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1.
약속된 3일이 지났다.
예빈은 퀭한 눈빛으로 아멜리아와 독대했다.
밤낮을 거듭 고민하며 우회로를 찾아봤지만 더는 수가 없다는 것이 결론.
이 이상 시우의 수술을 미루는 것도 힘들 것 같고, 시술을 수행하기 이전 보호자이자 연인(으로 추정되는)인 아멜리아의 허가를 받기 위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상태는 매우 양호해요.”
중대한 사실을 말하기에 앞서 최근 시우의 검사 결과를 쫘르륵 읊어준 예빈.
그러나 아멜리아의 공허한 눈동자는 예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점 없이 멍때리고 있다는 말이다.
“남작님....?”
“아, 미안해요. 뭐라고 했죠?”
“아, 다시 말씀드릴게요.”
앵무새처럼 아까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읊는 예빈은 의아함을 느꼈다.
시우에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꼬박꼬박 경청하던 아멜리아였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평소에 예빈을 붙잡고 물어오진 않았지만, 반대로 말을 걸 낌새가 보인다 싶으면 저 멀리서도 쪼르르 달려왔으니 말이다.
정말 황송한 표현이지만 참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런 아멜리아가 시우의 최종 수술에 앞서 경과보고를 하는데도 딴생각을 하다니.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던 걸까?
예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어차피 캐물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이후에 전해야 할 말의 중압감 덕에 잡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군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스미르나. 당신의 노고는 잊지 않고 보답할 거예요.”
“네, 네, 아뇹! 저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니 보람차고 좋았어요. 그런데 향후 그... 시우 씨의 마지막 시술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는데요...”
예빈은 쓱 아멜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아리송한 하늘빛 눈동자가 어서 말하라는 듯이 예빈을 재촉한다.
“이번엔 제대로 듣고 있어요.”
“아, 네... 그...”
아멜리아는 전혀 재촉하지 않았지만 어째 점점 할 말이 궁해진 예빈.
그녀는 눈을 딱 감고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완벽한 회복을 위해서는 뇌를 재생시키는 것뿐 아니라 별개의 치료가 필요해요.”
“네, 일전에 설명했잖아요.”
왜 굳이 다시 그런 걸 묻느냐는 아멜리아의 대답에 더듬더듬 말을 잇는 예빈.
“저희가... 하려는 게... 일종의 엔트로피를 되돌리는 일이잖아요? 불탄 종이를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것처럼요.... 엄, 그런데 그걸 위해서는 일종의 의식이 필요해요...”
“어떤 의식인가요?”
“저, 저도 이렇게까지 상세한 수복을 시도해 본 것은 처음이라... 하지만 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게 말이죠....”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도 좋아요.”
이걸 어떻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말하라는 건지.
아멜리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저런 온화한 대응이 가능한 거겠지.
“수복을 향한 ‘지표’가 필요해요.”
“그래서요?”
복잡하고 정교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테두리가 필요한 것처럼 시우의 원래 상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그 지표를 수집하는 방법론에 대한 것인데요.
그게 두 가지로 나뉘어요. 하나는... 지금 이 상태로 의식을 일깨워서 ‘기억 역행’이라는 마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상대방의 심상과 융화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살아왔는지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재건하는 거죠.
무, 물론! 기억을 남김없이 엿보는 거니 사생활 침해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요.”
“..........”
허가도 받지 않고 그의 모든 기억을 읽게 한다라.
꺼림칙하다.
“그런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 문제가 있어요.”
“뭔가요?”
“이건 술자와 피술자의 의식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피술자의 마력 회로가 아주 커다란 방해요소에요... 따라서 기억 역행에 앞서 모든 마력 회로를 제거해야 해요.”
“그건....”
그 말은 시우가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 말을 듣자마자 아멜리아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가 차원 마법을 사용해 멋대로 벗어날 수 없게 되지 않을까?’라는 아주 이기적이고 치졸한 발상이었다.
“웃.....”
불현듯 자신의 추악함을 깨달은 아멜리아는 아연해 진 채 고개를 젓는다.
부끄러워졌다.
시우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안 돼요.”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비록 그 성취가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진행할 사안은 아니었다.
“두 번째 방법은 뭐죠?”
망설임을 털어낸 아멜리아가 묻자 예빈은 좀 전보다 훨씬 머뭇거렸다.
힐끗힐끗 아멜리아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이 방법이 정말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예빈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도의적으로 말이다.
“성교, 에요.”
“........?”
“성교를 하는 이유는, 가장 본능적인 생리작용 중 하나인 성욕을 자극해 잠들어있는 변연계를 활성화하는 게 첫 번째에요. 아마도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면 회복 이후 후유증으로 예상되는 감정소실 현상도 많이 완화될 거예요.”
예빈은 따다다다 말을 늘어놓았다.
아멜리아의 표정을 보는 것이 무섭다.
어쩔 수는 없다 해도 그녀의 남자와 성교를 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괜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남의 남자를 가로채는 헤픈 여자라고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기에 유빈은 먼저 자신의 순결함과 결백함을 밝혔다.
“그런데... 제가 사실 그, 경험이 없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앗...네...”
“..........”
아직까지 육체적인 관계는 없었다고?
예빈이 의외에 전말에 상황이 더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는 한편, 숨 막힐 듯한 어색함 속에서 먼저 운을 뗀 것은 아멜리아였다.
“그 부분은 제가 협조하도록 하겠어요.”
아멜리아는 남녀의 육체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어떤 각오와 마음이 필요한지.
문헌으로부터 익히고 있었다.
쌍둥이들에게 말을 전해 들은 이후, 시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애매한 상태이긴 했어도 그 정도의 각오는 서 있다.
“아, 아뇨.. 아뇨, 제가 끝까지 말씀을 안 드렸네요.... 그 성교를... 제가 해야 해요.”
“네....?”
“그, 제가... 시우씨와... 성교를 하면서 치유를 해야 해요. 왜냐하면, 발기와 사정의 순간 발생하는 마력의 파동에는 여러가지 정보의 파편이 포함되어 있거든요.
감정과 본능의 순간 낙인과 남성기가 맞닿은 연결 과정에서 원래 그의 정신 상태에 어울리는 신경회로의 체계를 트레이싱하고 구축해야 하는 일이라....”
그 외에도 변명으로만 들리는 예빈의 설명이 10분간이나 이어졌지만 아멜리아의 뇌는 이미 예빈의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가 다른 여자와 살을 섞는 것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사실 아멜리아가 지금까지 품어온 상식에 의하면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그를 육체적 관계의 대상으로 여긴 적도 없고, 오히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구태여 결부시키는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있던 아멜리아다.
그저 번식을 위한 육체의 결합에 불과한 행위 아닌가?
하물며 다른 이유가 아니라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는데 이렇게 충격이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죄송합니다....”
예빈은 괜히 죄송함을 느끼며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어쩔 수... 없죠...”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에 대해서, 이 기분이 정말 자신의 감정이 맞긴 한 건지.
의문을 품는 가운데 아멜리아는 하나 더 물었다.
“얼마나 걸리나요?”
“못해도 3회...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발밑의 바닥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해주세요.”
“네, 그럼... 저도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저녁 이후에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예빈은 우두커니 서 있는 아멜리아를 두고 묘하게 급한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2.
“하아... 말했다...”
몸에 힘이 쭉 빠진다.
3일 동안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끙끙거리던 것을 겨우 입에 담고 나니 후련함과 동시에 진한 탈력감이 느껴졌다.
화가 난 건가?
처음 만났을 때 격정적이던 때를 제외하면 워낙에 표정 변화가 미미한 메리골드 남작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 반응을 헤아리는 것이 어려웠다.
딱히 후환이 두려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멜리아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게헨나의 귀족들은 고약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스승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예빈은 여기 지내면서 귀빈 대우를 받았으니 말이다.
“근데 이게 맞나...”
예빈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머리카락을 꼬았다.
아무리 치료 행위를 위해서라지만 남자와 성교를 해야 한다니.
그것도 엄연히 침 바른 임자가 있는 남자랑!
“막장 드라마네...”
수험생 시절 열심히 챙겨봤던 주말 연속극이 생각났다.
온갖 막장이 다 나왔었지.
배다른 남매며, 김치 싸대기, 불치병에 걸린 여자 주인공, 대리모...
그때는 어머어머 거리면서 흥미진진하게 봤었는데 막상 자신이 이런 상황에 부닥치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는 건가 싶다.
“아으으...”
이건 엄연히 의술의 일환이며 구명 행위다.
라고 여러 번 자위를 해봤지만 예빈은 마녀로서 살아온 기간보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온 기간이 더 길었다.
당연 그맘 때 처녀들이 가지고 있을 달콤 쌉싸름한 첫 경험에 대한 환상도 있다.
언젠가 좋아하는 남자와 만나서, 썸타고, 데이트하고, 사귀고, 고백받은 다음에 한 300일쯤 됐을 때 근사한 호텔에서 뜨거운 밤.
마땅한 파트너도 없이 머나먼 타지에 틀어박혀 있느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본 적은 없지만 뭐 대충 이 정도의 어렴풋한 계획 말이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주워들은 바 신시우도 나쁜 남자는 아닌 것 같고, 얼굴도 꽤 잘생겼지만 정작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지 않은가?
사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문드문 들었다.
“어휴, 쓰레기다. 나.”
예빈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의 스승인 선대 스미르나는 연구를 위해 12명의 시민을 죽였다고 한다.
그녀는 언제나 말했다.
의학의 발전에는 언제나 희생이 존재해왔다.
현대에 존재하는 거대 제약회사들은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생체 실험을(심지어 효율도 극심히 나쁜) 합법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발전시킨 결과물로 수십, 수백 배의 사람을 살리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선대 스미르나는 내전으로 인해 황폐해진 남아프리카 일대를 돌아다니며 수천이 넘는 생명을 살려냈다.
물론 그것이 합리화에 불과하며 스승님의 구명 행위도 연구의 일환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한들 타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그 존엄성을 수단화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스승님의 과격한 사상에 따른 생체 실험 결과는 예빈이 물려받은 낙인에도 엄연히 존재했으며, 예빈은 그에 대한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살리고, 돕겠다는 다짐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첫경험이니 뭐니 운운하며 피하려 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실망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정신차리자.”
지난 사흘간 제법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깔끔하게 털어낸 예빈.
“그건 그렇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예빈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한다.
혼자 사는 건 꽤 심심한 일이다.
몇 시간씩이고 시간을 보내며 몰두할 수 있는 자위행위는 예빈의 주된 심심풀이 일과였다.
X허브 구독자인 만큼 인근 주유소 와이파이에서 영상을 내려받아 반찬거리로 삼는 것까지도 말이다.
따라서 성교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나 위기감은 딱히 없었다.
죽는 것도 아니고, 임신 걱정도 없고 기분도 좋을 건데 뭐.
하지만 아직 삽입을 통한 자위는 시도해 본 적이 없기에 본격적으로 시우와 결합하기 전에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첫 파과에서 나올 불필요한 통증은 집중에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예빈은 자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두 개를 바라보았다.
“이거면 되려나...?”
예빈은 조용히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