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1.
정말 오랜만에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시우가 쓰러진 이후 아멜리아는 술, 담배 이외의 먹을 것은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럴 여유도 기분도 없었다.
식당의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10명은 족히 먹을 수 있을 만찬으로 가득했다.
끓는 기름을 계속 끼얹어 껍질을 바싹하게 튀긴 새끼돼지 통구이를 메인으로 여러 가지 요리가 호화롭게 차려졌다.
시우와 함께하는 식사는 더욱 오랜만이고 또 기쁘지만 아멜리아는 마냥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깨어나자마자 시우가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그 미묘한 거리감과 두려움.
완전히 기억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본능적으로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느낄 정도로 아멜리아는 그의 무의식 속에 좋지 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따끔따끔 마음을 찌르는 한편.
그와는 별개로 아멜리아에겐 시우에게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 줄 의무가 있었다.
“아멜리아 님 말씀대로라면 제가 원래 28살이고, 사고를 당해 회복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어려지게 된 거라는 말씀이신 거죠?”
키가 맞지 않아 방석을 몇 겹이나 추가로 깐 의자에 앉은 시우는 아멜리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에는 아멜리아가 손수 해준 냅킨이 매어져 있었다.
허무맹랑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보아서는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다.
사실 아멜리아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자신의 의문에 섣부르게 아멜리아를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아멜리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죄송하지만 기억이 좀... 뭐랄까, 헝클어진 기분이라.”
“달리해야 할 일은 없어요. 몸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그냥 이곳에서 지내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저는 아멜리아 님의 노예인데...”
주눅이 잔뜩 든 표정을 보고 아멜리아는 물을 마시는 척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모르는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까지 몰아붙인 장본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니 더는 마주할 수가 없었다.
“노예... 아니에요.”
“네?”
“시우가 누워있는 동안 노예 증서를 파기했어요.”
시우가 아멜리아에게 화냈던 날, 울분에 찬 그가 뱉던 말을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었다.
그가 가장 진저리치며 원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자유.
그걸 기억하는 아멜리아는 그가 쓰러진 지 한 달이 되던 날 시청에서 수속을 밟아 그의 노예 증서를 파기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시우는 얼떨떨해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반응을 본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한참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성숙했다.
다른 대부분은 어렸을 적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상황 판단이나 주위를 고려하는 능력이 도저히 아이의 것 같지 않다.
오랜 기억을 뒤적이자면 저맘때의 아멜리아는 철부지 어린애 자체였는데 말이다.
-달그락 달그락
그 이후로는 서로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식기가 부딪치는 어색한 소리가 식탁 위를 채울 뿐.
시우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그의 기억이 전부 돌아오고 나서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의 시우는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니까.
“잘 먹었습니다.”
시우는 아멜리아가 식기를 내려놓자마자 돼지고기를 느릿하게 썰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가 말한다.
“부족하다면 더 들어도 좋아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반응을 보아하니 아멜리아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먹는 시늉을 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그런 그의 행동을 당연하다고 여겼었는데.
시우가 시도 때도 없이 눈치를 보는 것이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까?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2층으로 향한다.
언제나 나란히 걸을 때는 그의 머리가 훨씬 높게 있었는데.
이렇게 작고 귀엽게 변해버린 시우를 보자 몹시 어색했다.
“그럼, 푹 쉬도록 해요. 불편한 일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네, 아멜리아 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이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중앙 계단의 갈림길에 선 시우가 갑자기 아멜리아를 붙잡았다.
“저, 아멜리아 님.”
설마 그가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살짝 당황한 아멜리아.
“듣고 있어요.”
시우는 잠깐 우물쭈물하더니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사실, 저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괜찮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무슨... 말이죠?”
“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사과하셨잖아요. 물론 제가 그게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용서해 드릴래요.”
“..........”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아멜리아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
애매한 아멜리아의 반응이 시우에게는 어떻게 비쳤던 것일까?
시우는 사색이 되어 황급하게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제도 모르고 이런 말씀드려서...”
“아니아니아니에요...!”
아멜리아는 허둥지둥거리며 시우를 다독였다.
그가 안심할 때까지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건넨 아멜리아는 시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방 안에 들었다.
‘저는 용서해 드릴래요.’
용서라.
바라마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알고 있었다.
케테르 공작의 말대로라면 시우의 몸은 머지않아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고, 헝클어진 상태인 그의 기억 또한 차차 회복될 것이다.
지금 아멜리아가 시우에게 받은 것은 빈 껍데기 같은 용서였다.
아멜리아 그에게 했던 짓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녀를 두려워하되 미워하지 않은 소년 신시우가 건넨 용서이니.
“....용서....”
그것뿐인데도 너무나 구원을 받은 느낌이 들어서 아멜리아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바보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진열대에 놓인 럼을 꺼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다 시우를 떠올렸다.
간접흡연이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다.
마녀에게 흡연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시우는 인간이다.
하물며 연약한 어린아이의 몸이야 이루말 할 것도 없다.
아멜리아는 조용히 담배를 부러뜨리고 온더록스 잔에 술을 따랐다.
오늘도 어쩐지 생각이 많은 밤이 될 것 같았다.
2.
밤은 깊었지만 역시나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책을 펼쳤다 접었다, 공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침대 위에 누웠다 굴렀다를 반복하던 아멜리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났다.
불과 십몇 미터만 걸어가면 시우의 방이 나온다.
사실 시우는 여전히 아멜리아를 불편해하는 듯하니 그를 배려한다면 굳이 찾아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정확한 판단력과 기억력을 되찾을 때까지 말이다.
“...잘 자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시우는 갓 회복한 상태가 아닌가?
급작스러운 회복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상 계속 지켜보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케테르 공작이 그런 기본적인 실수를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멜리아는 꾸역꾸역 자신을 납득시킨 채 시우의 방으로 향했다.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이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은 복잡한 마음이 가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혹여 문을 여는 소리가 그를 깨우지 않도록 아멜리아는 숨죽인 채 방안에 들어섰다.
“.........!”
그를 배려하는 아멜리아의 마음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 것 같다.
아멜리아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침대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있던 시우가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자면서 몸을 뒤척였다기엔 타이밍도 공교롭고 무엇보다 동작이 너무 컸다.
아멜리아는 방 한쪽의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침대 옆.
항상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던 의자에 앉자 조심스럽게 이불이 내려갔다.
“아...아멜리아 님, 죄송해요. 일찍 자야 하는 거 알고 있는데... 아, 이건 아멜리아 님이 하셨던 말씀이 아니었던가요?”
뭔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눈을 이리저리 피하며 횡설수설하고 있는 시우.
정작 미안한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은 이쪽인데 말이다.
“괜찮아요, 언제 자도 상관없어요. 늦게 일어나는 것도요.”
“죄... 죄송해요...”
아멜리아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겁을 먹지 않게끔 조금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말을 이었다.
“불편한 게 있어서 잠을 못 자고 있는 건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따뜻한 우유라도 가져다줄까요?”
“아, 아니에요. 그냥...”
한참을 고민하던 시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찌보면 굉장히 쑥스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조금... 무서, 워서요.”
“아.”
그렇구나.
아멜리아는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가 시우라는 생각에 매몰되어 또 나이에 비해 굉장히 어른스러운 모습에 간과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그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이다.
아멜리아 역시 어렸을 적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만 보고도 화들짝 놀라 잠을 설쳤다.
열려있는 장롱문이 있으면 꼭꼭 닫고 잤고, 침대 밑에 괴물이 있을까 봐 그 안에 괴물이 눕지 못하게 빼곡하게 물건을 채워놓곤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면 그걸로 모자라 스승님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럴 때면 스승님은 아멜리아가 잠이 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주시거나, 자장가를 불러주시거나, 혹은 같이 누워 아멜리아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수다를 떨어주었다.
어린아이란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다.
그제야 아멜리아는 케테르 공작이 했던 ‘돌보는데 손이 많이 갈 거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같이 잘까요?”
오랜만에 멍하니 스승님과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자니 입에서 생각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기에는 뭐하지만 막상 입에 담고 보니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그런 말이.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이어 당연하다는 듯이 시우의 사양이 돌아왔다.
하긴 그토록 안 좋은 감정을 느끼고 두려워하는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지.
살짝 낙심한 아멜리아가 살며시 실망할 무렵.
다시 시우가 말한다.
“저기... 아멜리아 님...”
“네, 말하세요.”
“그럼, 오늘만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부끄러운 듯 부탁하는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멜리아는 어째서 스승님이 철없고 까불거리던 자신에게 그렇게나 당신의 사랑을 쏟아 주셨는지 알 것 같았다.
본능에 내재한 모성애를 일깨우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곳이 편한가요? 아니면 제 방으로 오고 싶나요?”
다정히.
행여 그가 무서워하지 않게 조심스레 그의 이마를 쓸었다.
처음에는 낯선 친절이라도 겪은 것처럼 당황하던 시우는 자신감이 붙었는지 처음으로 제법 또렷이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저기에 있는 그림이 어쩐지 너무 으시시해서. 방을 옮기고 싶어요.”
그렇게 그가 가리킨 곳에는 그가 그리던 나무 모양의 마법식이 그려져 있었다.
확실히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보니 어쩐지 으스스하긴 하다.
“좋아요.”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우는 이불을 쓱 걷고 나와 슬리퍼를 신었다.
어떻게 그녀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정쩡한 차려자세로 바로 선다.
“아.”
아멜리아는 손을 뻗어 뒤척이느라 흐트러졌던 그의 안대를 다시 매어주던 중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깐만 안대를 풀어도 괜찮을까요?”
“아, 네. 아멜리아 님.”
안대를 풀자 그의 왼눈이 보인다.
움직이지도 않고, 조금만 자세히 보아도 아무런 생기가 없다.
의안이었다.
케테르 공작이 그의 시간을 되돌렸고, 그는 어린아이가 되었음에도 에아에게 상처를 입었던 왼쪽 눈만큼은 고쳐지지 않았다.
안대를 든 아멜리아가 한참이나 서 있자 시우가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왜, 왜 그러세요?”
당장 시우가 뭘 알 리는 없지.
아멜리아는 선선히 고개를 젓고 다시 안대를 채워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케테르 공작의 설명을 더 들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멜리아는 시우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