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1.
물병자리의 마녀, 에아 사달멜리크.
그녀의 잔인한 성정과 위험성은 추방자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다.
마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잔혹한 고문을 취미로 삼는가 하면 무고한 인간을 죽이는 것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100년 전 유희에 나선 ‘티페레트 공작’의 견습마녀를 죽이며 단순한 추방자를 넘어 ‘공적’이 된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를, 단순히 그녀가 위계가 높은 대마녀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면 잘못 짚은 것이다.
사달멜리크는 철두철미한 사냥꾼이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냥감을 몰아넣는 방식은 철저하고도 집요했으며, 궁지에 몰릴 것 같은 기미를 느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주한다.
그 뒤에는 다시 기회를 엿보며 사냥의 순간을 기다린다.
피를 흘리며 도망간 초식동물을 느릿하게 뒤쫓는 표범처럼 말이다.
“어디 ‘향수의 마녀’는 어느 정도의 솜씨인지 볼까?”
에아의 등에서 리본 가닥이 증식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리본이 쪼개져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쪼개져 네 개가 되며, 또 네 개가 쪼개져 여덟 개가 되었다.
너울거리던 수십 가닥의 리본은 3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수만 가닥으로 증식했다.
모든 리본 하나하나에는 빌딩 하나를 무너뜨리고도 남을 정도의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재해에 필적하는 고위계 마녀의 전투력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멜리아 메리골드의 위계는 22 위계.
반면 에아는 21 위계이다.
단순한 수치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위계를 올리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과 재능이 필요할까?
조악한 비유를 들자면 한 명의 인간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연구를 거듭해 인공위성을 발사할 로켓을 만드는 데 드는 노력과 필적할 것이다.
그만큼 마법에서 위계 하나의 격차는 까마득하다.
그러나 에아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18 위계부터 21 위계까지 세 단계의 위계 상승을 오직 마녀의 낙인을 갈취하는 것으로 이루어냈다.
개중에는 그녀보다 고위계의 마녀를 사냥한 적도 있었다.
300년간 10명이 넘는 마녀를 사냥해온 에아 사달멜리크.
골방에 틀어박혀 호문쿨루스 하나 사냥해 본 적이 없는 아멜리아 메리골드.
전투에 최적화된 방향으로 마법을 발전시켜온 에아는 하나의 위계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경험과 자신감이 있었다.
거기에 에아는 그 정도로 자신의 우위를 확신하지 않았다.
변수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변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에아가 마녀를 사냥할 때 필승법이었으니까.
마법이란 매우 정교한 학문이다.
아끼는 사람이 눈앞에서 도륙당하는 비극을 목격한 상태에서 평소와 같은 퍼포먼스를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간발의 차이로 잔인하게 죽어버렸다면.
아멜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시우를 껴안고 있을 뿐 아무런 적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매를 타고 타오르는 반사광을 보면 마법을 발동 중인 것 같긴 한데 정작 어떤 공격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에아는 보았다.
아멜리아의 몸에서 뻗어 나온 무수히 많은 입자가 넝마 짝이 된 시우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을.
이 정신머리 없는 마녀는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인간을 살리기 위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설마 지금 살려보려고?”
“..........”
눈물이 흐르고 있는 아멜리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에아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버린 공허한 눈동자에서 절망을 읽어낸 에아는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재미있는 싸움이 되길 바랐는데.”
사형수의 목을 쳐내기 위해 올라가는 길로틴처럼 수만 가닥의 리본이 일제히 꼬이기 시작한다.
수만 개의 현악기를 동시에 조율하는 듯한 팽팽한 긴장음이 공기를 떨게 한다.
-툭
시작은 한 방울이었다.
에아는 뺨에 떨어진 촉촉한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달밤이 찬연한 늦가을의 하늘이 울고 있다.
-툭, 툭, 툭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하늘로부터 가을비가 내린다.
쓰러진 나무의 잎새를, 짓밟힌 잔디 위를.
소중한 사람을 잃은 마녀와 소중한 사람을 빼앗은 마녀 위를 다정히 두들긴다.
멍하니 떨어지는 빗방울을 몸으로 받던 에아는 불현듯 스미는 오한을 느꼈다.
그동안 사지를 넘나들며 갈고닦은 직감이 외치고 있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그러나 눈앞에 먹잇감이 있다.
절망에 의해 저항을 포기하고 목을 내놓은 사냥감이.
눈으로 보이는 현실과 피부에서 느껴지는 위기감의 괴리가 에아의 결단력에 흠을 냈다.
‘눈앞의 이 녀석을 마무리하는 게 먼저 아닐까?’라는 아주 짧은 방심.
“어....?”
일제사격.
어차피 남아있는 것은 낙인과 자궁이면 족하다.
나머지 부분은 곤죽이 되건 말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에 에아는 거대한 공작처럼 활짝 펼친 리본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꿈적도 하지 않는다.
수족 이상으로 성실히 에아의 지시를 수행하던 ‘처녀의 베틀’이 먹통이 되었다.
각부에 명령을 내려도 어디론가 마력이 빨려 나갔다.
새싹이 피었다.
가을비가 맞닿은 모든 곳에 연옥빛의 생명이 고함도 없이 도처에서 피어났다.
속살을 까뒤집었던 흙더미 위에도, 분수대에도, 지붕에도 건물 외벽에도.
빗방울이 맞닿은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움튼다.
“녹여라!”
상황에 맞지 않는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이 도리어 공포를 자극했다.
절대적인 자신감은 사라지고 수백 년 만에 느끼는 그 불안감에 에아는 자성마법을 발동하기 위해 마법을 외웠다.
그녀의 물병결계는 그저 은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소화해내기 위한 에아의 소화기관.
원래대로였더라면 결계 내부에 모든 것을 분해하는 산이 분비되어 에아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녹였어야 할텐데...
“이게 무슨...”
마찬가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지금은 도망쳐야 할 때이다.
일전에 확보해 두었던 도주로를 통해 현세로 돌아가야 한다.
기겁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에아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변해버린 자신의 발을 보았다.
구두에서도 초록색 떡잎들이 자수처럼 수를 놓고 있었다.
이건 구두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었다.
생살에 뿌리를 내리고 뻗어난 새싹이 구두를 뚫고 자랐을 뿐이다.
새카만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어깨에도, 가느다란 손과 팔 위에도.
여지없이 피어나는 새싹의 모습에 에아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의 등 뒤로 넓게 펼쳐졌던 리본도 어느새 뺵빽한 연두색의 잎사귀들로 뒤덮여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은 소나기 같은 하늘의 변덕이 아니었다.
빗물을 맞고 돋아나는 이 새싹도 일반적인 새싹이 아니다.
뿌리를 내린 즉시 모든 마력을 빨아들이고, 종양처럼 자라나 성장하고 있다.
“잠깐만! 잠깐만!”
이게 22 위계 마녀의 힘이라고?
그것도 변변한 전투 경험이 없는?
그럴 리가 없다.
이미 마력의 통제권을 빼앗으려 몇 번이나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 모두가 무의미했다.
마력을 발산하면 발산할수록 새싹이 자라나는 속도가 빨라질 뿐이다.
에아는 이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일전 23 위계의 티페레트 공작과 격돌했을 때의 막막함.
모든 저항이 무위로 돌아가고, 일궈두었던 것을 내던진 채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했을 때 느꼈던 무력함을.
아멜리아는 벽을 넘은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막혀있던 자신의 한계를 뚫고 다시 한번 까마득한 격차를 낸 것이다.
겨우겨우 목숨을 건져 도주했던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에아의 반응이 그때처럼 기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아멜리아의 마법은 에아의 육체마저 깊게 침식해 있었다.
“기, 기다려 봐!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
“배상할게! 사과도 할게! 내가 가지고 있는 노예들 다 너 줄게!”
공포에 질린 에아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아멜리아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시우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기다리라니까?”
아멜리아가 앉아있던 자리는 여왕의 옥좌를 장식하듯 들꽃이 만개해 있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린다.
아멜리아는 에아에게 등을 보이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이 살포시 밟고 지나간 새싹마다 한 다발의 야생화가 피어난다.
그곳에서부터 생명의 파동이 시작되었다.
명경지수 위로 빗물이 떨어진 것처럼 아멜리아의 발걸음을 기점으로, 자라난 들꽃이 일제히 봉우리를 터트리기 시작한다.
“제발... 살려줘...”
싹이 텄던 모든 장소에 꽃이 피었다.
저택은 물론 일대를 뒤덮은 들꽃은 에아의 팔, 다리, 배, 가슴, 눈, 코, 혀를 가리지 않고 범람했다.
향긋한 꽃향기는 최후의 단말마를 남길 시간도 주지 않고 에아 사달멜리크의 무도함을 단죄했고.
무너진 꽃 더미 위로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2.
비가 멎었다.
시우의 극적인 활약으로 탈출에 성공한 오딜과 오데트는 제머나이와 함께 아멜리아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멜리아의 강렬한 마력에 놀란 소피아는 까마귀로 변한 채 오두막에서 날아왔다.
소피아와 제머나이, 그리고 몇몇 모여든 구경꾼들의 눈에 보인 것은 천상의 정원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피어난 형형색색의 야생화와 부채꼴로 펼쳐졌던 구조물이 바스러지며 아롱아롱 떨어지는 꽃비.
화려함과 소박함이 분분한 그 아리따운 풍경 가운데서 시우를 껴안은 채 절규하는 아멜리아.
시우를 발견한 쌍둥이는 앞다투어 달려왔다.
그의 상태를 깨달은 오딜은 조각상처럼 제자리에 멈춰선 채 눈물을 흘렸으며, 오데트는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제머나이 백작은 안타까운 한숨을 그치지 못했고, 소피아는 아멜리아를 만류하려다 몇 번이나 팔을 내팽개쳐졌다.
1886년.
추방자와의 전쟁 이후 게헨나로 기어들어 온 추방자가 이렇게 큰 사고를 일으킨 것은 처음이었다.
커다란 사건인 만큼 물병자리 마녀의 습격사건은 ‘첫 번째 붉은 지붕 살롱’, ‘레바나 대욕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타로 타운의 시민들이 알 정도로 입방아에 올랐다.
그 무시무시한 추방자가 제머나이 가의 견습마녀를 노렸다더라.
자신의 저택에서 일을 벌인 추방자에게 분개한 메리골드 남작이 고작 일수에 추방자를 제압했다더라.
그 덕에 다행히 사상자는 고작 노예 하나에 그쳤다더라.
듣기로는 그 노예가 맹활약을 펼쳐 쌍둥이를 대피시켰다더라.
제머나이 백작은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해 그 노예에게 명예 마녀의 직위를 하사하고자 했다더라.
이와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세피로트의 나무’에서 회의를 소집했다더라.
10명의 남작과 2명의 백작 1명의 공작이 자리에 앉은 가운데 상아 궁전의 케테르 공작은 여전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더라.
하지만 영원히 뜨거운 소문은 없다.
애초에 대중이란 그렇게 끈기 있는 족속이 아니다.
한동안 게헨나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던 ‘물병자리 습격사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