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1.
시우는 에아의 손끝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그녀의 공격에 대비했다.
갑옷 사이로 흘러나온 그림자를 전방에 전개한다.
갑옷은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그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공격을 흘려내기 위한 방패.
굳이 방패를 직접 들고 막을 필요도 없었다.
공중에 띄워놓고 엄폐물로 사용하면 될 뿐.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방사형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의 방패는 넙쭉한 원뿔 형태였다.
시우는 리본의 공격을 경사면을 따라 흘려보낼 예정이었다.
몸을 낮추고 입을 벌린다.
그리고.
예정된 충격이 왔다.
-쾅!!!!
“쿡!”
어마어마한 충격파.
방패와 리본이 맞부딪치며 생격나는 마력의 격돌이 고스란히 시우의 몸으로 피드백되었다.
내장이 쪼그라드는 강렬한 격통과 함께 배 속에 있던 위액이 왈칵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분명히 막아내었음에도 폭탄 테러에 휘말린 느낌이다.
“조수님!”
“...안 됩니다!”
심상치 않은 그의 기세에 달려오는 쌍둥이를 손으로 저지한다.
지금 쌍둥이들이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이 불공정한 대결이 시우와 에아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그녀가 변덕을 부리는 순간 뒤틀릴 수 있는 짧은 안전.
지금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다른 수단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이 정도는 막을 수 있네?”
먹먹해진 귓가에 에아의 태연한 목소리가 파고든다.
계산대로였다.
시우가 만들어낸 빗면은 충분히 충격을 흘려보냈고, 남은 충격도 그림자의 방패가 피자처럼 쪼개지면서 분산해냈다.
그러나 시우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에아라는 인물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가혹하고 잔인한 여자라는 것이다.
만약 시우가 조금만 더 그림자의 법칙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사지의 한 부분이 몸에서 뜯겨나가 바닥을 뒹굴었을 것이다.
에아는 분명 시우를 봐주었다.
그러나 손대중의 정도는 딱 목숨의 보전까지.
그 외에 그의 몸이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럼 다시 한 발.”
-끼기기기기긱
이번에도 리본이 허공에서 핑그르르 꼬였다.
활시위를 한계까지 당기는 듯한 팽팽한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킨다.
하나가 아니다.
두 개.
세 개.
총 세 가닥의 리본이 시우와 쌍둥이를 겨냥했다.
“이 시발년.”
시우는 이를 갈며 두 번째 농축 마력수를 들이켰다.
“피어라!”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그림자가 문어의 먹물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형태가 달랐다.
방사형이 아니라 좀 더 치밀하고 조밀하게 구축된 벌집 형태의 방패이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세 겹을 순차로 배치해 만전을 기했다.
조금 전의 충격량으로부터 계산해보면 이 이상은 불필요.
딱 여기까지가 여분의 마력과 정신력을 남기며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지 않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죽으면 안 돼?”
계산은 끝났다.
남은 것은 도박이었다.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타이밍을 가늠한다.
방패가 언제나 일정한 경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마력을 요구한다.
격돌의 순간, 그 짧은 찰나에 힘을 집중시킨다면 훨씬 더 높은 마력 효율로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
단,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엇나간다면 방패는 휴짓조각처럼 찢어질 것이다.
그 뒤에는 부덕한 주인의 피와 살점이 허공을 춤추겠지.
-쾅!!!!!
철판을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굉음.
가차 없이, 거의 1초의 시차도 두지 않고 방패 위를 연달아 두들긴 리본은 끝내 시우의 심장에 닿지 못했다.
전보다 배는 되는 충격파가 전신을 두들긴다.
야구 배트로 온몸을 얻어맞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럼에도 시우의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실로 아슬아슬한 기세로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간 일격이 흉흉하던 기세를 잃어버린 채 나풀거리는 리본으로 되돌아간다.
“쿨럭...!”
“이것도 막았네? 그래도 두 번 만에 힘들어 보이다니 유감인걸?”
충격파에 휘말렸을 뿐인데 어느새 폭격이라도 지나간 양 황폐하게 변한 정원.
자욱하게 시야를 가리던 먼지가 바람에 날아가자 한쪽 무릎을 꿇은 시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우는 침착하게 자신의 상황을 가늠했다.
왼쪽 귓구멍에서 미지근한 피가 흐른다.
고막이 터진 듯 그쪽의 소리가 차단되었다.
방패를 산산조각내며 함께 찢어진 리본이 스쳐 지나간 한쪽 눈꺼풀이 화끈거렸다.
입에서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피가 한 움큼이나 흐르고 또렷했던 시야는 렌즈를 겹친 것처럼 흐릿했다.
이대로 한 번, 단 한 번만 더 견뎌보자.
시우는 필사의 각오로 허벅지를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어. 어쩜 노예 주제에 그런 마법을 펼칠 수 있니? 뭐, 효율은 정말로 나빠 보이지만.”
“후우....”
시우는 에아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은 그녀 따위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다음 공격에 배분할 마력과 정신력을 계산해야 한다.
“자, 이번에는 13개야. 아주 비극적이고 불운한 숫자지.”
에아가 손끝을 치켜들자 총 13개의 리본이 허공에서 똬리를 튼 채 시우를 바라본다.
한 개, 세 개 다음엔 열세 개?
정작 이쪽은 한 대도 못 때렸는데 피통 반은 깎인 것처럼 페이즈를 전환하는 썅년에게 울분이 치솟았다.
시우는 필사적으로 다음 방패의 구조를 고민하기에 앞서 에아는 빙긋 웃으며 제안을 했다.
“여기서 찬스.”
에아는 연극배우처럼 팔을 쫙 펼쳐 보이며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었다.
이 게임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눈동자에는 유열의 빛이 기분 나쁠 정도로 반들거렸다.
“너도 알지? 다음 차례에 네 팔다리 중 하나는 반드시 잘려나갈 거라는 거?”
“....압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다.
여력이 없다.
저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확실히 포기해야 했다.
“저기 멍청하게 벌벌 손가락이나 빠는 쌍둥이를 봐. 짜증 나지 않아? 누구는 죽을힘을 다해서 싸우고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결과만 놓고 보자는 거란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저쪽에서 벌어주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싸이코패스 같은 미친소리만 늘어놓을 테니 적당히 맞장구만 쳐주자.
“저기 쌍둥이 중에 동생 있지? 언니가 대신 희생하겠다, 대신 싸우겠다 하는 동안 한 마디도 안 하고 훌쩍이던 쟤.”
“웃.....”
오데트는 에아의 시선이 닿자마자 몸을 움츠렸다.
오딜이 어깨 위를 감싸며 안아주어도 떨림이 잦아들질 않았다.
“얘야, 이름이 뭐니?”
“대답할 필요 없어!”
“대답하는 편이 좋을 텐데?”
어루만지던 손끝을 후우 불며 말하는 에아.
오데트는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바들바들 떨리는 그 목소리는 반쯤 눈물에 젖어있다.
“오...오데트요....”
“너는 뭐 할 말 없니? 네 언니는 당차게 희생하겠다고 하고, 여기 불쌍한 노예는 너희를 살리려고 재롱을 부리는 중이잖아. 그런데 너는 뭐하니?”
가차 없는 에아의 비난이 쏟아지자 오데트는 시선을 피했다.
심약한 그녀로서는 에아의 냉엄한 시선을 받아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가장 오데트를 서럽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말이 사실무근하게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할 뿐 나서서 무언가를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이 자신을 향했다는 것만으로 무섭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어 벌벌 떨고만 있을 뿐.
“오데트, 듣지 마. 어차피 우릴 가지고 놀려는 거야.”
“남의 호의를 그렇게 받아들이면 쓰나? 나는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오데트 양에게 마땅한 도리를 가르쳐 주려는 것뿐이야.”
“언니... 난 괜찮아...”
오데트는 간신히 에아와 눈을 마주쳤다.
광기에 절어있는 고양이 눈동자가 오데트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빌어봐. 그럼 이번 스테이지는 조금 쉽게 가줄게.”
비록 오데트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마녀이고 겁쟁이라지만 수치심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후계로서의 긍지가 있다.
협잡에 굴해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얼마나 추한 행위인지 알고 있다.
“이것도 안 하게?”
그러나 선택지가 없었다.
합리화하고, 자신과 타협하고, 결국엔 도망친 끝에.
오데트의 다리가 천천히 굽혀진다.
그녀의 무릎이 바닥에 맞닿기 직전.
“아줌마, 그만 좀 해요.”
시우의 비아냥이 공기를 얼어붙였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오데트를 보고 있던 에아의 시선이 너덜너덜해진 시우에게 옮겨간다.
“아줌마?”
“아니꼬워서 못 봐 주겠네. 나잇살 처먹고 그러고 싶어요?”
에아는 피식 웃었다.
알만하다는 웃음이었다.
“의도는 알겠지만 그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고.”
시우의 양팔에서 그림자가 꿀렁꿀렁 넘쳐흐른다.
에아가 잠깐 오데트에게 집중하는 사이 에메랄드 타블렛의 인증을 받은 상급 마력수를 마셨다.
에아가 여유를 부려준 덕분에 모든 계산이 끝났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시우의 몸에서 줄줄 흘러넘친다.
전혀 다른 마력을 흡수해 사용하는 것.
그것은 라티푼디움에서 검증이 끝난 시우의 특기 분야이다.
남은 것은 흡수한 마력을 이용해 그간 연구했던 시우의 본인의 자성마법을 활용하는 것뿐.
“오데트 님.”
“네....네... 조수님...”
끝끝내 울음을 터뜨린 오데트가 훌쩍이며 시우에게 답한다.
“나중에 제머나이의 이름을 계승하시면 이 썅년 좀 혼내주세요.”
“웃...욱....”
“오데트 님은 충분히 용기를 내주셨어요.”
시우의 한 손이 반원을 그렸다.
마치 태극권 같은 동작에 에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본다.
“뭐하는 거야?”
오딜과 오데트의 주변에 은빛의 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우의 눈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반사광이 작렬한다.
‘문’을 여는 마법은 미완성본이다.
시우가 완벽하게 구성한 마법식은 기껏해야 마력을 흡수하고 증폭시키는 회로.
이면세계와 현세에 구멍을 뚫기 위한 부분의 완성도는 10% 미만이다.
그러나.
시우는 에아의 공격을 방어하며 나머지 부분을 완성시켰다.
그 짧은 순간에 완벽하게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식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같은 세계’에서 좌표를 무작위로 바꿔 전송하는 정도라면 할 수 있다.
시우는 에아의 공격을 막아내는 틈틈히 이 비상 탈출을 위한 마법식을 재정립했다.
바로 ‘좌표이동식’.
그가 연구하던 마법의 일부분을 떼내어 졸속으로 완성한 마법식이다.
“크윽....!”
과부하로 뜨거워진 머리.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마력회로를 거칠게 날뛰며 체내를 헤집는 마력의 파도는 몸을 망가뜨린다.
-툭툭
코피가 흘렀다.
압력이 가해진 것처럼 뜨거워진 안구는 모세혈관이 터져나가며 실핏줄로부터 피눈물이 넘쳤다.
“조수님...?”
“가만히 계세요!”
“이거 뭐에요... 설마...?”
식이 완성되어 간다.
한쪽만 들리는 귓가에는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듯한 환청이 울렸다.
“도망가시는 겁니다! 가서... 아무나 데려오세요! 아멜리아든 백작님이든...! 그 동안 제가 이 미친년을 붙잡고 있을게요!”
모두가 도망칠 수는 없다.
소모되는 마력과 계산의 복잡도는 이동되는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
게다가 마법진이 작동되는 딜레이동안 공격을 막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위이이이이잉!
“아... 안 돼! 조수님!”
“무의미해. 이 물병 안에서는 누구도 도망칠 수...”
에아가 도망치려는 쌍둥이를 보고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은 물병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와 내부를 완벽하게 구분하는 그녀의 물병 속에서는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기에.
-꿀렁...!
그리고 에아의 맹신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순간 물병 결계 전체가 크게 요동친다.
그녀가 미처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에 조그마한 틈새가 생겨난 것이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나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틈새가.
“말도 안 돼!”
갑자기 그런 이상 작용이 생겼을 리는 없다.
에아는 기겁하며 물병의 천장을 보았다.
시우가 리본을 막아내기 위해 짜내었던 그림자.
리본의 충격에 상쇄되어 흩어졌던 것으로 여겼던 그림자가 어느새 물병의 상부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시우가 이동마법을 발동하는 짧은 순간에 일제히 물병에 달라붙어 아주 작은 균열을 이끌어 낸 것이다.
“조수...!”
쌍둥이의 애달픈 외침이 사라졌다.
무사히 이동에 성공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간신히 찢어 벌렸던 물병의 틈새가 수복된다.
에아의 공격을 최소한으로만 막아내며 그녀의 방심을 유도했다.
조금씩 그림자를 빼돌려 물병의 균열을 만들 채비를 갖췄다.
그와 동시에 쌍둥이를 이동하기 위해 여태껏 연구했던 자성마법을 재정립하고, 쌍둥이의 조건에 맡게 계산해 변수를 대입했다.
시우는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이젠 정말 여력이 없다.
휘청하고 상체가 쓰러지려 할 때.
시우는 모든 남은 힘을 짜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아직 쌍둥이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른다.
게헨나 내부이긴 하겠지만 랜덤한 변수를 대입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근방일 수도 있다.
에아가 곧장 뒤쫓지 못하게, 쌍둥이가 오르골을 작동시킬 시간 정도는 추가로 벌어주어야 한다.
“어때? 노예치고 좀 치지?”
“.........”
통쾌하다.
몸은 만신창이인데 얼빵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에아의 표정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비틀린 에아의 입가가 열렸다.
“건방진 것. 반반하게 생겨 예뻐해 주려고 했건만... 갈기갈기 찢어서 쌍둥이의 먹이로 줄게.”
시우는 휘청이는 상체를 일으키고 마력수 하나를 더 마셨다.
모든 마력이 마법진 기동을 위해 빨려나가 황폐해진 가운데.
다시 전신의 회로를 일렁이는 마력의 파동이 채워나간다.
“후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시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멋지게 중지 손가락을 올렸다.
“니 애미.”
이젠 여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