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1.
시우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새로 얻은 지식과 힘.
그것들을 낱낱이 분해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은 그 어떤 놀이나 유흥보다도 재미있다.
뇌혈관이 끊어질 듯한 두통과 통점이 존재할 리 없는 왼쪽 의안에서 느껴지는 환통까지 싸그리 잊게 해줄 정도로.
-출렁
한참이나 자신만의 세계에서 몰입하던 시우는 고개를 들었다.
사위를 흔드는 공간이 뒤틀리는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라티푼디움의 거대한 고목은 간데없었다.
대기 중의 농후한 마력으로 인해 자연 발생하는 마력반사광도 카펫처럼 땅을 뒤덮던 이끼도 없다.
대신 깔끔하게 닦인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회당같은 공간은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내리쬐는 빛으로 별다른 조명이 없어도 경건하고 엄숙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우는 그 한 가운데에서 안락한 소파에 앉아있는 채이다.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와 함께 그의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디.
시우는 느릿하게 시선을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흐리게 뭉개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형형색색의 빛깔을 찍어 바른 듯이 주위에 흩어져 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는 눈앞의 인물에게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그가 만지고 뜯어보던 프랙탈 나무와 아주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가 마녀의 앞에 섰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잡고 체취를 맡기 시작한다.
“킁킁.”
“재밌구나.”
쿡쿡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하얀 손이 뻗어져 시우의 턱밑을 받쳐 들었다.
마치 강아지를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시우는 보드라운 손의 향기에 취한 듯이 그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이 여자의 몸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이 여자의 몸 안에 있는 지식은 얼마나 흥미로울까?
본능이 외치고 있다.
지금껏 먹어왔던 마법들은 이 마녀의 것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는 것이었다고.
전에 없는 흥분으로 눈에 핏발을 섰다.
손목을 움켜쥐고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여의 몸도 범하려 드는겐가?”
좀 전에도 느꼈지만 그를 보자면 마치 발정 난 짐승을 보는 것만 같다.
케테르는 오늘 하루 일어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한 추방자와 전투를 벌이는 시우의 모습과 이후 그녀를 범하며 마법을 빼 오는 모습까지 말이다.
기나긴 세월이 주는 권태와 단조로움을 잠시간 가시게 해주었던 재미난 광경이었다.
처음 보는 마법의 활용방식에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하면 거짓이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제 몸을 축내는 방식이었다.
일개 인간의 육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장애에 가까운 재능.
연약한 뇌를 학대에 가깝게 몰아붙이는 무식한 오버클록이란 의미였다.
아마 이 상태 그대로라면 3년도 넘지 않아 수명을 다해 죽겠지.
시우의 손이 케테르의 허리를 휘감기 직전 그녀의 손가락이 시우의 이마를 콕 찔렀다.
그와 동시에 시우의 몸이 우뚝 굳는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차피 세상의 만물은 태어났다 찰나의 순간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
변변한 접점도 없는 인간 남자에게 연민을 느꼈을 리는 없다.
그와 메리골드 남작에게 호의를 베푸는 까닭은 둘 모두에게 나름의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점도 있지만 사실 절반 이상은 소소한 여흥에 가까웠다.
지루할 만큼 반복되는 역사와 사건 속에서 ‘처음 보는 것’이라는 건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대의 존재가 과연 참신함을 표방한 진부한 반복의 전초일지, 아니면 진실로 새로운 일을 보여줄 단초인진... 기대하겠네.”
케테르 공작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지는 것처럼 그녀의 등 뒤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커다란 나무는 시우가 밤새 벽에 그리던 프랙탈과 닮아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듯 일렁이던 나무가 시우의 몸을 감싸자 이내 찬연한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2.
케테르 공작은 현재 시우의 상태에 대해 적당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사고로 개화한 그의 초월적인 능력은 결국엔 수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고.
뇌에 가해지는 과부하가 머지않아 그의 생명을 앗아가리라는 것도.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아멜리아는 그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지의 여부를 고려하지 않았다.
[응하겠어요]
예상했다는 듯 매끄럽게 종이 위를 수놓는 케테르 공작의 글씨.
[역시 그런가?]
답신하지 않자 문장이 이어졌다.
[여가 공에게 원하는 것은 한 가지 훗날 소박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네]
그녀의 부탁이 소박하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유일한 동아줄인 그녀에게 이러니저러니 따지고들 생각은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원래의 상태로 돌이킬 방법이다.
엇나간 것들 이해관계가 꼬인 것들을 포함한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다르다.
사라진 자는 되돌아오지 못한다.
[어떤 방식으로 치료를 할 건지 알고 싶어요]
[그의 시간을 되돌릴 거네]
아멜리아는 일순 멍해졌다.
시간을 되돌린다.
들어본 적도 없는 마법.
케테르 공작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까지 가능할 것일까?
그건 마법의 영역이라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기적’에 맞닿아 있었다.
[완벽하게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세.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기 전으로 되돌려줄 뿐이지. 한동안은 기억이 매끄럽지 않을걸세. 혼동도 있을거고 돌보는데도 손이 많이 갈 거야]
[정확한 의미를...]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케테르 공작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일방적으로 말을 끊었다.
[자세한 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빠르겠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인간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네. 고생은 좀 하겠으나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장담하지. 또 누가 알겠나? 자네가 그의 모습을 좋아할지도]
영문모를 마지막 말을 끝으로 편지지가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그 이상 치유하겠다든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사실 이것도 설명보다는 통보쪽에 가깝다.
조각조각 찢어진 편지지가 그녀의 책상 위로 일정한 문양을 그렸다.
아멜리아가 보기엔 마법식도 무엇도 아닌 그 문양이 반짝 빛나고 사라지더니 대신 조그마한 유리병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하얀 우유 같은 액체가 들어있었고 병 입구에 태그가 달려있었다.
[하루에 다섯 방울씩 먹이시오.] 같은 조잡한 태그가 말이다.
멍한 기분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케테르 공작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쓰면서도 설마 답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답신은 물론 치료를 해주겠다는 확답까지 받다니.
설마 막막한 마음이 너무 커져 환각이라도 마주한 것일까?
차라리 이런 생각이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질 정도이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아니,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던 아멜리아.
시선을 다시 내려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팔랑
태그가 뒤집히며 그 뒷면에 있는 글귀가 드러났다.
[그의 방으로 가보게나]
더 깊은 생각을 할 것도 없었다.
아멜리아는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치타와 같았다.
3.
저택 문을 부슬 듯이 열고 계단을 오른다.
케테르 공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그녀야말로 ‘창조의 마녀’의 경지에 가장 가까운 마녀이며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손쉽게 해낸다는 것만을 믿을 뿐이다.
설마 그 짧은 시간에 치유를 끝낸 것일까?
이제 다시 예전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인가?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던 아멜리아는 시우 방의 문고리를 잡자마자 얼어붙었다.
두렵다.
그를 보고 싶은 만큼이나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과연 어떤 말을 할지, 이후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그 어떤 확답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사태의 진전은 아멜리아에게 쫓아갈 수 없는 속도감을 부여했다.
“후우....하...후우...”
아멜리아는 심호흡을 했다.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와 옷을 정돈하고 조용히 문을 비틀어 연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마법식이 적혀있는 벽.
언제든지 빠르게 용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빼놓은 침대.
그 위에는 이불을 덮고 있는 시우가 있었다.
아멜리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침대 옆에 바짝 섰다.
그리고 조금 위화감을 느낀다.
이불을 덮고 있는 그의 몸이 이렇게나 작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안함에 떨린 아멜리아의 손이 천천히 이불을 걷자 나타나는 것은...
“아....?”
깜찍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멍하니 입을 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멜리아.
시우는 건강한 28살의 청년이다.
그러나 지금 침상에 옆으로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사람은 10살이나 될까 말까 한 작은 아이였다.
그러나 함께한 시간이 5년이다.
콧대를 보아도, 안대 반대편의 눈매를 보아도, 입가를 보아도, 어디를 보아도.
조금만 조목조목 뜯어보면 이 소년이 시우라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 어린 시절의 시우였지만.
‘시간을 되감는다’라는 말을 들어 상처를 입기 전까지 되돌렸겠거니 싶었는데.
이건 너무 많이 되돌리지 않았는가?
“우...우웅....”
어안이 벙벙해진 아멜리아의 앞에 소년 시우가 몸을 뒤척인다.
이불이 사라진 것이 불만인 듯 찡그린 미간.
하늘색 땡땡이 문양이 박힌 파자마를 입고 있는 시우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멜리아를 보자마자 우뚝 굳는다.
두려움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거리감을 느끼는 표정까지.
여지없이 시우와 쏙 빼닮았다.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던 눈동자에 총명한 빛이 서려 있다.
어떤 일에도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확연한 감정의 색을 띤다.
아멜리아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돌아왔다.
시우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시우...”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시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한 뺨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깨어났네요.”
“네....”
목소리마저 앳되었다.
변성기가 오기는커녕 소녀의 목소리와도 구별이 안 될 것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요?”
부담스러운 듯이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아멜리아의 손과 지나치게 가까운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힐끗거리던 시우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멜리아... 님이요.”
아멜리아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이러면 안 된다.
그에게 했던 잘못들을 고백하되 용서를 강요하기 위한 신파극 따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시우를 덥석 껴안았다.
그동안 하고 싶던 말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번엔 실수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정리했는데도 간추리지 못한 말들이 있었는데.
온갖 단어와 낱말들이 목구멍에서 얽히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도 제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아멜리아는 간신히 한 마디의 속죄를 꺼냈다.
“미안... 미안해요...”
눈물로 눈이 흐려진다.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던, 떠나갈 것 같아 두려웠던 그를 부서질 듯 껴안으며.
그의 존재를 확인하며 아멜리아는 그저 흐느꼈다.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자꾸 미소가 지어진다.
이렇게 슬프고, 기쁘고, 죄스러운데도.
눈물이 이렇게나 흐르는데도 미소가 서렸다.
“고마워요... 돌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한동안 아멜리아의 품에 꼭 안겨있던 시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아멜리아의 가슴에 검은 줄을 남기는 말이었다.
“아멜리아 님, 혹시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까...요?”
시우는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겁에 질린 듯이 그리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