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7화 (77/917)

#77

1.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갔다.

아멜리아가 모든 것을 알았다.

노예 생활 탈출을 위한 최후의 보루마저 들켜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 문제를 풀라고 하는 아멜리아의 진의는 뭘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두세 번 같은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에 앞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 또한 중요했다.

따라서 시우의 눈은 반사적으로 문제를 훑었다.

정확히 뭘 풀라는 것인지도 주어지지 않은 마법진 하나.

흰 종이 위를 어지럽게 수놓는 수많은 직선과 곡선, 그리고 룬문자 12개.

하나하나가 치밀한 계산과 설계에 의해 그려진 마법진을 머릿속에 옮겨적는다.

시우에게 가장 특출난 능력이 있다면 상황을 가리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쿵쾅거리기만 하던 시우의 심장도 집중과 동시에 심해 같은 정적 속에 묻혀들었다.

아인에서 보았던 것처럼 마법진의 원리와 발현은 3차원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마법진은 술자가 기록 또는 표기하기 쉽게 3차원의 마법을 2차원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기록하기 힘든 ‘소리’라는 자연계의 현상을 추상화해 오선지 위의 ‘악보’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시우의 사고는 종이 위에 그려졌던 마법진을 팝업북처럼 입체화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더는 평평한 종이에 그려진 마법진이 아니었다.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천천히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는 정십이면체, 십이면체의 외부에서 모든 꼭짓점에 맞닿는 외접구가 존재하는 입체적인 구조물이다.

마법진의 형태를 예측해냈다면 다음은 그 용도이다.

마력의 흐름과 룬문자를 바탕으로 이 마법진이 어떤 식으로 현실에 작용하는지를 역추론한다.

“마력 전송 마법식입니다. 최대 전송 용량은 내접구의 부피이고요.”

시우는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아멜리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최대한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 아멜리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니까.

“그게 다인가요?”

아니다.

아멜리아가 던져준 식은 완벽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누락된 부분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전송 때 마력 누수가 너무 심합니다. 50M 아니 30M만 가도 제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펜을 들어 세 군데에 문자를 적어 넣었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100M까지는 전송누수 없이 온전히 전송할 수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한동안 시우가 풀어낸 식을 바라보았다.

이렇다 할 반응도 없이 다른 문제를 건네준다.

“이것도 풀어보세요.”

2.

갑자기 시작된 마법 시험.

아멜리아는 손수 만든 문제를 끝없이 시우에게 던져 주었다.

태연한 척 상황을 살피던 아멜리아도 속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난이도만 놓고 보자면 아직까진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쌍둥이에게 내줘도 하루면 충분히 풀어 올 수 있을 수준의 문제들.

그렇지만 시우가 문제를 풀어내는 속도는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

그저 몇 번 훑어본 것만으로 펜을 쥐고는 제 나름의 답을 써 내려간다.

마법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

같은 마법을 만들어도 수천수만 가지의 답이 나올 수 있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적절한 답을 내는지가 중요한 주관식인 것이다.

그러나 시우의 답안은 높은 아멜리아의 채점 기준을 고려하더라도 꽤 정확하고 합리적이다.

분명 아멜리아도 같은 시간을 주었더라면 비슷한 답을 적었을 정도로.

그러므로 확신할 수 있었다.

시우는 누구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쳐 자성 마법을 완성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그의 실력이다.

마침내 아멜리아가 한가득 쌓아두었던 문제가 모두 동났다.

고작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

마지막 답안을 확인한 아멜리아.

대규모 결계식의 일부분만 보고 전체 구조를 가늠하는 문제였다.

문제의 수준은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이 마지막 문제는 쌍둥이들이 낑낑거리며 풀어와야 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작 15분밖에 되지 않는 시간에 적당한 답을 꺼내 놓았다.

마지막 문제지를 아멜리아에게 건네는 순간 시우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속이 불덩이를 삼킨 것 같다.

푹신한 소파도 지금만큼은 가시방석이다.

왜 아멜리아는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탈출 마법진 초안을 발견했다면 제지하면 그만이다.

연구 문건을 압수하고 노역장으로 보내는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가 너무 적다.

그녀가 원하는 바를 당최 종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의 고운 눈이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얼빵한 짓을 한 그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 넘치는 시선이었다.

“아멜리아 님.”

“말하세요.”

“사실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제머나이 백작님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아멜리아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혹은 딴청을 피우듯이 다른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거절했어요.”

“예?”

그리고 다시 각오를 굳힌 듯이 시우를 쏘아보며 말한다.

차라리 노려본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 억지로 북돋우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오늘 오전 제머나이 백작이 찾아왔어요. 시우 조수의 소유권을 이양하라는 제안을 들었죠.”

“그 제안을 거절하셨다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제머나이 백작이 말하길, 아멜리아가 납득할 수준의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들이 마차에서 시우에게 보인 예의 표시를 생각하면 약속을 그저 말만으로 넘기는 마녀는 아니었을 것이다.

충분한 대가를 준다고 했는데도 거절한다? 도대체 왜?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아멜리아의 심경이 복잡해질 차례였다.

그가 잠이 든 시간 동안 할 말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면전에서 질문을 받자 조금 망설이게 된다.

“당신은 유용한 조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뺏기기 싫은 물건을 지키기 위해 합리적인 척 이유를 내세우는 아이처럼 아멜리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이 아멜리아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의 마지노선이었다.

유용한 조수?

그런 이유로 거절했다면 아마 제머나이를 만나는 것보다 이 초안을 발견한 쪽이 먼저일 것이다.

시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표정을 본 아멜리아가 덧붙이듯이 다급하게 말한다.

아멜리아라고 그가 게헨나를 나가고 싶어한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고, 무엇이든 받을 수 있던 절호의 기회에서조차 현세로 돌아가는 것을 부탁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변명하듯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였다.

“물론, 시우 조수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

“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에요. 당신의 마법적 재능은 훌륭해요. 일개 노예가 이 정도 수준의 마법을 독학했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죠.

저는 그런 재능을 그저 노예로 썩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멜리아는 한번 심호흡을 했다.

미리 준비하고 암기했던 말을 천천히 읊는다.

“그러니 앞으로는 제가 직접 마법을 지도하도록 하죠. 이젠 노예가 아닌 메리골드 가문의 가신이 되는 거예요.”

시우는 불쑥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미천한 노예에게 마법도 가르쳐주고 신분도 주니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잊으라는 말인가?

아멜리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선선히 제 할 말 만을 이어갔다.

“신시우. 당신은 제 소유에요.”

시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의 밑을 벗어나 멋대로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어요. 따라서 허가받지 않은 탈출 계획에 대해선 상응한 조처가 내려질 거에요.”

제머나이의 보은을 빌려 현세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연구하던 마법진의 정체까지 파악 당했다.

게다가 직접 멋대로 밖으로 나갈 수없게 만들겠다는 단언마저 들었다.

바닥에 쌓여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

아무런 대답이 없는 시우를 아멜리아가 힐끗 보았다.

조마조마한 마음.

하지만 그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허망하리만치 텅 비어버린 눈동자.

완전한 무반응이었다.

“앞으로는 좋은 환경을 제공받게 될 거예요. 원하는 실험 자재는 제 이름을 빌려 얼마든지 아카데미에서 받아올 수 있고 실험도구도 마찬가지죠.

식사, 디저트, 담배, 옷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제게 요구하세요.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지급하겠어요.”

아멜리아가 생각하기에 이 조건은 그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근사한 식사가 있다.

달콤한 디저트가 있다.

노예의 신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가 좋아하던 담배도, 옷도 준비했다.

게다가 비록 남자라 할지라도 어엿이 마도의 길을 걷게 된 이상 ‘남작’에게 직접 마법을 하사받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려 들리가 없다.

제한되는 것은 오직 조금의 자유뿐.

그의 대답을 듣고 나면 이제 다른 부분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심술에 의해 그가 고통받았던 일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그에 따른 보상도 지급할 생각이다.

계급에 관한 인식의 격차.

살아온 환경의 차이.

그리고 아멜리아의 미성숙한 대인기술.

이 세 가지는 이미 치명적인 어긋남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녀는 살얼음만 낀 호수 위를 단단한 대지라 믿으며 달려가고 있던 것이다.

“하....”

시우는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호흡처럼 뻗어 나오는 불쾌함과 어이없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불경한 처사.

이멜리아는 의아한 듯 한쪽 눈을 치켜떴다.

“신시우?”

시우는 웃었다.

웃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달림을 당해놓고 며칠 잘해줬다고 헬렐레하던 자신의 모습이 병신처럼 느껴졌다.

“진짜, 다 참고, 넘겨보려고 했는데 못 해 먹겠어요.”

5년간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었다.

정작 바라는 것은 원천 봉쇄한 주제에 원하지도 않았던 것을 선심 쓰듯 던져주는 모습에서 시우는 가슴을 불태우는 것 같은 불꽃을 느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서러움과 원망을.

“넌 진짜 나쁜 년이다.”

나쁜년?

그 불손한 말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멜리아는 그대로 우뚝 멈춰버렸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걸 바랬냐? 최저시급 맞춰서 밀린 월급을 달래? 소원을 들어 달랬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원하지도 않는데 끌려와서 니 밑에서 개처럼 5년 동안 굴렀잖아. 나도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해야 할 일도 있고, 부모님 얼굴도 봐야 한다고...! 시발 국방부 시발 새끼들도 휴가 면회 외출은 시켜줬다고... 이 개같은 년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멜리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하니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떨어질 줄은 추호도 몰랐기 때문이다.

“뭐...뭐 지금 무슨 말을... 제 정신인가요...?”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당황한 아멜리아는 도대체 허둥지둥거리다말을 더듬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들었다는 자각이 느릿하게 떠오르고 거기에 분노를 느끼려던 찰나.

보고 말았다.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시우의 모습을.

겉으로 보기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맹렬한 증오로 타오르는 눈빛을.

“그렇게 마지막 희망까지 꺾어 놓으니까 속이 후련해?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날 잡아먹을 듯이 못살게 굴었겠지.”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다.

고함을 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 농축된 절절한 원망의 목소리는 아멜리아를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도대체 뭐야? 조수? 그 딴 건 다른 마녀들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 너 정도 되는 마녀면 연구원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해올 마녀들도 널려있잖아...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고.”

“신시우, 지금 흥분했다는 건 알겠어요... 그러니까....”

“말해 보라고 했잖아! 나한테 원하는 게 뭐길래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니까?”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멜리아를 몰아붙이듯 걸어갔다.

마법 한 번이면 가볍게 날려버릴 수도 있는 존재.

그러나 처음으로 보는 그의 격렬한 분노와 노성.

모멸과 멸시가 어린 낯선 눈길이 아멜리아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그럴 듯한 마법도, 말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시우를 피해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내가 5년 전에 그쪽 알량한 자존심에 상처 낸 건 미안한데, 이 지랄 하면서 간 보고 괴롭힐 거면 차라리 죽여주면 안 될까?”

어느새 문 근처까지 밀려난 아멜리아는 더 뒷걸음질 칠 수도 없었다.

겁에 질린, 혼란스러운, 지금 일어나는 사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

아멜리아의 몸이 시우의 그림자 아래 잠겼다.

“대답해!”

“힉...!”

마침내 고함을 친 시우의 목소리가 귀를 때리자 아멜리아는 다급하게 문을 열고 그대로 도망쳐 나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