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1.
“그럼, 내 제안도 들어보는 게 어떨까?”
에아는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선뜻 오딜의 제안에 응했다.
아주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그녀는 고민이 아주 깊다는 듯이 한참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제머나이 년들이 아주아주 싫어. 5년 전에 내 주 수입원이던 마력 플랜트를 박살을 내놨다니까?”
끊는 진흙처럼 자글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진득한 악의에 흘러나온다.
아마 쌓인 게 많은 모양인지 겉으로나마 고상한 모양새를 유지했던 가식까지 나던 진 채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름이 뭐니?”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숨을 푸우 쉬고 표정 관리를 한 에아가 묻는다.
오딜은 움츠러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어깨를 펴고 말했다.
“오딜, 오딜 제머나이야.”
“그래, 오딜 양이 희생해서 날 잘 따라와 준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보내줄 용의가 있어.”
“네 제안은 뭔데.”
비릿한 미소가 에아의 입가에 새겨진다.
“우선 네 용기가 정말인지를 확인해야겠어.”
“그럴 필요 없어. 난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렴. 앞으로 네가 겪을 일들이니까. 때로는 무지가 용기를 낳잖니? 또 모르지 내 말을 들으면 네 햇병아리 같은 용기에 실금이 가게 될지.”
잠깐 손가락을 까딱이며 고개를 기웃거리던 에아가 차분하게 말을 늘어놓길 시작한다.
그건 너무나도 잔혹하고, 잔인한 복수극의 시나리오였다.
“우선 오딜 양의 자궁을 생으로 빼낼 거야. 어떤 마취도 없이 말이지.
비록 낙인보다야 못하지만 견습마녀의 그릇 역시 소중한 연구 자료가 되거든. 이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렴, 예전에 여러 번 해봤으니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넌 절대로 죽지 못해. 넌 어떤 예쁜 울음으로 울부짖을지 궁금하네.”
그저 말뿐인데도 비릿한 혈향이 풍기는 것 같은 비릿한 협박을 하며 오딜의 아랫배를 훑어보는 에아.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시선에 오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되면 네게 남는 건 조그마한 흉이 진 예쁘장한 몸뚱이 뿐이겠지. 일반적인 추방자라면 그대로 처분해 버렸겠지만 나는 말했다시피 제머나이에게 쌓인 게 많아. 그뿐이겠어? 타고난 절약가이기도 해. 그래서 오딜 양을 알뜰살뜰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내 지갑으로 쓸 거야.”
그녀는 입술을 날름 핥았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함이 느껴진다는 듯이, 복수의 카타르시스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떤다.
“난 현세 곳곳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거든. 현지에서 여행자금을 융통하는 건 언제나 까다로운 일이지. 바로 그때! 오딜 양이 일을 해야 할 때인 거지. 곱상한 외모로 현지의 남자들에게 몸을 팔아서 돈을 벌어오면 돼. 쉽지?”
마녀들은 대체로 현세에서도 막대한 돈을 지닌 경우가 많다.
선대에게 낙인을 물려받으면 오랫동안 축적된 재산까지 물려받으니 말이다.
아무리 추방자라 한들 그녀 정도의 힘을 지닌 마녀가 고작 여행경비가 부족할 리 없다.
즉, 그녀가 하려는 행동은 순전히 가학심에서 기인한 잔혹한 유흥인 것이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견습마녀는 잠을 자야하니까... 음, 하루에 20명 정도면 충분하겠지?”
오딜의 동의를 구하듯 묻고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에아.
“너무 기대된다. 어떡하지?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
아, 그리고! 목표치를 채우지 못할 때마다 벌을 줄 거야.
실패할 때마다 발가락 하나 어때? 발이 나무 그루터기처럼 뭉뚝해지면 다음에는 손가락을 잘라줄게. 다음엔 팔과 다리, 다음엔 눈과 혀... 조금씩 조금씩 토막 쳐 줄게.”
잔뜩 상기된 그녀의 볼은 비단 통쾌한 상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명백히 성적인 흥분과도 결부되어 있다.
시우도 쌍둥이도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희열과 가학심이 독버섯처럼 말의 중간중간에 피어나있다.
오딜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오들오들 다리를 떨고 있었고, 오데트는 히끅거리며 눈물을 떨구었다.
“내 제안 어때? 아무리 제머나이라도 제 견습마녀가 세계 일주하는 창녀가 되어있으면 눈이 뒤집히지 않을까?”
“미친년...”
“우욱.....”
시우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내뱉었다.
오딜은 뭉실 전달되는 악의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구역질했다.
오데트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망상의 시간이 지나가자 조금은 제정신을 차린 에아가 짝짝 박수를 친다.
시시한 농락의 시간은 끝났다는 듯이.
“...다시 생각해봤는데 제안은 취소할래. 굳이 오딜 양만 데려갈 게 아니라 둘 다 잡아가면 지갑이 두 개잖아?
오딜 양이 목표치를 채우지 못하면 동생에게 벌을 주고, 반대로 동생이 실패하면 오딜 양에게 벌을 주는 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아.
눈물겨운 자매애, 그 감동적인 연극이 보고 싶어졌어.”
실컷 공포를 준 주제에 손바닥 뒤집듯이 제안을 번복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우는 확신했다.
이 년은 미친 년이고, 남은 길은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턱 끝을 치켜세웠던 에아의 붉은 눈동자가 빙글 시우를 향한다.
이제는 그 눈동자가 저주받은 보석 같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장을 끄집어내어 뭉쳐 놓은 듯한 혐오스러움만이 느껴질 뿐이다.
시우는 마력수를 한 병 더 비틀어 열었다.
꿀꺽 꿀꺽 그 내용물을 모조리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어차피 죽었다고 생각한 목숨이다.
쌍둥이라도 보내 달라고 부탁할 계획은 진작에 사라졌다.
저 잔혹한 마녀는 결코 애매한 타협이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싸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고작 재롱에 불과한 발버둥일지라도.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며 싸울 것이다.
“피어라.”
공기마저 차게 얼어붙은 공포 속에서 시우는.
무의미한 저항의 창을 들었다.
지난 3년 동안 부조리함에서 도망치기 위해 갈고 닦았던 창을.
이제는 악의에 맞서기 위해서 적에게 겨눈다.
2.
아멜리아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게헨나의 이름 없는 굴피나무 숲.
스승님의 추억을 묻어 두었던 작은 오두막으로 도망쳤다.
언제나 스승님이 앉아서 책을 읽었던 흔들의자에 팔다리를 웅크리고,
언제나 그녀가 덮고 있던 담요에 코를 묻은 채 어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아기처럼 필사적으로 움켜잡았다.
“스승님....”
제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이곳에 오면 따스하게 녹아내린다.
꿈에 취한 것처럼 덧없는 과거의 헌 자락을 붙잡고 울고 웃으며 도망칠 수 있었다.
아무리 긴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은 상냥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 돌아왔어요. 스승님...”
다 필요 없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디저트도, 아릿한 담배 연기도, 화려한 옷가지도.
전부 필요 없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역시 상처만 줄 뿐이다.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아멜리아 메리골드가 있어야 할 장소는 여기였노라고 되뇌었다.
“이제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게요....”
담요에 뺨을 비비며 자꾸만 몸을 웅크리던 아멜리아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어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아멜리아가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간.
둘만의 기억 속으로 파고들던 그녀의 도피행각을 단호한 목소리가 잡아챘다.
아멜리아는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팔짱을 낀 소피아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누, 누가 이곳에 멋대로 들어오라고 했죠? 그보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잘됐으면 내가 굳이 저택까지 갈 필요 없을 거고, 망했으면 너 성격에 날 다시 찾아올 리도 없잖아. 뻔하지.”
사실 소피아가 알려준 대로만 잘했다면 크게 어긋나는 일 없이 화해하는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소피아는 아멜리아의 감정표현 스킬을 절대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혹시나 일을 망쳤을 때를 대비해 느긋이 까마귀로 변해 오두막으로 날아왔는데.
이미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빠르게 엇나가버린 모양이다.
“혼자 있을래요. 자리를 비워주세요.”
소피아는 글썽글썽 눈가에 맺힌 아멜리아의 눈물을 발견했다.
한숨을 푹 쉬고 아멜리아에게 다가간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
“제...제가 왜 그걸 말해야 하는데요...”
“우린 친구잖아.”
저렇게 처연해 보이는 아멜리아를 보는 것은 소피아가 게헨나로 돌아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언제나 텅 빈 밀랍 인형처럼 무감정하게 행동하던 아멜리아가 어떤 방향으로든 감정을 느끼게 됐다는 것은 친구로서 다행이다.
그러나 옛날 스승님 담요나 붙잡고 울먹거리는 불쌍한 꼴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말해 봐, 들어줄게. 비웃지도, 우습다고 여기지도 않을게.”
“.........”
“물론 혼나야 할 점이 있으면 따끔하게 지적할 거야. 그래도 장담할게, 혼자 속에 담아두는 것보다는 훨~씬 편해질걸?”
소피아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안락의자에 엎드린 아멜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애잔할 정도로 바르르 떨리던 아멜리아의 입술이 열린다.
“노예... 주제에... 저한테 감히.. 그런 망발을... 막... 저에게, 욕을 하고... 저는 그를 위해서... 그가 좋아할 선물도... 제안도...했는데....”
아멜리아는 가늘게 갈라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음색이었다.
“욕을 했다고?”
소피아는 입을 쩍 벌렸다.
아멜리아와 가깝게 지내는 노예인 만큼 곁에서 여러 번 지켜보았기에 알고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혁명가, 성인 또는 영웅에 가까운 굳세고 유별난 인종이 아니다.
지능을 떠나 얘기하자면 어디에나 있는, 겁이 많고, 조심성 많으며 또 상냥한 구석이 있는 일반인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아멜리아의 바로 앞에서 욕설을 뱉었다니 머릿속에서 쉽게 그려지지조차 않았다.
그보다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꼬였기에 이런 상황이 됐다는 건가?
“용서할 수 없어요... 아니, 이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사과고 뭐고... 다 싫어... 그만할 거에요... 이번에도 당신 말을 듣다가...”
“너 사과는 제대로 했어?”
“....하려고, 하려고 했어요... 종이에 쓰면서... 연습도 했어요... 그런데...”
아멜리아는 속을 털어놓듯이 대충 있었던 일의 전말을 소피아에게 고했다.
대충 듣자 하니 조수 제안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사과는 나중으로 밀어두고 제 할 말만 구구절절 늘어놓은 모양이다.
“이거야 원...”
현세로 나가고 싶다는 유일한 희망은 와장창 깨뜨려버린 채 선심 쓰듯 보상을 제안하니 뒤가 없어진 그가 덤벼들 만했다.
“....화낼 수가 없어요.. 화내고 싶었는데... 화낼 수가 없었어요. 울고 있었어요... 제가 울린 거겠죠? 저 때문에 우는 거겠죠?”
마침내 아멜리아의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딱한 아멜리아.
소피아는 팔을 뻗어 아멜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아멜리아, 아멜리아...아이고... 내가 좀 더 설명해 줄 걸 그랬네.”
“.....흑.....”
평소라면 자존심에라도 소피아를 떨쳐냈을 아멜리아가 꼼짝 않고 도리어 소피아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소피아는 아멜리아의 조그맣고 둥근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이제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미워요, 그가 미운데도... 울고 있던 그 사람 모습을 떠올리니까.. 가슴이 이상해요... 욱씬거리고, 아프고, 뜨거워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어요....”
“괜찮아.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그걸 다잡는 게 중요한 거지.”
“전 못해요.. 이제 안 할래요...”
소피아가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헛스윙이었지만, 아멜리아에게는 힘껏 발돋움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 콧대 높던 아멜리아가 이렇게까지 쭈구리가 된 것을 보니 가장 먼저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애잔한 건 애잔한 거고 할 말은 전해 주어야 한다.
“아멜리아.”
“.......”
“한 가지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너무 치졸한 방법이고, 아멜리아를 몰아붙이는 것 같아서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네가 보더 타운에 시우 조수와 함께 데이트를 하러 갔던 날의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