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1.
게헨나 바깥 세상 즉, 현세에는 어린 마녀를 노리는 정신병자 마녀가 넘쳐난다.
가뜩이나 전투에 소질이 없는 예빈은 낙인을 물려받자마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잠적하는 것을 택했다.
여태껏 누려온 문명의 혜택과 윤택한 삶을 뒷전으로 말이다.
향후 10년 간 스승님의 가르침을 흡수하며 얼마나 따분했는지.
평소처럼 지루하기 그지없는 동토(凍土) 위의 공방에서 데이터도 잡히지 않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찾아온 새 한 마리는 인간의 언어로 예빈에게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
게헨나에 환자가 있으니 와서 문진과 치료를 부탁한다.
임시로 게헨나의 통행증을 발급해주고 결과에 따라 막대한 보상과 시민권을 복권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게헨나라면 언제 못된 마녀들이 나타나 목숨을 위협할지 벌벌 떨며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막대한 연구자료와 자재들이 집결해 있다.
무엇보다 이 따분한 곳에서 벗어나 상경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기대에 부풀어 게헨나로 오기는 했는데.
처음 만난 상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금발의 여성이었다.
이쪽이 아멜리아 메리골드 남작.
태생이 고귀해 보인다고 해야하나?
까탈스러운 공주님 같은 느낌이라 절로 주눅이 들었다.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기만 하는 아멜리아가 불편했기에 예빈은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다.
“제 옷차림이 좀 그렇죠? 사실 한국에서 지낼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제가 사는 곳에는 진짜 옷다운 옷이 없거든요... 하하...”
“괜찮아요.”
“멋지게 차려입으신 남작님을 보니 시내라도 한 번 들렀다 올 걸 그랬네요.... 그래도 최대한 차려입고 온 거예요.”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그러나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진 아멜리아는 예빈의 말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아멜리아는 질문만 대충 넘길 뿐 예빈에게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고, 이내 대화를 포기한 예빈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게헨나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보더 타운에서 숙소까지 포탈을 이용해 돌아오는데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예빈의 눈은 숙소를 보자마자 휘둥그레졌다.
장엄하지만 척박한 그린란드 국립공원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아리따운 저택이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풍경은 그 자체로 예술품 같아서 감탄을 아끼기 어려웠다.
“와, 여기가 정말 집인가요?”
“숙소죠.”
“이런 건 넷X릭스에서만 봤는데. 엄청나네요....”
“넷...X릭스?”
“네, 남작님은 안 보시나요? 아 여긴 데이터가 안 잡히려나? 하긴 저도 시내 주유소까지 가서 다운로드 받고 보거든요.”
“데이터? 주유소? 다운로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 쏟아지고 눈만 껌뻑이던 아멜리아는 첫 만남부터 짐작 가던 것을 물었다.
예빈 스미르나는 게헨나가 초행이라고 했다.
추방자라는 건 말 그대로 게헨나에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쫓겨난 마녀, 그 죄의 대가는 아랫대의 마녀에까지 연좌된다.
그렇다면...
“낙인을 물려 받은 지는 얼마나 됐나요?”
그녀는 원래 추방되었던 스미르나의 후계일 것이다.
화려한 꽃병에 정신 팔려 있던 예빈은 아멜리아의 물음에 답했다.
“10년 정도 됐어요.”
아차 싶은 심정.
시우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마녀 일동은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 성급하게 초대를 진행했다.
낙인을 물려받은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마녀가 오는 것은 예정에 없었다.
보통 낙인의 지식을 완벽하게 계승 받는데 평균적으로 10년의 세월이 걸리니, 말하자면 막 면허의 잉크가 말라가는 의사를 초빙한 셈이다.
“스승님께 낙인을 물려받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의대를 다녔고요. 10년 전 낙인을 물려받은 뒤로는 다른 마녀들의 눈을 피해서 국립공원의 공방에 몸을 숨겼어요.”
아멜리아의 반응이 애매한 것을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다 여겼는지 설명을 덧붙이는 예빈.
“그렇...군요.”
“스승님께 게헨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남작님 덕분에 이렇게 오게 되네요. 그보다 이제 슬슬 환자분 용태를 살피고 싶은데... 어느 쪽인가요?”
정리하자면 원래 한국에서 의대(?)를 다니며 견습마녀 시절을 보내다가 고약한 추방자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든 모양이다.
추방자끼리 죽이는 일도 결코 적지 않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추방자라 해도 많은 경험을 쌓은 선대 스미르나 쪽이 신용이 간다.
인성이 나쁜 의사보다는 실력이 나쁜 의사가 무서운 법이니 말이다.
“따라오세요.”
“넵.”
어차피 선대가 왔다 해도 시험적으로 문진을 먼저 시켜볼 생각이었으니 밑져야 본전이다.
아멜리아는 낙담을 꾹 눌러 담은 채 예빈을 시우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간 예빈.
아멜리아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예빈이 시우에게 작은 해코지라도 하려 든다면 즉각 제지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추방자에 대한 아멜리아의 신용은 그 정도로 불신 쪽에 치달아 있었다.
“이분이군요?”
“그래요, 보시다시피 인간이죠.”
“그건 걱정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침대에는 눈에 거즈를 덧댄 남자가 누워있었다.
수척하고 창백하긴 하지만 꽤 괜찮은 외모를 지닌, 무려 동양인 남성이다!
“혹시 한국인인가요?”
“맞아요.”
예빈은 깜짝 놀랐다.
하루만에 짐을 챙겨 게헨나로 달려온 예빈은 당연히 환자가 마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발급받은 임시 시민증에 보증인란에는 무려 제머나이 백작가와 메리골드 남작가, 그리고 아베느가 남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까.
애초에 추방자에게 임시 시민권이 발급되는 것이 전례에 없는 일이기도 했고, 무려 3개의 귀족 마녀들이 살리려 애를 쓰는 인물이라면 당연히 어린 견습마녀겠거니 했다.
그랬더니 이게 웬걸?
한국인, 그것도 남자란다.
10년 만에 보는 동향 사람은 비록 혼수상태라고 해도 아릿한 향수를 자극했다.
그래도 지금은 반가움에 젖어있을 떄가 아니다.
이 환자를 완벽하게 회복시켜야 예빈의 그린란드 탈출 + 게헨나 입성도 달성될 수 있다.
“대충 상황은 전해 들었겠지만. 왼쪽 안구를 통해 극심한 뇌 손상을 입었어요. 마력이 할퀴고 간 상처가 남아있어 안구를 재생할 수도 없는 상태고요. 생체 시계를 극한으로 늦춰 상태의 악화만 막아둔 상태에요.”
“직접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예빈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빈은 꽃무늬 스웨터를 벗어 옷차림을 가볍게 했다.
안에 얇은 면티를 남긴 상태로 영창을 외워 주변의 세균과 오염요소를 완벽하게 없앴다.
“그럼, 볼게요.”
“조심해주세요.”
바짝 긴장한 채 손을 맞잡은 아멜리아.
드라마로 연애를 독학한 예빈이지만 그것만 봐도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왔다.
아마 이 남자는 메리골드 남작이 총애하는 애인 비슷한 것이겠지.
여러모로 정황상의 증거가 뚜렷했다.
아무튼 거즈를 제거하자 나타난 거칠게 난자당한 눈구멍.
엉겨 붙은 피나 고름 같은 것은 제거했기에 두개골을 뚫고 손상된 회색빛 뇌까지 훤히 보인다.
한 눈으로 봐도 심상치 않은 용태이다.
하긴 그러니 그 대단한 마녀가 많다는 게헨나에서 추방자를 초빙했겠지.
예빈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끔찍한 환부에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손끝에서 촉각을 만들어낸다.
꾸물꾸물 손끝에서 시우의 눈구덩이로 들어가는 마력의 촉각.
환자의 몸에 최소한의 영향을 끼치면서 환부를 볼 수 있는 예빈의 촉각은 그 어떤 현대기기보다 정밀함을 자랑한다.
“........”
그녀의 눈에는 앳된 마녀들이 보이는 경박함 따위가 없이 진중한 빛으로 가득했기에 아멜리아도 조금 놀랐다.
못 미더운 첫인상과는 다르게 진단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사람인 것처럼 높은 집중력을 보여준 것이다.
진단 자체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분가량 전두엽을 중심으로 전신의 상태를 살핀 예빈은 조심스레 촉각을 거두었다.
“어떤가요?”
당장에라도 예빈에게 묻고 싶었으나 행여 방해라도 될까 봐 속만 태우던 아멜리아.
진단을 끝낸 예빈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조금만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누가 있는 곳에서 검진을 해보는 건 처음이라...”
자리를 비워달라?
처음 보는 마녀가 시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급함과 불안함은 제아무리 아멜리아라도 평정심을 잃게 만들었다.
아멜리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예빈을 닦달했다.
“어떤 상태인데요?”
“정확한 맵핑이 끝나지 않아서 완전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심각해요... 전두엽 부분이 완전히 망가져서 ‘치유’로 어떻게 할 수준이 아니네요. 전신에 있는 마력회로가 쇼트되어 있어요. 신경계의 구성도 망가져 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 더 자세한 건 없나요?”
눈물은 조금도 맺히지 않았지만 톡 건드리면 금방 무너지며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불안정해 보이는 아멜리아의 모습.
예빈은 난처한 듯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예전에 스승님이 연구하시던 재생의 술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한데...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할 것 같아요. 좀 더 큰 그림을 잡아봐야....”
난감해 보이는 예빈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긴 그녀는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을 뿐이다.
3달간도 기다렸는데 잠시를 기다리지 못할까?
일단은 스미르나를 믿어보자.
촉각을 다루는 솜씨를 봐서는 어지간한 마녀들 못지 않게 능숙하고 말이다.
아멜리아는 한 걸음 물러섰다.
“재촉해서 미안해요. 방 밖에 나가 있으면 될까요?”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그와 추방자를 단둘이 방안에 두는 것은 불안하다.
시우가 이런 꼴이 된 것도, 아멜리아가 그를 두고 도망쳤기 때문이 아닌가?
전혀 연관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린 아멜리아는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멜리아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예빈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지금 시우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런 일뿐이다.
“제발.... 그를, 살려주세요...”
“이, 이러지 마세요, 남작님.”
예빈은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귀족 마녀들의 콧대가 얼마나 뾰족하고 높은지, 스승님께 잔뜩 험담을 들어왔던 예빈이다.
그중 어느 정도는 질시와 열등감이 뒤섞인 과장이라는 걸 알았어도 귀족들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지는 못했다.
사실 그녀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 신분제란 꽤 고리타분하고 불공평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남작이 일개 노예를 위해 고개를 숙일 줄이야.
갑자기 책임감이 두 배는 막중해진 기분이다.
가슴이 무거워진 예빈을 뒤로하고 방밖을 나온 아멜리아는 문에 기대어 섰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르륵 미끄러진 아멜리아는 봇물이 터지듯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막막하던 어둠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딱딱하게 굳은 예빈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읽어냈기 때문일까?
마치 그를 처음 잃을 뻔했던 날처럼 가슴이 요동친다.
이 모든 희망의 자락이 사라져버린다면.
스승님을 잃어버렸던 그 날처럼 시우 또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 버린다면.
그 상실의 고통을 또 한 번 감내할 수 있을까?
그것도 그것이 이 두 손으로 만든 죄과에 의한 것이라면 버텨낼 수 있을까.
행여 소리가 흘러 넘어가 방해가 될까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삼키던 아멜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벌써 슬퍼할 필요 없다.
좋은 생각을 하자, 기쁘고 즐거운 생각을 하자.
행여 그가 일어날 때 함께 할 일 같은 것들.
아멜리아로 인해 고통받았던 일에 관해 설명하고, 사과하자.
분명 화내겠지.
아직도 꿈속에서 종종 나오는 그때처럼 윽박지르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설령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다른 모든 것은 부가적인 문제이다.
그래도 혹시 용서해준다면 다음엔 어떻게 할까?
시우와 함께 현세로 나가자.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고향으로 함께 손을 맞잡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다음엔 확실하게 말하자.
“앞으로도 함께... 계속 있어주세요...”
라고.
예빈의 검사는 5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되었고 아멜리아는 망부석처럼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긴긴 기다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