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1.
단풍의 계절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올겨울은 대체로 눈이 많이 내릴 예정인 모양이다.
여느 때처럼 고즈넉한 아멜리아의 숙소.
이미 정원은 허벅지에 닿을 정도로 폭설이 내렸는데 눈으로 반쯤 덮인 유리창 사이로는 아직도 나풀거리며 내리는 눈송이가 보였다.
아마 밤새 꼬박 눈이 내릴 모양이다.
“후우....”
한숨.
실내인데도 입김이 나왔다.
아멜리아는 망연히 뿌연 입김을 바라보다 어깨에 둘린 숄을 정돈했다.
-똑똑
습관처럼 노크를 해보지만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아멜리아는 차가운 문고리를 비틀어 열고 방안으로 발을 들였다.
시우의 방은 벽지부터 바닥까지 빽빽하게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생명 유지를 위한 마법진이 작동 중인 것이다.
하루에도 몇 병이나 되는 상급 마력수가 이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고 있다.
선반에는 아멜리아가 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가져온 담배가 몇 보루씩이나 쌓여있고 방 한가운데의 침대에는 파리한 기색의 시우가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아흔 번의 달이 뜨고 지는 동안, 언제나의 모습 그대로.
눈구멍을 파고들었던 에아의 리본은 시우의 전두엽을 헤집어 놓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뇌간이 상하지 않아 즉사는 면했지만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저 숨만을 쉬는 혼수상태.
이마저도 아멜리아의 응급처치가 이뤄낸 성과였다.
그를 넘겨받는 순간 입자를 이용해 그의 몸에 일어나는 모든 작용을 ‘정지’ 시켰으니까.
그러나 인간의 생체 시간을 완벽하게 멈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의 몸을 뒤덮은 마법진과 방에 그려놓은 마법식으로 죽음을 최대한 지연하고는 있다지만 시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아주 느리게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시체인 것이다.
달군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아멜리아의 심장을 헤집는다.
오늘만 벌써 100번 넘게 시우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그때마다 무수한 후회가 마음에 얼룩처럼 번진다.
그날 밤.
비극이 벌어진 가을밤을 떠올린다.
그를 전속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제머나이 백작으로부터 시우를 넘기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허락했다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전했으면?
아멜리아를 질책하며 윽박지르던 시우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 남아 있었더라면?
스승님의 집으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일찍 마음을 추스르고 저택으로 돌아왔더라면?
모든 힘을 쥐어짜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더 빠르게 달려왔더라면?
결계를 보는 순간 전투의 채비를 갖추고 시우를 보호했더라면?
수없이 떠오르는 ‘만약’의 가능성.
아멜리아가 단 하나라도 실제로 행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
이미 흘러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자꾸만 지나간 일을 붙잡고 매달리게 된다.
아멜리아는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그의 옆에 앉았다.
“좀 어떤가요?”
혼잣말이나 다름없다.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일뿐더러 마법에 의해 고정된 시우의 시간과 아멜리아의 시간은 흐름이 다르다.
설령 기적적으로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시우의 귀에 들린다 해도 늘어진 테이프처럼 정체불명의 소음이 되어 닿겠지.
“저는 오늘 그냥 그랬어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에요.”
아멜리아는 정신없이 도서관과 살롱을 들락였다.
시우의 몸을 수복해내기 위한 연구나 그의 몸을 고칠 수 있는 마녀를 수소문하기 위해서이다.
그날 밤의 각성 이후 23 위계를 달성했다지만 회복 마법이란 아멜리아가 기존에 연구했던 마법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분야였다.
10 위계는 퇴보한 채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설령 수백 년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그를 되살려낼 작정이었다.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까.
“오늘도 꿈을 꿨어요. 시우가 일어나서 저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꿈이었어요.”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만 없었다면 이런 일 따위 없었을 것이라고.
마지막 보았던 그의 모습과 겹쳐지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 꿈에서 아멜리아는 더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에게 다가가 눈물을 쏟으며 미안하다고,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애원하고 껴안았다.
“슬펐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다시 시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아멜리아는 이마 위로 흐트러진 시우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올렸다.
“조금만 더 눈붙이고 있어요.”
그의 뺨에 조용히 입을 맞추고 연구를 위해 되돌아간다.
오늘 내내 그렇게 수시로 찾아와 이런저런 말을 건넸었는데도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가슴이 먹먹해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내던진 채 엉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으니.
알고 있었다.
사실 아멜리아는 시우의 앞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모든 사건에 원인을 따지면 결국 아멜리아의 업보라는 한 마디로 귀결된다는 것도.
이 모든 행위가 자위를 위한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도.
아멜리아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흐른다.
오늘로 몇 번째인지 모를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하얀 정원에는 고즈넉이 눈송이가 쌓여갔다.
2.
수업이 끝난 오딜과 오데트는 아멜리아의 숙소에 들렀다.
새로이 생겨난 일과.
일주일에 하루 있는 시우의 병문안 시간이다.
수업이 끝난 이후 함께 돌아와 아멜리아는 곧장 연구를 위해 연구동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쌍둥이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시우가 누워있는 방으로 향했다.
참고로 마법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의 절반은 제머나이 백작이 담당했다.
“조수님 안녕!”
“안녕하세요, 조수님.”
씩씩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오딜과 뒤따라 들어선 오데트.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다.
기적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오늘은 파란 수국이에요. 꽃말은 거만, 냉정, 교만이래요. 그런데 그냥 예뻐서 가져왔어요.”
“맞아, 꽃말이 뭐가 중요해?”
오데트는 탁자에 놓인 꽃병에서 시든 꽃을 꺼내고 싱싱한 생화로 교체했다.
의자를 끌고 나란히 시우의 양옆에 엉덩이를 붙이는 쌍둥이.
곤히 잠이 든 것 같은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날 밤.
시우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오딜과 오데트를 살렸다.
쌍둥이조차 모든 걸 포기하고 무릎을 꿇으려는 가운데 앞장서 독려하고 마지막까지 마녀와 맞섰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시무시한 마녀에게 당당히 도발하던 그의 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스승님을 불러 다시 돌아왔을 때.
시우의 모습은 처참 그 자체였다.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상처투성이에 죽음의 문턱에 발을 걸친 상처.
그는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쌍둥이만을 대피시킨 것이다.
본인이 도망친다는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조수님 덕분에 오늘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어요.”
오데트는 괜히 글썽이는 눈물을 훔치며 시우의 손을 꼭 잡았다.
거칠었다.
뼈만 간신히 이어져 있던 수준의 복합 골절은 전부 회복되었지만 삐뚤빼뚤한 흉터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오늘도 이번 주에 있었던 일들 말해줄게. 조수님도 하루종일 누워있으려면 심심할 것 아니야.”
일주일 내내 아멜리아의 숙소에 눌러앉아 번갈아 대성통곡을 하던 쌍둥이들도 시간이 흐르자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과 일방적으로 구원받은 목숨.
그 무력감은 쌍둥이들의 새로운 동력이 되었다.
마냥 슬픔에 젖어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그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마법을 공부 중이다.
언젠가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다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이번엔 그를 지켜낼 수 있도록.
쌍둥이는 재잘거리며 시우에게 일주일간 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번 주에 조수님이 기특해하실 만한 일이 있었어요.”
“맞아, 조수님. 우리 오늘 교수님께 칭찬받았어.”
“처음으로 첨삭 받은 부분이 10개 이하였어요.”
요즘 한참 열성인 마법 공부부터.
“좀 속상한 일도 있었어요. 수요일에는 페챠가 다람쥐를 잡아 왔는데요...”
“오데트가 먹이를 준다고 케이지를 열었다가 도망쳐버렸지 뭐야?”
“이익! 솔직히 언니의 과실도 커. 언니가 귀엽다고 호들갑 떠는 바람에 놀라서 쪼르륵 도망간 거잖아?”
“어머, 내 손 위에서는 얌전히 잘 있던데? 네 심보가 너무 고약해 보여서 도망간 거 아니야?”
일상 이야기를 꺼내며 시작된 투닥거림까지.
하지만 정작 듣는 사람이 없으니 쌍둥이의 싸움은 금방 시들해졌다.
애매한 쓴웃음을 지으며, 마찬가지로 애매한 중재안을 제시해야 할 시우가 잠잠하니 금방 울적해진 것이다.
그 우울함을 이겨내려는 듯이 오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조수님이 조금 더 솔깃한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솔깃한 얘기?”
“그거 있잖아.”
오딜은 상체를 바짝 낮추더니 시우의 베개 옆에 팔을 괴었다.
널찍한 침대 위에 슬쩍 올라가 비눗방울을 다루듯 살살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속삭인다.
“조수님... 내가 다시 만나면 얼굴에 싸게 해준다고 했지?”
달콤한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는 건 그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얼굴말고도 조수님이 싸고 싶은데에 다 싸게 해줄게. 사실 우리가 요즘에 연습 중인 게 있거든.”
오딜의 적극적인 어프로치를 보고 오데트 역시 같은 자세로 시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두근두근한 심장이 울린다.
오데트는 힐끔힐끔 방문 쪽을 보았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런 꼴로 시우와 밀착해 있는 것을 아멜리아가 보게 되면 다음 수업에 과제 폭탄을 주기 때문이다.
“마, 맞아요! 저희가 뭘 연습 중이냐면요....”
오딜처럼 시우의 귓가에 바짝 달라붙은 오데트.
“...아가방에 마력이 스며들지 않도록 얇은 막을 만드는 거예요.”
플라즈마를 가두는 토카막처럼 얇은 마력의 파장을 펼쳐 남성기에서 발생하는 마력을 차단하는 마법.
행여 실패할 경우 리스크가 너무 클뿐더러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누구도 만들지 않은 마법을 쌍둥이는 열심히 연구 중이었다.
깨어난 그에게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을 선물로 주기 위해 말이다.
“깨어나시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기 낳는 구멍에도... 넣을 수 있어요.”
“맞아 맞아, 책에 순결은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바치는 거라고 되어있긴 했지만 조수님은 생명의 은인이니까... 큰마음 먹고 줄게.”
“저도 조수님께 제 처음, 드릴게요!”
숨을 죽이고 시우의 반응을 엿보는 쌍둥이.
“제머나이 백작님이 아시면 절 토막내시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같은 대답이 들려와야 했는데.
3분에 한 번 심장이 뛸 정도로 대사 활동이 억제된 시우에게서는 조그마한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언젠가 저 눈이 떠질 날이 오게 될까?
어쩌면 영원히 지켜지지 못할 약속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동시에 떠오른 불안감을 쌍둥이 중 누구도 입에 먼저 담지 않는다.
“그럼, 아무튼 그렇게 알고 씩씩하게 일어나. 멋진 안대도 사뒀으니까.”
“조수님, 저희 다음에도 올게요. 그때까지 쾌차하셔야 해요?”
오딜과 오데트는 침대에서 내려와 짐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닫는 시늉을 하다 다시 활짝 문을 연다.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시우가 눈을 뜨고 있었다는 영화 같은 일은 없었다.
“......가자.”
“....응, 언니.”
쓸쓸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오딜과 오데트는 울음을 꾹 참았다.
조수님에게 우는 모습은 더 보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