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1.
“읏...흐읏...읏...”
에아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짐승과 진배없이 땅바닥에서 구르고 힘으로 찍어 눌려 강제로 겁탈당한 그녀의 몸은 발간 손자국과 흙더미, 말라비틀어진 이끼가 달라붙어 있었다.
비틀거리며 땅을 딛고 선 두 다리 사이로는 하염없이 정액이 흘러내린다.
두 시간 내내 거칠게 범해진 에아의 엉덩이가 움찔거릴 때마다 펌프질하듯이 뚝뚝 하얀 아기씨를 떨어뜨렸다.
그는 거듭거듭 에아의 마법을 뺏어갔다.
처음과 비교하면 낙인에 새겨진 마법을 끌어오는 힘이 약했기 때문인지 처녀의 베틀을 빼앗을 때만큼 손쉽게 빼앗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에아는 하나의 마법식을 더 빼앗겼다.
과거 티페레트 공작의 견습마녀를 사냥했을 때 얻었던 '그릇'을.
“하암....”
시우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에아를 본채 만채 하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허공에 손을 휘적이며 자신이 얻은 전리품을 확인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호화로운 전리품이기에 이것 외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또... 또 위계가...”
13 위계.
낙인으로 빼곡했던 하복부가 훤하다.
고작 두 시간 만에 백년은 족히 필사적으로 사냥해야 올릴까 말까 한 위계가 내려가 버렸다.
자율방어도 작동하지 않는 반푼이 마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에아는 이를 꽉 물고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는 시우를 노려보았다.
“죽여버리겠어.”
이곳은 마력수 투성이다.
흡수한 마력을 자기화하는 시간은 부족하지만 마력회로에 손상이 갈 리스크를 조금만 감수한다면 제2라운드를 열 수 있다.
콧잔등을 잔뜩 찌푸린 채 분한 듯이 시우를 노려보던 에아는 등을 휙 돌렸다.
이미 감정을 앞세웠다 낭패를 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온몸의 본능이, 직감이, 여태껏 쌓아온 전투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어떤 준비를 해오건 이 싸움은 ‘반드시 진다’라고.
“크윽....! 기다리고 있어! 이 수모를 백배 천배, 아니 억배로 갚아줄 테니까!”
패배자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시우를 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에아.
시끄러운 소리에 시우의 시선이 얼핏 에아를 향한다.
“윽...!”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마법 전투에서 압도하던 그의 모습.
무자비하게 강간하던 그의 모습.
그 이후 소중한 마법을 뜯어가던 그의 모습.
시선이 슬쩍 스치는 것만으로 뼛속까지 때려박아진 두려움이 번진다.
이 에아가.
에아 사달멜리크가 고작 남자 인간에게 공포를 느끼다니.
강간을 당한 것보다도 그것이 더 굴욕적이었다.
“두...두고 보라고!”
에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새로 시우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결계분리기가 만들어낸 틈새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좁아진 틈새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잔잔한 라티푼디움의 풍경을 비추었다.
남은 것은 바위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긴 시우뿐이었다.
2.
연구동으로 짐을 가져와 연구를 계속하던 아멜리아는 가슴 한 켠을 무겁게 짓누르는 납덩이를 느꼈다.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담배를 피워도 계속 머릿속에 빙빙 맴도는 후회, 그리고 슬픔.
이 슬픔도 괴로움도 언젠가는 무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에도 그랬듯 시간은 거짓말처럼 상실의 흔적을 지워낼 것이다.
언젠가 잊어버릴 것이고, 언젠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겠지.
그런 허무한 위안과는 별개로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도 한 가지 장면만을 거듭 그려내고 있었다.
“개같은...년...”
깨어나자마자 아멜리아에게 독한 한마디를 던졌던 시우를.
그때의 시우는 무엇인가를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뇌는 오로지 마법만을 위해 동작했으며 다른 감정적인 영역들은 모두 가장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미웠으면.
얼마나 싫고, 증오스러웠다면 그런 상태에서도 욕설을 내뱉었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아멜리아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아주 가늘게 늘어져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다.
“.........”
그떄 아멜리아는 말했다.
당신이 날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그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하지만 그게 정말 맞는 일일까?
언젠가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는 시우에게,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매달리고 애원해서 사과를 받게 만드는 것은 옳은 일일까?
사실 아멜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다.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며 사죄의 말을 구하는 사람의 앞에서 쓴소리할 매정한 인물이 못 된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은 그런 시우의 성정까지 고려해 이뤄진 것은 아닐까?
그의 물렁함과 다정함에 기대어 죄악감의 몸부림치는 자신을 구제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이기적이고도 비겁한 처사이다.
또 한 번 그에게 원치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아멜리아의 소망이다.
그와 함께 현세에 가고 싶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아멜리아의 소망이다.
그를 향한 연모의 감정을 전하고 싶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아멜리아만의 소망이다.
거기에 시우의 의사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토록 후회한다고 눈물을 흘려놓고 다시 한번 비슷한 짓을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역겨워요...”
허황된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시우는 언제 상태를 회복할지 모르는 채였으니까.
자조에 자조에 자조는 꼬리를 물었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아멜리아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습관처럼 한숨을 쉬려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멜리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당분간은 그 어떤 손님도 받지 않겠다고 일러두었을 터인데.
“교...교수 님!”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행정을 도맡는 ‘캐서린’ 연구원이었다.
“무슨 일이죠?”
평상시라면 불쾌해했을 아멜리아지만 지금은 그럴 힘조차 없다.
우울한 목소리로 답하고 그녀를 바라본 아멜리아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했다.
캐서린은 메리골드 남작을 흠모해 흉내내기로 유명한 마녀였다.
변변찮은 형편에도 아멜리아의 옷과 비슷한 드레스를 따라 입었고, 향수를 뿌리는 로테이션도 메리골드와 비슷했다.
차갑고 도도한 언행, 그리고 어설픈 독설을 따라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컨셉도 잃어버린 채 부리나케 달려올 정도라면 평범한 일은 아니겠지.
“다...다...다...다...답장이....”
“천천히 알기 쉽게 설명하세요.”
덩달아 다급해진 아멜리아의 손 위로 새하얀 편지 봉투 하나가 쥐어졌다.
아멜리아의 손바닥 크기의 깨끗한 편지 봉투.
다른 사람이 열지 못하도록 밀봉되어있는 실링 왁스에는 인장이 찍혀있었다.
왕관 무늬의 인장.
발작이 일어난 천식 환자처럼 컥컥거리던 캐서린이 겨우겨우 커다란 목소리로 보고한다.
“상아탑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이 서신은 케테르 공작에게서 온 것이었다.
3.
마녀들에게 묻길, 게헨나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건물을 고르라면 의견이 분분히 나뉜다.
베르사유 궁전을 연상시키는 배움의 터전 ‘트리니티 아카데미’다.
로마의 공동욕장을 더욱 세련된 형태로 재현한 ‘레바나 대욕장’이다.
일 년 내내 사계절을 즐기며 만개한 꽃을 구경할 수 있는 ‘첫 번째 붉은 지붕 살롱’이다.
미적 감각이 탁월하기로 소문난 티페레트 공작의 ‘공중정원’이다.
등등 제각기 취향에 따라 여러가지 건물의 이름을 댈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로 아름다운 건물을 뽑으라면 모든 마녀는 주저 없이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상아탑을 입에 올릴 것이다.
설계부터 건축까지 케테르 공작이 홀로 완공했다고 전해지는 상아탑은 특수 연금으로 만들어낸 대리석과 스테인드글라스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을 수식할 수 있는 설명은 이게 고작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그럴듯한 말로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아탑은 어떤 시대의 건축 양식도 따르지 않았다.
전례 없는, 초유의 건축양식은 정확한 계산에 따른 완벽한 황금비에 따라 건축되어 일말의 흠결도 찾을 수 없게 지어졌다.
평가와 비교가 아닌 감상과 감탄을 위해 존재하는 건물.
마찬가지로 그 아름다운 탑에 홀로 기거하는 케테르 공작 역시 평가의 대상도, 하물며 비교의 대상도 아니었다.
모든 마녀가 우러러보며 경외하길 마지않는 존재.
지금껏 단 한 번의 낙인 계승을 이루지 않고 홀로 30 위계라는 경지에 도달한 최고(最高)이자, 최고(最古)의 마녀.
상아탑에 은거하는 그녀가 어디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은지 벌써 8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상아탑 주변에는 여전히 그녀의 가르침을 구하는 마녀로 득실거렸다.
직접 찾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게헨나에 오가는 서신 중 2할가량이 상아탑으로 모인다고 한다.
물론 케테르 공작의 답신을 받았다는 소식 따위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멜리아 역시 케테르 공작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으며 그녀에게 보낸 서신만 해도 70통이 넘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으니 말이다.
캐서린은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그녀를 내보냈다.
지당한 호기심이라 할지라도 아멜리아가 그것을 책임져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은으로 된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 조심스럽게 인장을 떼어냈다.
봉투 안에 반으로 곱게 접혀 있는 편지지를 펼치자 흰 종이가 보였다.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빈 편지였다.
게헨나의 편지는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오가는 것이 아니다.
이건 마법적으로 연동된 두 장의 종이를 이용해 한쪽에서 글자를 쓰면 다른 한쪽에도 떠오르며 팩스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원격편지’였다.
온갖 은밀한 베일에 꽁꽁 감싸인 케테르 공작은 신비주의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정작 그녀에게 온 답신은 투박한 형태의 마법인지라 새삼스럽다.
아멜리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펜을 들고 조금 기다리자 편지 위로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간 강녕하셨나?]
첫 만남부터 마치 알고 있던 사이인 양 자연스러운 하대로 쓰여지는 필기체.
전문 필사가라도 되는 것처럼 무척 유려하고 고아한 글씨였다.
[실언일세. 그대의 편지는 하나하나 읽어 보았으니, 수심이 깊으리라 생각하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던 아멜리아는 편지를 읽어보았다는 케테르 공작의 말에 재빨리 답신을 써 내렸다.
[제 간청을 들어주시기 위해 답신하신 건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답하겠네. 여(余)의 재간이라면 그대의 정인을 능히 치유하고도 남음이야]
아멜리아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까마득했던 어둠 속에서 헤매다 드디어 광명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가슴 속에서 떠오른 한 가지 의혹으로 다시 곤두박질친다.
이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비록 아멜리아가 보기에 비정상인 지금의 상태가, 도리어 그에게는 새로이 찾게 된 행복이 아닐까?
그가 새로이 얻은 마법적 힘을 빼앗는 것은 과연 누가 원하는 것인가.
아멜리아는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잠깐의 망설임 사이 새로운 글자가 떠오른다.
[오늘 정오, 여의 정원에 들어선 그의 용태를 살피었네]
[그런 자질과 능력을 잃게 하는 것은 응당 마녀라면 아쉬운 마음을 가질 법하지]
직접 용태를 살폈다고?
아멜리아가 의아해할 무렵 그녀의 결심을 굳히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허나 이대로라면 그는 죽네. 예로부터 육신을 혹사하는 지나친 재능은 단명을 불러오는 법이야]
더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는 건가요?]
하루에도 수백 통씩 편지를 받으면서도 무시하는 케테르 공작이 일면식도 없는 아멜리아가 안쓰러워 조력해주었을 리 없다.
이건 케테르 공작으로부터의 거래 제안이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니 좋군]
마침표를 찍으며 끝나는 글귀를 보고 아멜리아는 틀림없이 이 종이 뒤의 케테르 공작이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