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9화 (79/917)

#79

1.

여느 마녀가 그렇듯.

눈앞에 선 불청객의 모습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이 아름다웠다.

칠흑을 걷어내어 만든 드레스는 오직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듯 유연하게 몸을 휘감는다.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붉디붉은 눈동자와 고혹적으로 반짝이는 입술.

어깨 아래에서 똑 부러지는 단발임에도 여리여리한 신체 라인 탓인지 한 송이의 가련한 꽃을 연상시켰다.

그래.

피안화(彼岸花).

저승에 흐르는 강, 그 어귀에 피는 꽃을.

시우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있음을 느꼈다.

언뜻 차분하고 신사적인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같은 인간을 대하는 존중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의식조차 않았겠지만 대화가 통하는 벌레를 바라보는 것처럼 무심한 눈초리다.

그걸 포장하는 상냥한 말투가 구역질 날 정도로 버거운 위화감을 선사한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마녀도 이런 식으로 인간을 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상위 포식자에게만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공포였다.

좆같음도 술기운을 이겨내지만 역시 불알을 쪼그라들게 하는 위기감은 그 이상의 각성제이다.

왜 이런 징그러운 감각을 느끼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음에도 시우는 최대한 신중히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아멜리아 남작의 전속 노예인 신시우라고 합니다. 혹시 미리 약속을 잡으셨는지, 어떤 관계이신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아쉽게도 미리 약속은 되어있지 않아요. 그리고 관계는... 친구라고 해두죠.”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짓누르는 분위기와 한가지 의문에 대한 답이 시우의 위기감지에 확신을 더 했다.

성격 파탄자 아멜리아는 친구가 소피아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멜리아의 친구를 참칭하는 이 마녀는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일까?

시우는 방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멜리아 님은 잠시 외출 중이십니다. 곧 돌아오실 테니 먼저 접객실로 모셔도 괜찮을까요?”

시간을 버는 게 우선이다.

확신이 없는 직감이었다.

그러나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흐르는 한기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까요?”

시우의 웃음에 점잖은 미소로 화답한 마녀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시우의 뒤를 따랐다.

시우는 힐끗 유리장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

남자를 잡아먹는 상이라는 게 있으면 딱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왼쪽 눈 밑에 있는 눈물점이라던가 묘하게 색기 넘치는 외모는 이런 상황임에도 검은 드레스 아래 속살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답다는 말은 결코 그녀에게 사치스러운 수식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는 걸까?

뭔가 짙은 왜곡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 마녀의 옆에 흐르는 뭔가 공기의 무거움이 달랐다.

질척하게 폐에 달라붙어 숨이 쉬기 힘든... 딱 습한 여름날 숨을 쉬는 기분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인 만큼 접객실을 저택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였다.

하얀 보가 덮인 테이블 앞으로 그녀를 안내한 시우는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빼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차와 마실 것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이제 이대로 튀자.

방으로 돌아가면 침대 밑에 오르골이 있다.

오르골을 작동시켜 기척을 차단하고 창문으로 떨어진 다음에 도주하는 거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아멜리아와의 관계이다.

새삼스럽게 아멜리아의 손님,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분자를 독대하며 그녀의 귀가를 기다릴 연유는 없었다.

“혼자 기다리기엔 너무 적적하잖아요? 여기 앉아봐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적당히 속이고 넘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우의 앞에서 마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대놓고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어조였다.

“어서요.”

“실례하겠습니다.”

시우는 별수 없이 그녀의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연기를 펼쳤다.

“동석하게 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제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나요?”

“죄송합니다, 미천한 노예인지라 식견이 짧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이라도 존함을 여쭈도록 허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아 사달멜리크에요.”

“고귀한 분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시우의 사탕발림에 에아는 간지러운 듯이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그쪽은 이름이 뭐죠?”

“신시우라고 합니다.”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어서 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솔직히 좀 오바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

하지만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이 이어진 것을 보아서는 잘 넘긴 모양이다.

“남작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아마 금방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갔으니까.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아멜리아가 왜 도망쳤는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라면 냉혹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시우를 즉결처분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에아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시우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을 걸어온다.

“제가 무료한 것은 싫어하는데... 심심풀이나 하고 있을까요?”

훅 풍겨오는 진득한 살내음.

마치 의도적으로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라도 한 것처럼 시우의 코에 그윽한 여자 향기가 가득해졌다.

“심심풀이라 하심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게는 몹시 나쁜 기벽이 하나 있거든요. 너무 못되고 남사스러워서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기벽이요.”

에이 설마.

시우의 완벽했던 포커페이스에 조금 금이 갔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투가 아양을 떠는 것 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고고한 이미지가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로 딱 절제된 애교였지만.

애매한 미소로 그녀의 말을 흘리며 조용히 경청했다.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고 턱 밑을 받치고 있던 에아가 고운 손을 뻗어 시우의 손을 잡는다.

“어....”

부드럽고 가느다란 손에 이끌린 시우의 손가락 하나를 입 근처로 가져가더니 살짝 깨물었다.

“비밀스러운 기벽을 행할 때마다 저의 치부를 상대방에게도 들춰야 한다는 건 참 낯뜨거운 일이에요.”

시우는 손을 뺄까 말까 고민하며 난감해했다.

아직까지는 설마 싶긴 한데 이 여자의 분위기가 너무 요염해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혹시 제 나쁜 버릇이 뭔지 알겠나요?”

“전혀, 감이 잡히질 않네요...”

“그래요?”

이번에는 입을 살짝 벌린 에아의 혀가 부드럽게 시우의 손끝을 핥았다.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고 빠르게 빙그르르 손끝을 감싸는 혀.

인간의 혀가 이렇게 날름날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시우는 오늘 처음 알았다.

“저... 어...!”

이제 완전히 알겠다 싶어 이 무서운 마녀를 만류하려던 찰나 그녀는 시우의 손을 한입에 넣었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전혀 수치심이 없는 걸까?

달맞이 꽂같은 눈웃음을 띄운 채 시우의 손가락 두 개를 입술과 혀로 극진하게 빨기 시작한다.

마치 성기를 빠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야릇하고 요상한 감촉에도 자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존나 무섭기만 하다.

“남의 남자를 보면 빼앗고 싶어지는 그런 못된 습관이랍니다. 어머어머, 부끄러워라...”

이 미친년이 뭐라는 거야.

제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녹아내릴 듯 황홀한 미소를 짓는 에아.

역시 시우의 통계상 마녀는 높은 확률로 제정신이 아니다.

시우가 남총에 불과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에아가 하려는 짓은 금기이다.

총애받는 첩과 살을 섞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였다.

아멜리아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이런 개짓거리를 제안하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방증인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손님이긴 한 걸까?

친구가 없는 찐따 아멜리아의 친구라고 구라를 친 데다가 와서 대뜸 NTL이 취향임을 밝힌다라...

게다가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답답한 분위기.

그녀의 달콤한 체취마저 식충생물이 풍기는 꽃향기를 연상시킨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혹시 주인님 생각 중?”

“과분하신 관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말해봐요. 지금 메리골드를 생각한 거 맞죠?”

어째서인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에아.

그녀는 거의 반쯤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상태로 시우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에아의 검붉은 눈동자에 좌우로 흔들리는 시우의 동공이 비쳤다.

“솔직하게 말하면 탓하지 않을게요.”

이게 이 여자가 날 탓할만한 상황이긴 한가?

살짝 아리송해진 시우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 거리에서 눈을 보면서 거짓말을 한다면 들통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맞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나요? 그녀의 목소리? 얼굴? 아니면 알몸?”

흥분한 듯이 빠르게 말하기 시작한 에아의 목소리에 당황한 시우.

도대체 어디에 흥분할 포인트가 있는 건지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멜리아의 좆같음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제가 미리 설명해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메리골드 님과 저는 그저 전속 노예와 부교수의 관계입니다.”

“아, 그런가요?”

한참이나 시우의 눈을 들여다보던 에아는 흥이 식은 것처럼 의자 등받이에 엉덩이를 기댔다.

조금 재미없다, 김이 샜다는 기색을 전혀 감출 의도가 없어 보인다.

“아쉽네요. 당신과 그녀가 끈적한 관계인 쪽이 더 좋았을 것 같았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제 슬슬 그녀를 따돌리고 싶어졌다.

괜히 옆에 있다가 불똥이 튈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정말 옆에 있고 싶지 않다.

온몸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다.

이 여자는 너무 위험한 마녀라고.

“어....”

그때 시우는 우연히 보고 말았다.

검은 드레스 위를 지나가는 리버 레이스, 직물을 꼬아 만든 레이스가 그녀의 옷 위에 새긴 무늬.

처음엔 그저 꽃이나 덩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레이스가 그리는 형태는 물병이었다.

물병에서 쏟아지는 물을 수준 높은 직조기술로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기에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 순간 떠오른 세 글자.

추방자.

사실 처음 마주한 때부터 특유의 분위기 탓에 혹시나 싶긴 했다.

그러나 추방자가 떳떳하게 아멜리아의 집에 찾아왔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워 묻어 두었었는데...

시우는 아멜리아가 자칫 납치되었을 뻔했던 날 밤, 소피아가 해줬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이 일의 주모자를 ‘물병자리의 마녀’라고 칭했다.

그리고 눈앞에 불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마녀는 물병 무늬의 레이스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걸치고 있다.

이게 우연일 리가 없지.

원래부터 그녀를 두고 도망갈 예정이었던 시우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튀어야 한다.

아무리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아멜리아 앞에서 강짜를 부렸다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가만히 있을 정도로 수동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죽을 땐 죽더라도 일단 돌아온 아멜리아에게 시원하게 욕을 박아야 하는 사명이 있다.

시우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느긋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니 좋은 위스키를 내오겠습니다. 귀한 손님을 제대로 접객하지 못하는 건 제게도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아무런 말도 없이 싱긋싱긋 웃으며 겹친 두 손 위에 턱을 얹고 있는 물병자리의 마녀.

시우는 힐끗 그녀를 바라보고는 차분한 걸음새로 접객실 밖으로 나서려 했다.

-우웅!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진동음.

오랫동안 그 감각을 접해온 시우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마력이 움직일 때 생겨나는 특유의 기척이다.

“눈치챘구나?”

어느새 고양이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눈동자에서 넘실거리며 흐르는 마력 반사광.

그녀의 등 뒤에는 몇 겹이나 뻗은 검은 리본 같은 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산을 깎아낼 수 있는 그런 압도적인 마력 농도가 느껴졌다.

시우는 추론할 수 있었다.

22 위계에 달하는 마녀를 독대하기 위해 찾아온 마녀라면 그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추방자가 시우의 앞에서 꺼내 보인 리본들은 아무리 봐도 좋은 의도로 꺼낸 것이 아니리라는 것도.

“시발.”

RUN.

도망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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