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1.
“헉....! 헉...!”
귓가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어디랄 것도 없이 정신없이 내달리던 아멜리아의 발끝이 돌부리에 걸렸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발동된 자율방어에 의해 돌멩이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지만 워낙에 달리던 속도가 있다.
아멜리아는 몸이 붕 뜨더니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렀다.
곱고 고운 머리카락부터 단아한 드레스 자락까지.
상처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아멜리아는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던 시우의 모습이 잔영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희망까지 꺾어 놓으니까 속이 후련해?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날 잡아먹을 듯이 못살게 굴었겠지.’
‘나한테 바라는 게 도대체 뭐야?’
‘내가 5년 전에 그쪽 알량한 자존심에 상처 낸 건 미안한데, 이 지랄하면서 간 보고 괴롭힐 거면 차라리 죽여주면 안 될까?’
아무런 필터도 없이 투명하게 표출된 분노.
처음 보는 표정, 처음 보는 말투, 처음 보는 목소리로.
시우가 아멜리아를 바라본다, 원망한다, 힐난한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그 중압감에 짓눌려 도망쳐버렸다.
“욱.....”
가슴에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꾹 잡았다.
무거운 추가 몸 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무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저 도망치고 숨고 싶은 생각뿐.
아멜리아에게 있어 시우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경한 짓이었다.
마녀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도 모자라 욕설과 폭력을 행사할 기미까지 보이다니.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하극상이다.
“감히....노예 주제에...”
속이라도 시원하게 가슴 밑바닥에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감정을 내뱉을 수 있으면 좋으려만.
아멜리아는 억지로 끄집어낸 한 마디를 짓씹듯이 읊조린 뒤 금방 깨달아 버렸다.
너무나도 허망하고 덧없는 말이었다.
그에게 분노하려 해도, 터무니없는 하극상과 무례에 대해 마땅히 주먹을 쥐고 이를 갈려 해도.
그럴 수 없다.
그때마다 다시 한번 그의 번뜩이는 시선이 떠올랐다.
정제한 분노로 가득했던, 눈물에 젖은 그의 눈이.
울고 있었다.
분노와 원망, 서러움의 눈물이라는 것은 아무리 아멜리아라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에 대해 조금도 고려해 본 적이 없던 아멜리아다.
그러나 시우만큼은 달랐다.
그렇게나 화가 났던 걸까?
그렇게나 미웠던 걸까?
그 결과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그의 분노가 쏟아지는 대상 또한 자신이라는 것이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다.
“스승님....”
아멜리아는 흙을 털고 일어섰다.
그녀의 주변을 뭉글거리는 하얀 입자들이 감싸기 시작한다.
스승님이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아멜리아의 몸은 가을바람에 뒤섞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2.
“야! 아직 말 안 끝났어!”
시우는 아멜리아가 도망침과 동시에 그녀를 뒤쫓았다.
그러나 마법을 사용하며 달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10초도 가지 못해 시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까닭에 눈이 뒤집힌 시우는 그 즉시 아멜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발! 누구는 5년 동안 꾸역꾸역 참아왔다가 말하는 건데 고작 몇 마디 듣고 토껴?”
그녀의 방안에 진열된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위스키병.
그것들 중 하나를 꺼내어 입으로 콸콸 쏟아부으며 울분을 풀었다.
마녀의 물건에 멋대로 손대는 짓이나 다름없지만 이미 뒷일은 안전에 없었다.
어차피 이 개지랄을 떨었으니 아멜리아가 용서할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했다.
그 권위적인 아멜리아가 코앞에서 쌍욕을 박은 노예를 용서한다?
차라리 TS 당한 타카쇼에게 펠라를 받던 시우가 너무 흥분해서 보지도 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더 현실감 넘친다.
그래도 속이 다 후련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망치기 전에 붙잡고 더 지랄 못한 거?
여태 온갖 괴롭힘은 다 해놓고 정작 지 욕먹을 때가 되자 호다닥 도망가버리다니 그 비겁함까지 시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다시 돌아오기는 할 것이다.
무례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면 아마 조수에서 다시 노예로 돌아갈 것이고, 시청 노예에서 사노예로 옮겨가겠지.
어쩌면 고약한 마녀에게 팔려 가 죽을지도 모른다.
“개 좆같은 년.”
시우는 거의 반 정도의 위스키를 콸콸 뱃속에 부어 넣고 한 두 번 헛구역질을 했다.
술이 존나 쎄다.
뜨거워진 머리에 술이 들어가니 제정신으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
기왕 죽을 것 어떤 식으로 아멜리아에게 빅엿을 선사할지 고민하던 시우는 그녀의 테이블 위에 있는 연구 자료를 발견했다.
어차피 아멜리아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양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분량이긴 해도 싹 다 버려버리면 아멜리아라도 좀 화나지 않을까?
“오줌 발싸다 썅년아. 너의 소중한 연구자료들을 내 암모니아로 더럽혀 주지.”
서류 더미 위로 오줌이라도 싸주자 싶어 바지를 주섬주섬 내리던 시우는 고추를 덜렁 내민 상태로 간신히 멈췄다.
“....관두자.”
그래도 학문을 연구하는 자들 간의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다.
그 악독한 아멜리아도 시우의 연구 문헌 자체를 압수하진 않지 않았는가?
그럴 예정이었다면 시우가 침대에서 곤히 자는 사이 완전히 처분하거나 했겠지.
굳이 배 위에 올려놓을 필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냐면 당연히 아니었다.
신께 서원한다.
아멜리아가 돌아오면 뒷일이 어떻게 되든지 술병으로 대가리를 후려칠 예정이다.
“아멜리아... 이 씨발년! 좆같은 금발콧털년....! 보지털도 삐쭉삐쭉 따가울 년!”
테이블에 털썩 앉아 아멜리아의 험담을 늘어놓으며 병나발을 부는 시우.
그러나 위스키 반병을 10분도 되지 않아 비워버렸는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간절한 좆같음은 알코올조차 이겨낸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씨발... 그런 깨달음 필요 없어...?”
그렇게 한참이나 한숨을 쉬며 아멜리아의 욕을 곱씹던 시우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마법 연구자료 따위가 아니다.
뭔가 긴 줄글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종이의 모서리가 서류 더미 아래 빼꼼 튀어나와 있다.
“........”
시우는 모서리를 당겨 종이를 빼고 그 내용을 보았다.
둥글둥글한 아멜리아의 손글씨가 담긴 그 종이는 몇 번이나 지우고 덧쓴 흔적이 역력했다.
어떤 부분은 두 줄로 쭉쭉 그어져 있고 어떤 부분은 아예 읽기도 힘들 정도로 흘려 적은 필기체이다.
“또 같잖은 짓을 해놨네...”
독기로만 가득하던 시우의 말끝이 충격으로 흐려졌다.
쪽지의 내용 때문이었다.
생각난 것을 즉시즉시 휘갈겨 쓴 듯이 중구난방인 글이지만 그 용도는 일목요연했다.
아멜리아가 시우에게 오늘 말했던 것들.
보상안, 앞으로의 계획, 거절할 일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다.
심지어 시우가 어떤 반응을 했을 때 대한 대처까지 자세히 말이다.
게다가 종이의 끄트머리에 적혀있는, 지금은 X표가 몇 개나 쳐진 한 문장들.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확실히 말한다’
에 여러 번 그어진 빗금, 그 아래에는...
‘축사에서 살게 하려고 한 것은 행정상의 착오였으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그것에 관해서도 사과한다. 보상도 제시한다.’
에 또다시 여러 번 그러진 빗금, 또 그 아래...
여러 번의 고민을 거쳐 몇 번이나 수정을 거친 끝에 꾹꾹 눌러 담은, 단 한 문장.
‘솔직하게 사과한다’
마지막 문장에는 빗금이 없었다.
시우는 못 본 것을 본 것처럼 다시 종이의 위치를 원상 복구시켰다.
“시발, 이런 거 존나 싫은데.”
갑자기 머리가 엄청 복잡해진다.
애매하게 성인을 타겟으로 삼은 히어로 영화를 본 기분이다.
히어로가 멋지게 빌런을 조져 놓고 나니 빌런이 사실 무조건 나쁜 애가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알 수 없는 속사정을 굳이 굳이 끼워 넣어서 보는 사람 기분 엿같게 만드는 그런 영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멜리아를 향한 분노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좀 의외였다.
아멜리아는 조금 더 똑 부러지고 칼 같은 인상이 있었다.
워낙에 주위에 보여지는 모습이 완벽주의에 가깝기도 하고.
시우가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은 냉혈한에, 뻔뻔하고, 무엇보다 바늘로 찔러도 피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쪽지 내용만 봐서는 엄청나게 내성적인 사람이 배달 주문을 시키기 전에 할 말과 변수에 대한 대처 내용을 빼곡하게 적어놓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 종이 쪼가리 하나가 아멜리아의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작 이런 것으로 보상받기에는 아멜리아가 시우에게 했던 짓들은 의도적인 괴롭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설령 그녀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시우는 엄연한 피해자인데 말이다.
“아니 그럼, 상식적으로 사과 먼저 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으면서 마법을 연구하기 편하게 해주겠다느니 제자로 삼아주겠다느니 헛소리가 아니라 진솔한 사과가 먼저 아니었을까?
조금의 고민 끝에 시우는 금방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멜리아가 그 정도로 멍청할 리는 없으니 또 그 문제일 것이다.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
자존심을 이기지 못해 주저리주저리 말을 돌리다가 그 전에 시우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뭐야 내 잘못 없네.”
말은 이렇게 해도 뭔가 뒤끝이 쓰다.
시우는 한번 잔뜩 헝클어뜨렸던 아멜리아의 테이블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타카쇼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유일한 친구인 그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타카쇼와 마시기 위해 아멜리아의 방에서 주섬주섬 고급 위스키를 한 병 더 꼬불친 시우는 터덜터덜 라운지로 걸어 내려갔다.
불이 컴컴하게 꺼진 라운지는 어째 오싹한 기색이 있다.
라운지 구석 테이블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아멜리아가 뜬금없이 케이크와 담배를 줬더랬지.
다시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제 딴의 사과하고 싶다고 생각한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아멜리아는 하나부터 열까지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였다.
-똑똑똑
갑자기 노크소리가 울렸다.
문고리를 흔든 것도 아니라 문을 손으로 직접 두들긴 듯한 작은 노크였다.
뭐지?
의아해진 시우는 문을 열어주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 아멜리아를 찾아왔다면 마녀일 테고 아멜리아의 손님일 것이다.
그녀의 조수였다지만 관계가 파탄 나버린 시우가 대신 손님을 맞아도 되는지에 대한 생각이 슬쩍 지나갔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노크를 한 장본인이 직접 문을 열었으니까.
열린 문 틈새로 날카로운 달빛이 쏟아진다.
휘양한 빛을 등진 채 저택 안으로 발길을 들인 사람은 예상대로 여자였다.
“처음 뵙겠어요.”
호리호리한 단발의 여자는 달빛에 기댄 듯 우아하고 고상한 동작으로 장갑을 벗으며 인사했다.
차분하게 정돈된 흑발.
피처럼 붉고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길게 갈라져있었다.
그럼에도 그 아름다움만큼은 조금도 손색이 없어, 마치 저주 받은 루비가 영롱하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손에 넣는 순간 주인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것 같은 그런 저주 말이다.
시우는 목 뒤부터 발끝까지 내달리는 전율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엇인가 본능의 경고가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으니까.
“메리골드 남작은 안에 계신가요?”
웃음을 머금은 사근사근한 마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