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4화 (84/917)

#84

1.

호쾌한 패드립 이후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차라리 펄펄 뛰면서 화라도 냈으면 덜 무서웠겠는데.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는 에아의 눈동자에 맺혀 시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독사가 맨살 위를 기어오르는 섬뜩함.

그러나 두려워할 시간도 아깝다.

이젠 수비만이 능사가 아니다.

패드립도 박았고 쌍둥이를 눈앞에서 놓친 에아의 분노는 시우에게 향할 것이다.

남은 것은 목숨을 걸고 마지막 삶을 향한 몸부림을 칠뿐.

창을 들어라.

“피어라!”

시우의 팔 한쪽에서 솟아난 검은 그림자가 5M가 넘는 거대한 랜스를 이루었다.

오직 적을 꿰뚫기 위해 만들어진 기병의 창.

이제 그림자를 빼돌리기 위한 마력도, 이동식을 정립하기 위한 여분의 정신력도 필요 없다.

시우는 몸을 낮추고 창을 겨눈 채 에아에게 달려들었다.

물도마뱀 걸음.

그림자를 격자구조로 조밀하게 만들어 낸 최고 경도의 창.

등에서 분사된 그림자는 마치 날개처럼 펼쳐져 시우의 몸을 가속시켰다.

가속의 여파로 순식간에 좁아진 시계.

바람을 타고 달리는 질주.

저 멀리 있던 에아와의 거리가 일순간 좁혀진다.

“그거 질렸어 이제.”

수십 개의 너풀거리는 리본 중.

단 하나의 리본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고작 하나의 리본이 창과 격돌했다.

“아.....”

시우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고작 세 걸음.

세 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갔더라면 창끝은 에아에게 닿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놀아줬더니. 뭐라도 된 것 같니?”

창이 부서졌다.

격자구조를 활용해 최대한의 경도로 창조한 랜스가 리본과 맞닿자 대나무 쪼개지듯 갈라졌다.

팔을 감싸는 갑옷은 충격의 여파로 모조리 날아갔고, 창을 움켜쥐던 손은 제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갑주와 건틀렛이 없었더라면 충돌의 순간 팔 한쪽이 통째로 날아갔을 것이다.

“욱....우웩.....”

목구멍 너머에서 뜨거운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큼큼한 쇳내와 이미 붉게 물든 시야.

시우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손톱은 간데없다.

공장 기계에 휘말린 것처럼 제멋대로 꺾이고 부러진 손가락은 잘하면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것도 같다.

통증?

이런 감각을 통증이라고 불러야 하는건가?

아니, 그보다, 사람 손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모든 것을 쥐어 짜낸 필살의 각오가 고작 리본 하나에 산산이 조각난다.

애초에 시우가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던 에아의 일격은 그녀 입장에서 심심풀이 정도도 되지 않은 공격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존재했던 압도적인 격의 차가 이제야 기만이라는 베일을 벗었다.

알고는 있었다.

결국 닿지 못할 것이라고.

“콜록! 쿨럭! 컥컥...!”

순간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마법이 통제권을 강제로 잃고 붕괴했을 땐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시우는 울컥거리며 흙바닥에 피를 토했다.

방석 하나 분의 넓이로 웅덩이를 만드는 토혈에는 정체를 알기 두려운 살점들이 섞여 있었다.

몸을 감싸던 검은 갑주가 사라졌다.

마력수는 모두 소진했다.

무릎을 꿇은 다리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 귀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다.

두 눈은 핏물이 굳어 제대로 떠지지 않는다.

손가락은 그로테스크한 인체 공예로 변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북처럼 울려대는 고동이 머리를 쪼갤 것 같다.

그래.

이 정도면 잘했지.

그 어떤 노예가 추방자를 상대로 이렇게 엿을 먹여 봤겠는가?

에아는 뚜벅뚜벅 시우의 앞으로 걸어왔다.

꿈쩍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오연한 눈동자로 내려본다.

“쌍둥이는 어디로 간 거지?”

“나도 몰.....”

시우의 답변을 끝까지 기다리지도 않은 뾰족한 구두코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그의 명치에 박혔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마력을 이용해 걷어차진 않았지만 엉망진창의 상태에서 급소를 파고든 일격에 시우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아, 정말. 짜증나 죽겠네.”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웅크린 뒤통수 위로 떨어졌다.

“모처럼 복수할 기회였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가느다란 손가락이 시우의 머리채를 움켜잡더니 그의 고개를 강제로 치켜세웠다.

“어떻게 할거니? 어떻게 변상할 거야? 너 때문에 짜증나! 짜증나 미칠 것 같아.”

시우의 뺨을 쓰다듬은 에아의 손.

뾰족한 엄지 손톱이 시우의 왼쪽 눈을 천천히 파고든다.

통증을 잠시 잊게 해주었던 아드레날린도 눈알을 파헤치는 고통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시우의 벌어진 입에서는 기괴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으...윽...그..아....”

“그래 그래, 예쁘다. 더 귀엽게 울어 봐.”

“이....씨...발...년.....”

죽음을 직감한 시우의 독기 어린 반쪽짜리 시선이 에아를 쏘아본다.

“사실 이렇게 편하게 보내주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슬슬 네 주인님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에아의 손이 눈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곤죽이 된 유리체와 핏물이 그녀의 손끝에서 뚝뚝 흐른다.

리본 한 가닥이 천천히 시우의 비어버린 눈구멍을 향했다.

“자아, 기다려봐.”

시우는 죽음을 직감했다.

결계가 출렁이며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어찌나 그리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잔뜩 헝클어진 머리, 옷.

평소의 아멜리아답지 않다고 잠깐이지만 생각해 버렸다.

“시우....!”

저택을 감싼 이변 속에서 시우와 에아의 모습을 발견한 아멜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잘가.”

아멜리아가 시우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끝이 송곳보다 뾰족하게 변한 리본이 푹 시우의 머리를 헤집었다.

“아.....”

벌어진 시우의 눈과 코, 그리고 비강과 연결된 입에서 피가 툭툭 떨어진다.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콸콸 쏟아지는 피에는 미끈하고 투명한 액체가 섞여 있었다.

진탕된 머릿속에서 단말마처럼 떠오르는 사념.

신시우, 장벽을 넘어설 쌍둥이, 분수의 경계를 넘으며 사달멜리크는 저물었다, 내 얼굴에 싸게 해줄게, 콜라 마시고 싶다, 인간의 갈증은 어떤 원리로 채워지는가, 게헨나의 달은 언제나 보름달이다, 창조의 아름다움, 현묘한 원주의 값 파이여,  3.14159265355820.....3025...그 다음은 뭐였더라? 아.... 152674450 몇 자리까지 외웠을까, 마침내 도달한다, 첫 번째 999999, 파인만 포인트, 속삭인다, 눈을 뜨고, 기억을 돌이키면 나는 자유로웠노라 노래를 부르고, 0의 세계 속에서 그림자는 또다시 태동하며, 영원히 이 몸을 불태우소서.

암전.

“반가워, 메리골드 남작.”

눈을 거쳐 시우의 뇌까지 관통을 끝낸 에아는 시우의 몸을 인형처럼 내팽개치고는 두 팔을 벌려 그녀가 기다리던 먹잇감을 환대한다.

2.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수백 개의 입자들이 아멜리아의 몸을 감쌌다.

물도마뱀의 걸음을 사용한 것보다 수십 배는 빠르게 쏘아지는 아멜리아.

가슴 속에서 충동이 점점 커진다.

회전하면 회전할수록 원심력이 강해지는 것처럼 한가지 일념이 강하게 생겨나고 단단히 다져진다.

“시우...시우...시우...!”

그저 이름을 입에 담으며.

새로 알게 된 이 감정을 그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두렵지 않다.

더는 무섭지도 않다.

초조함과 불안함은 잔뜩 부풀어 오른 따스한 빛에 짓눌려 사라지고 가슴 속에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이 넘쳐 흐른다.

그녀의 발끝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수많은 빛의 입자들이 응집되고, 폭발하면.

아멜리아는 새처럼 하늘을 갈랐다.

저택이 보인다.

얼마 전부터 신시우와 함께 지내게 됐던 저택이.

아직 저기에 있을까?

도망간 것은 아닐까?

아멜리아는 뜀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보았다.

-출렁!

일순 저택을 감싸는 물병 형태의 막이 보인다.

아주 잠깐 반투명하게 변했다가 원래의 투명한 형태로 되돌아갔다.

“어....?”

아멜리아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들판을 내달렸다.

투명한 막의 정체를 알아보는 데는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면결계.

외부와 내부의 세계를 차단하는 고유의 마법식이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결계가 헝클어지기 전까지 아무런 위화감이나 왜곡감을 포착하지 못한 것을 보면 꽤나 높은 수준으로 조성된 결계였다.

“.........”

불안감이 치솟았다.

이면결계는 주로 현세에서 마녀들이 트러블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사용한다.

그러나 이곳은 게헨나다.

추방자의 눈을 피해 마녀인 사실을 감춰야 할 경우도, 현세에 영향을 최소화하며 호문쿨루스를 사냥할 일도 없다.

그렇다면 왜 아멜리아의 저택에 결계가 생겨났을까?

누군가 저 안에서 마법을 행사하는 사실을 감추고 싶기 때문이다.

“시우....!”

그렇다면 게헨나에서 마법 행사를 숨기고 싶어하는 자는 누구인가?

추방자.

그 간악한 악의 마녀들.

아멜리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는 별개로 그녀의 몸은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공중을 달린다.

결계 너머로 보이는 저택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저것은 내부의 이상 상황을 외부로 보이지 않기 위한 일종의 위장이다.

아멜리아가 팔을 뻗자 손끝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입자의 덩어리들이 결계를 쥐어뜯었다.

결계의 안으로 몸을 던진 아멜리아에게 보이는 것은 태풍에 휘말린 듯한 정원이었다.

뿌리째 뽑혀 나뒹구는 정원수, 죄다 뒤집혀 흙바닥을 드러낸 잔디밭.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마녀와 그녀에게 붙잡혀있는 신시우.

그의 몰골은 처참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없다.

“시우...!”

아멜리아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자궁에 담겨있는 마력이 일제히 끓어오르며 아멜리아의 손에 물방울처럼 맺힌다.

일단은 그를 저 마녀의 손에서 빼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멜리아의 난입에 시우는 남은 한쪽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가.”

그의 입술이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 달싹이기 전 시우를 겨누던 리본이 그의 머리를 푹 찍었다.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는 것처럼 쉽고, 현실감 없이 얼굴을 관통한다.

멈추라고 말릴 시간도.

마법으로 그를 보호할 시간도 없었다.

마녀가 몸을 일으키자 리본에 꽂혀있던 시우는 그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형편없이 공중에 내팽개쳐진 시체가 아멜리아에게 날아온다.

아멜리아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의 몸을 받았다.

“반가워, 메리골드 남작.”

피와 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에 젖은 몸이 품에 안긴다.

그의 몸은 죽어가는 곤충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입에서는 피거품이 흘러나오고, 텅 비어버린 동공에서는 으깨진 유리체와 신경, 혈관들이 엉켜있다.

“아...아....아아아.....”

끔찍한 악몽 같다.

왜 이런 일이.

아직 사과하지 못했는데.

아직 고맙다고 하지 못했는데.

함께 현세에 가자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어 달라는 말도 전하지 못했는데.

“기, 기다려요... 제가, 제가 치료... 치료해 줄게...요...”

아멜리아의 몸에서 뻗은 하얀 입자가 시우의 몸을 덮었다.

그녀는 치유술에 정통한 마녀가 아니다.

아니, 그 어떤 마녀를 이자리에 앉혀 두어도 아무런 장비없이 이 정도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와 입에 섞여 흐르는 액체의 정체는 뇌수.

추방자의 일격은 시우의 뇌를 관통한 것이다.

붙잡으려해도 그의 생명은 한없이 흘러내렸다.

“아...아...왜...어째서... 이제야... 말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품에 안아주는 것.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온통 피에 물들었다.

“나는 에아 사달멜리크, 네 낙인을 강탈하러 온 마녀야. 마침 연구 중에 꽉 막힌 부분이 있는데 네 향수를 우연히 얻었거든. 꽤 도움이 될 것 같았어.”

“.........”

“그 노예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나 보네? 다행이다. 죽기 직전까지 메리골드 님! 제발 살려주세요! 메리골드 님! 너무 괴로워요! 이렇게 네 이름만 부르면서 형편없이 질질 짰거든. 너한테도 그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는 건데.”

시우의 몸에서 떨림이 멎어간다.

에아가 앞에서 뭐라고 떠들던 아멜리아는 시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핏기가 가신 그의 얼굴은 두려울 정도로 차가워졌다.

피부가 아닌 석고상을 더듬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상실의 고통은 괴로움을 곱씹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숨을 조여왔다.

결국 또 이렇게.

혼자 남겨지는 걸까?

아멜리아는 시우를 소중하게 껴안았다.

익숙하다 여겼던 고독과 외로움은 한 송이의 검은 장미가 되어 가슴 속에 만개한다.

그 장미에는 분노라는 이름의 독이,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울어라.”

영창과 함께 아멜리아의 눈에서 하늘색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아멜리아 메리골드에게 마법이란.

언제나 떠난 자를 애도하기 위해 짓는 눈물의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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