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1.
낭창거리는 검은 리본.
그 색깔만큼이나 악의가 넘실거리는 리본이 시우의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도망치는 새를 붙드는 그물의 모양새였다.
차례로 휘감기듯 접객실의 문을 틀어막는 리본을 보며 시우는 반사적으로 규칙을 가늠했다.
마법은 정교한 학문이다.
그 용도가 어떻든, 설령 인간의 몸을 조각내기 위한 공격 마법이라 하더라도 규칙이 있고 법칙이 있다.
시우가 읽은 것은 마력이 발산되는 순간 느껴진 파동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순차적으로 내려오는 파동은 이 리본이 위부터 아래로 문을 틀어막으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시발!”
시우는 베이스 터치를 시도하는 주자처럼 몸을 낮춰 슬라이딩했다.
아슬한 타이밍.
이마 위로 리본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극적인 탈출에 성공했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고 뒤를 보자 문을 칭칭 감고 있는 리본의 벽이 보인다.
아주 조금만 망설이거나 늦었어도 꼼짝없이 사로잡혔을 것이다.
마법에 미친 마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으로 유명한 추방자.
잡히는 순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시우는 냅다 중앙계단을 통해 방으로 달려나갔다.
어차피 마녀의 앞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시우의 방 침대에는 고급 마력수 한 병과 쌍둥이가 준 농축 마력수 열 병이 있다.
솔직히 물도마뱀 걸음을 이용해 저 사악한 마녀를 따돌리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맨발로 뛰어가는 거보다야 아주 살짝 효율이 올라가지 않겠는가?
저 추방자도 일개 노예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 방심을 틈타 오르골까지 기동하는 데 성공하면 적어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시간 정도는 생길지도 모른다.
“왜 하필 이런 때...!”
추방자가 아멜리아를 찾아왔다면 분명 좋은 뜻으로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아멜리아의 납치를 사주한 전력이 있다.
차라리 아멜리아가 뛰쳐나가기 전에 마주했더라면 개쩌는 마법배틀 판타지를 구경하며 옆에서 손뼉이나 쳤을 텐데.
에아가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아멜리아도 마법에는 일가견이 있는 마녀이니 말이다.
“좆됐다... 좆됐다...!”
숨을 헐떡이며 침대 밑을 뒤적이던 시우.
저 멀리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린다.
예상대로 서두르는 기색 따위는 없다.
궁지의 몬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느긋이 유희의 시간을 만끽할 뿐이다.
침대를 거의 뒤집다시피 들어내고 그 안의 물건들을 챙겼다.
쌍둥이가 준 물건이 워낙에 많으니 모든 것을 챙겨갈 수는 없고 우선은 대마법주술이 새겨져 있다는 망토와 오르골, 마력수만을 챙겨 들었다.
그때 바람이 불며 부푼 치마폭처럼 흔들리는 커튼.
내가 창문을 열어뒀던가?
어렴풋한 의문에 잠길 새도 없었다.
“짠!”
“조수님! 오늘도 몰래 만나러 왔어요!”
야밤에 열린 창 사이로 통통 튀어 들어온 사람이 달리 있을 리가.
저번에 몰래 시우를 끌고 나왔던 것처럼 오늘 밤에도 밀회를 즐긴 생각이었던 쌍둥이였다.
시우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자던 중 아파트에서 불이나 도망쳤는데 깜빡 두고 온 고양이가 생각난 기분이다.
왜 하필 오늘 밤에 찾아왔단 말인가?
쌍둥이야 별 경각심 없이 시우와 놀고 싶었을지 몰라도 공교롭게 지금 상황은 최악 중의 최악이다.
“오딜 님, 오데트 님 잘 들으세요. 저희 좆됐어요. 원래 저만 좆될 거였는데 아무래도 다 같이 좆된 상황인 것 같거든요? 빨리 도망갑시다.”
“뭐, 뭐야? 교수님한테 들켰어?”
“오르골도 제대로 켜고 왔는데요...?”
“그런 게 아니라...!”
차라리 아멜리아에게 들킨 게 낫다.
추방자가 견습마녀를 죽이고 ‘그릇’을 취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대로라면 아무 죄없는 쌍둥이까지 휘말린다.
시우의 반응에 쌍둥이도 덩달아 혼란스러워했다.
조금 무리하나 싶을 정도의 불법 침입이긴 했어도 그의 표정과 말투는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오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설명할 때가 아니에요! 창밖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거리는 잠깐의 지체였음에도 에아는 금세 시우를 따라잡았다.
그녀의 등에는 여전히 하늘거리는 리본 가닥이 날개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도망칠 거까지 있니? 그냥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을 뿐인데.... 섭섭한걸?”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함께 방안에 들어선 에아의 동공이 슬쩍 좁아진다.
그녀의 눈동자가 잡아낸 것은 얼핏 봐도 ‘어린’티가 역력한 두 명의 견습마녀.
기대치 않았던 횡재에 썩은 치즈처럼 쭈욱 찢어진 입꼬리가 반달을 그렸다.
1+2 판촉 행사에 맛있는 디저트를 발견한 것처럼 입맛을 다시는 에아.
“요즘 착하게 살았나? 노예 하나 맛만 볼 생각이었는데 견습마녀까지?”
시우의 하얗게 질린 얼굴.
처음 보는 마녀.
거기에 악의가 가득해 보이는 등 뒤의 마법까지.
게헨나에서 마녀 간의 살상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그제야 오딜도 오데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설마... 추방자...?”
“정답이야~”
아무런 맥락도 없었다.
허공에서 한번 똬리를 틀었던 검은 리본 한 가닥이 인사 대신이라는 듯이 쇄도한다.
눈으로 보고 반응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시우가 순간적으로 망토를 들어 앞에 펼친 것 또한 위기를 직감했기 때문이지 육안으로 무엇인가를 식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쾅!
그리고 터지는 굉음.
망토 저편으로 펼쳐진 방호진.
세 겹이나 되는 촘촘한 마법식이 단 일격에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문자 그대로 넝마 조각이 되어 찢어진 망토.
유리 조각처럼 흩어진 채 흩뿌려지는 마법식의 잔해 사이로 흉소를 짓는 에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걸 믿고 여기까지 도망친 거야?”
생쥐의 발악이 귀엽다는 듯이 싱긋 눈웃음을 친 에아의 감정에 화답하듯이 수십 가닥의 리본이 웅웅거리며 진동한다.
“내가 막을게! 조수님이랑... 꺄악!”
“막긴 개뿔이! 튀어요!”
호기롭게 에아를 가로막으려는 오딜과 벌벌 떠는 오데트의 옆구리를 잡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다급한 순간 깨어난다는 초월적인 힘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쌍둥이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부유 마법을 사용해 부드럽게 지면에 착지한다.
“뭐, 뭐 하는 거야! 저번처럼 역할 분담을 하면 되잖아! 내가 시간을 벌게!”
“저딴 괴물을 어떻게 막습니까! 일단 같이 도망치는 게 상책이에요!”
기운 좋게 날뛰는 오딜을 진정시킨 시우는 마력수 하나를 따 그대로 마시고 창가를 올려보았다.
거기엔 급한 기색이 조금도 없는 에아가 도망친 세 사람을 내려보고 있었다.
“신시우라고 했던가?”
제법 거리가 있고 에아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도 바로 옆에서 똑똑히 들린다.
아마 목소리에 지향성을 부여해 시우에게만 들리게 한 것 같았다.
“공허한 저항은 그만두고 견습마녀만 내놓으렴. 그러면 너에겐 극상의 쾌락을 안겨주도록 할게. 어차피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건... 알지?”
그리고 시우는 보았다.
저택 내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일대를 반투명하게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얇은 막.
마치 물병을 닮은 그 형태가 저택 전체를 품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일단 도망치면서 생각해 볼게요.”
시우는 아까처럼 쌍둥이를 옆구리에 꼈다.
전신에 흐르는 마력.
남성의 신체는 마력을 담을 수 없는 까닭에 너무나도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 마력을 두 다리에 두른다.
“어머?”
시우가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에아.
더 망설일 시간도 없다.
일순 폭발시키듯 모든 마력을 도주를 위해 폭발시킨 시우의 몸이 바람 같은 속도로 에아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2.
“조수님...! 이제 내려놔!”
“저희도 달릴 수 있어요!”
시우는 최대한 저택에서 멀어져 정원으로 숨어들었다.
키 높이까지 자란 꽃 덩굴의 미로라면 잠시나마 에아의 시선을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있으나마나 할 정도로 미약한 소망이었지만.
시우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쌍둥이를 내려놓았다.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지 않고 여기서 멈춰 선 것은 여기가 반투명한 막의 경계면과 맞닿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저건 뭐야? 추방자인 거지?”
“맞아요, 그보다 라티푼디움 때와 같은 상황입니다. 외부에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요?”
시우는 오딜에게 질문하며 근처에 나뭇가지를 하나를 꺾어 경계면에 가져다 댔다.
아무 의미 없이 이런 막을 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 정도는 확인해야 한다.
-파츠츠츠....
그리고 그 즉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나뭇가지.
마치 부식력이 아주 강한 산성과 맞닿은 금속처럼 나뭇가지의 끝자락에서 뚝뚝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흐른다.
확인하지 않고 달려가서 이 결계에 몸을 부딪쳤으면 어떻게 됐을까?
시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역시... 그냥은 못 나가나 보네요.”
“저희 또 갇힌 건가요?”
이 모든 상황이 라티푼디움에서 호문쿨루스에게 쫓기던 상황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호문쿨루스의 위험성을 까마득히 넘어선 추격자가 따라붙었다는 것.
“네, 그러니까 연락을...”
“여기까지 밖에 못 왔어? 10초나 샜는데.”
우뚝 굳은 시우의 목이 뻣뻣하게 소리의 근원지를 향한다.
벽돌로 쌓은 튼튼한 담장 위를 걷듯 태연하게 얇은 나무 덩굴에 올라선 에아의 모습이 보인다.
바람의 펄럭이는 드레스 아래로 팬티가 고스란히 보이는 각도였다.
“더러운 변절자! 너 우리 스승님이 누군지 알아?”
“알지, 알다마다. 사사건건 내 일에 훼방을 놓던 건방진 제머나이의 새끼 쌍둥이잖아?”
차갑게 변한 얼굴로 허공에 계단처럼 수 놓인 리본을 밟으며 내려오는 에아.
천천히 가까워지는 그녀를 보면서도 쌍둥이도 시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숨처럼 내뱉는 살의.
가학심이 깃든 눈웃음과 태연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서 외면하기엔 너무 커다란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아니? 너희가 추방자라고 부르는 우리 마녀들은 다른 무엇보다 외부를 단절시키는 결계 마법에 능숙하다는 걸?”
추방자.
그중에서도 다른 마녀를 해하거나 수습 마녀를 죽인 마녀는 ‘공적’이라 불리며 모든 마녀사냥 대상이 된다.
악랄하기로 이름 높은 에아가 태연하게 현대를 거닐 수 있는 것은 ‘오르골’에 필적하는 결계 마법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미 내 물병 안에 있어. 어떻게 씹어 맛볼지만 고민하면 되는 입안에 먹잇감이라는 뜻이란다. 의심된다면 목청 높여 울면서 스승님의 이름이라도 불러보는 건 어때?”
아무리 당차고 기운 좋은 오딜이라도 그녀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숨을 집어 삼키고 시우의 소맷죽지를 잡았다.
추방자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 수 있다.
이처럼 대규모 결계를 펼쳤는데도 주변의 마녀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건 이 결계가 도망칠 수 없는 벽의 역할을 할뿐 아니라 내부의 모든 소란을 집어삼키는 요람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마녀가 득실득실한 게헨나의 한복판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겠지.
“어느 쪽이 언니고 어느 쪽이 동생이니?”
난데없는 질문에 주춤한 오딜.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나선다.
“내, 내가 언니야.”
오딜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얼핏 느껴지는 에아의 마법 수준은 순간의 기지나 요령으로 극복할 만한 것이 아니다.
최고급 방호 코트를 힘도 들이지 않는 일격에 분쇄한 것이다.
게다가 그런 공격을 자아냈던 리본이 아직 수십 가닥씩이나 있다.
“제안할게. 모자란 동생보다는 훨씬 재능이 있으니까... 그릇이 필요한 거면 내걸 가져가고 다른 사람들은 보내줘.”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대화의 여지가 있고 누군가 희생을 해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신이 나설 생각이었다.
오딜의 모습에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띄운 에아가 매끄럽게 혀를 굴리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인걸? 나도 팔짝팔짝 날뛰는 꼬맹이들을 잡는 건 성가시거든. 개미를 죽이지 않고 잡는 건 어렵잖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에아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 제안도 들어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