우를 보고 아멜리아는 다시 부드럽게 현을 움직였다.
연주하는 내내 선율은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으면...
그 작음 바람만을 넋두리처럼.
거듭, 거듭할 되새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