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1.
“그는 끝내 널 팔아넘기지 않았어.”
소피아는 약 10분에 걸쳐 보더 타운 여관에 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물병자리의 마녀가 아멜리아를 납치하기 위해 수작을 부렸던 일.
시우가 선원들의 협잡에 굴하지 않고 구조요청을 한 끝에 소피아가 구해낼 수 있었던 일.
물론 아멜리아가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혹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비록 다른 방법이 없더라 치더라도 구태여 혼란을 가중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가항력과 정상참작이라는 말이 다른 용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
아멜리아는 소피아의 말을 듣고 그대로 멍하니 굳어버렸다.
간신히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려 소피아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그걸 왜 제게는 비밀로... 한 거죠?”
“그땐 나도 자세히 몰랐는데, 아마 탈출을 준비하는 게 너에게 들킬까 봐 걱정한 모양이야. 그래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줘. 그에겐 널 팔아넘기고 외부로 도망간다는 선택지도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거야.”
사실 아멜리아는 죽음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스승님의 마법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것이 불의의 사고로 끊어지게 된다 해도 잠깐의 애석함을 품을지언정, 그 유산이 타인의 손에 멋대로 넘어가는 것에 약간의 분노를 느낄지언정, 목숨 자체가 끊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스승님이 떠난 이후 그녀는 비어 있었으니까.
비어있다 여겼기에, 그 공허함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마법 연구라는 의무를 자신에게 부여한 것이니까.
관성처럼 그것을 짊어지고 비탈길을 오르던 것뿐이다.
시우는 달랐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고 싶고 나가고 싶었기에 그렇게 마법을 연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가 아멜리아를 지키기 위해 죽음에 맞섰다.
그것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마녀를 위해서, 자신이 탈출할 기회까지 포기하며.
커다란 빚이었다.
“.........”
“시우도 너를 위해서 그렇게 용기를 냈잖아. 그랬는데 너는 여기서 도망칠 생각이야? 아직 하지 못한 말은 없어?”
“왜, 왜... 그렇게까지...”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떨까? 가장 확실한 방법이잖아.”
아멜리아는 눈물을 멈추었다.
울고 있을 시간 따위가 없었다.
빙글빙글 방황하던 가슴 속의 나침판이 맹렬하게 한곳을 가리키고 있다.
당장 그에게 돌아가라고.
제대로 된 사과와 감사를 표하라고.
방금까지 그렇게도 두렵게만 느껴졌던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웃.....우우....”
새삼스럽게 가슴에서 꽃가루처럼 솟구치는 기쁨.
미움 받고 있다고만 여겼다.
거부당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신시우가 그 자리에서 아멜리아를 넘기지 않을 정도는 그녀를 소중하게 여긴 것이 아닐까? 하는 당돌한 생각이 자꾸만 입꼬리를 들어 올리려 한다.
그 기쁨은 동시에 아멜리아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어린아이 투정에 가까운 말과 행동이 그의 행동과 비교되는 것을 느낀 것이다.
“사과...할래요....”
“잘 생각했어.”
“현세에도... 함께 가겠어요....”
“뭐?”
소피아는 깜짝 놀랐다.
아멜리아가 현세에 유희를 가겠다는 말을 입에 담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왔던 사람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길 주저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새로운 감정이던, 혹은 또 다른 경험을 쌓는 일이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멜리아에게 현세란 아주 낯설고 두려운 곳이었다.
소피아가 몇 번이나 유희 제안을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겉으로는 그런 쓸데없는 유희에 연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소피아가 보기에 현세에 대해 아멜리아가 품고 있는 감정은 미지에 대한 공포에 가까웠다.
“저도, 그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으니까요.”
겁먹고, 움츠리고, 뒷걸음질치기 바빴던 아멜리아.
그런 그녀가 첫 번째 걸음마를 떼려는 모습을 보며 어찌 미소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피아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소피아.”
그 얼굴에 화답하듯 아멜리아는 뺨의 눈물을 소매로 훑었다.
그간 아멜리아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귀엽다고 끌어안고 뺨을 꼬집고 있을 시간은 없다.
“가 봐.”
소피아는 그녀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골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가 모르던 새로운 세계로 다시 한 발짝.
걸어가기 위해서.
2.
“뭐하는 거야?”
에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시우가 마력수를 흡수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미 물도마뱀 걸음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기에 새삼 놀라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렵 시우의 의식은 이미 무시무시한 추방자의 존재를 지워내고 있었다.
유사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무의식의 저변을 파고드는 의식.
공허한 검은 공간이 다시금 시우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호문쿨루스를 사냥하고 얻은 그노시스의 알로부터 새로이 받아들인 마법.
마법진에 침식하고 간섭하며 끝내는 붕괴를 끌어내는 ‘그림자의 법칙’.
새로운 구조물이 된 그림자의 건축물은 시우를 맞이하자 반갑다는 듯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웅장한 성운의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고작 한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양자 간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이곳은 ‘아인’, 의식과 관념의 세계.
물리적 척도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 자유의 공간이다.
-우우우웅!
코앞에서 마주한 그림자의 법칙에선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들려왔다.
왜 이제야 찾아왔냐는 듯한 책망의 목소리 같아 시우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있었어야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숙련도를 쌓아 두었겠지만 말이다.
“좀만 도와주라.”
마법에 자아가 있을 리 만무하건만 악수하듯 뻗은 손을 향해 길게 휘감기기 시작하는 그림자.
시우는 마법진으로부터 그림자의 통제권을 넘겨받았다.
아니, 넘겨받았다는 표현은 조금 틀린 표현이었다.
이 힘은 마땅히 시우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것이었다.
이제야 그의 통제 아래 완벽하게 들어왔을 뿐이다.
전신을 감싼 그림자가 뱀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시우의 의지를 따라 새로 돋아난 팔을 다루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대로는 부족할 것이다.
상대는 아멜리아와 호적수를 이룬다고 호언장담하는 추방자.
시간 벌이를 위해서라면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시우의 심상에 떠오른 것은 갑옷과 창이었다.
반죽을 주무르듯 그림자를 조형해 몸에 두르고 두 자루의 창을 만들어 내었다.
그와 동시에 시우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어머?”
아인에서 몇 분은 허비한 것 같았는데 현실에선 고작 1초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에아는 깜짝 놀랐다는 듯 입가를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시우의 몸에서 뭉클뭉클 솟아난 그림자는 적에게 맞서기 위한 무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으레 판타지 게임에 나오는 빛을 반사하는 광택도 화려한 문양도 없다.
그저 달빛을 흡수하는 새카만 갑주와 양손을 감싼 컨틀렛에 들린 곧은 창 두 자루.
“후우....”
시우가 숨을 들이마시자 등 뒤에서 뻗은 그림자가 머리를 감싸며 날렵한 투구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아주 예전부터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묘한 친밀감마저 느껴졌다.
별다른 숙련도 없이도 전혀 새로운 마법을 사용하게 해줄 수 있는 기적.
이것이 인간의 인지를 강제로 넓히는 ‘그노시스의 알’의 산물이었다.
“RPG게임 좋아했나 보네?”
“원래도 망겜이었는데 5년이나 지났으니 진짜 망했겠네요.”
겉으로 드러난 에아의 감상은 그 정도였지만 내심 매우 놀라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시우의 답변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노예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전신을 덮은 갑주 위에서 고운 쇳가루처럼 혹은 연기처럼 일렁이는 그림자.
저것은 단순히 마법에 의해 발현된 ‘현상’ 따위가 아니다.
작은 입자 하나하나가 아주아주 작은 마법식이었다.
아무리 추방자라해도 본질이 마녀인 이상 처음보는 마법에는 관심이 생겼다.
“원래는 네 몸에만 흥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 자체에 흥미가 생겼어. 너도 잡아가서 연구용으로 써줄게.”
바닷속을 떠도는 해초처럼 하늘거리는 리본을 바라보며 시우는 쌍둥이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뒤로 뛰세요.”
“뭐?”
그리고 곧장 두 개의 창중 한 자루를 에아에게 던지고, 동시에 등 뒤의 결계를 향해 쏘아 보냈다.
-쉭!
팔 힘으로 던진 것이 아니다.
마력을 소모해 그림자 자체에 운동에너지를 부여한다.
그 결과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가속한 투창의 맹공.
우선 짧은 거리를 날아간 창이 물병의 결계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파동이 퍼진다.
섬세한 결계에 녹아들듯 오염을 전파한 그림자가 물감처럼 퍼지자 일순간 물병 전체가 크게 출렁였다.
-쇄애애액!
그 사이 에아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또 한 자루의 창을 바라본다.
“어리석긴.”
그녀를 호위하듯 배후에서 꿈틀거리던 리본의 촉수가 앞다투어 쇄도한다.
주인을 위협하는 마법을 요격하기 위한 자율방어의 발동이었다.
별다른 지시도 없이 매끄럽게 뻗어진 리본은 그림자의 창을 휘감듯이 공중에서 잡아챘다.
-파지지직!
창을 막아서며 조각나는 리본의 모습은 마치 메뚜기떼에 좀먹힌 난초의 잎사귀 같았다.
그러나 에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력의 파형을 보았을 때 마법식에 직접 간섭하는 타입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섬세한 마법일수록 치명적인 결함을 유도해 쇼트시키는 부류겠지.
“노력은 가상하지만 애잔하네.”
리본을 찢어낼 때마다 속도를 잃던 그림자의 창은 결국 무모한 돌진을 제지당했다.
수십 장의 리본에 겹겹이 감싸인 그림자 마법은 그 자리에서 구성을 잃고 흐트러졌다.
“고작 그 정도 마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비록 그림자의 법칙이 대부분의 마법에 대해 상성 상 우위를 점하지만 그것도 어중간한 레벨일 때의 얘기다.
해결법은 단순하다.
시우가 했던 것처럼 막대한 마력으로 찍어누르면 그만.
그런 간단한 해답을 고위계 마녀인 에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조수님....”
“.........”
시우는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공격을 저지한 에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깨 뒤로 시선을 던지자 마찬가지로 멀쩡한 모습의 결계가 보인다.
창에 찔리는 순간 아주 잠깐 물방울이 떨어진 수면처럼 출렁이긴 했지만 손가락 하나를 넣을 수 있을 틈새가 생김과 동시에 수복되었다.
그림자가 결계를 무너뜨리는 속도보다도 결계가 자가수복을 하는 시간이 훨씬 앞섰던 것이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시우도 주제 파악 정도는 하고 있다.
그래도 하다못해 쌍둥이를 피신시킬 시간 정도만 벌었으면 했는데...
그런 시우의 의중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에아는 절묘한 타이밍에 또 다른 제안을 건넸다.
“그래도 모처럼 재밌었으니까, 기회를 줄게.”
시간을 벌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조수님, 포기하지 마 우리도 도울게.”
“맞아요. 함께라면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벌벌 떠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은 쌍둥이가 영창을 외우려는 것을, 시우가 나서서 제지했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죠.”
저 자신만만한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에아 사달멜리크는 확실한 강자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아멜리아를 정면에서 제압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지고 있다.
그것이 만용이나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시우나 쌍둥이가 맞설 레벨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시간도 남으니까, 좋네. 메리골드가 돌아올 때까지 네 팔다리 중 몇 개나 남아있는지 보자고.”
여유.
시우와 쌍둥이를 물병 안의 물고기로 생각하기에 부릴 수 있는 방심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차라리 내가 할게!”
오딜이 시우의 팔을 뒤로 잡아끌며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에아는 피식 비웃음을 흘린다.
“지긋지긋한 제머나이의 마법 따위는 구경하고 싶지도 않아. 어차피 싸가지 없는 쌍둥이의 열화판일 거 아니니? 내가 궁금한 건 거기 노예의 마법이라고.”
오딜이 반박하지 못하는 사이 시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설득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 기회가 순전히 에아의 변덕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오딜 님, 지금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수님은 저번에도 이랬잖아...! 이번에는 내가 지켜줄거야...!”
“저 마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게 유일한 기회에요.”
“조수님....”
오딜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시우의 허리에 푹 안겼다.
시우는 오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꼭 살아가 보죠.”
“...살아남으면 또 내 얼굴에 싸게 해줄게.”
진지한 얼굴로 농담 같은 말을 한 오딜을 뒤로 슬쩍 밀어놓은 시우는 에아의 실험대에 발을 디뎠다.
“식상한 신파극은 끝났지?”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 아래로 각오가 다져진 눈동자가 에아를 쏘아보았다.
“그럼 한 발 간다?”
에아의 한 손이 수평을 그린다.
그녀의 지휘에 응하듯 리본 하나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꼬아졌다.
한계까지 탄성을 축적한 리본이 나선의 궤적을 그리며 독사처럼 시우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