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6화 (76/917)

#76

1.

-딸깍

데네브가 품에서 꺼내 테이블에 올린 것은 아주 작은 목함이었다.

아멜리아는 겉보기에 허름한 나무상자가 실은 예사롭지 않은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3겹,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3겹, 봉인을 위한 4겹, 내부 보존을 위한 7겹의 결계.

총 17겹의 보호결계가 목함을 감싸고 있다.

무식할 정도의 안정 장치였다.

아마 저 조그마한 상자의 내부는 시간의 흐름조차도 정지해 있을 것이다.

멋모르고 훔쳐 간다면 내용물을 엿보기도 전에 무수한 저주에 의해 몸이 썩어들어가겠지.

알비레오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것은 아주 조그마한 열쇠.

마력을 일시적으로 고정화해 특정 패턴을 발산하는 열쇠가 상자에 닿았다.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걷힌다.

상자가 열리자 보이는 것은 붉은 주단 사이에서도 영롱한 분홍빛을 발산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크기의 다이아몬드였다.

“스타인메츠 핑크 62.2캐럿.”

“다이아몬드의 여왕이라고도 불리죠. 이제는 더 생산되지도 않는 진귀한 물건이랍니다.”

아멜리아에게 보석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저 예쁜 장신구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각종 보석류는 연금술과 마법에 요긴하게 사용된다.

특히 다이아몬드는 완드나 대규모 결계식 또는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에 들어가니 크고 커다란 다이아몬드에 대한 마녀들의 선호도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기왕이면 예쁜 게 좋고 말이다.

이 정도 크기의 핑크 다이아몬드라면 거의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물건이다.

일개 노예의 소유권을 사들이기에는 너무 비싼 값을 치르는 셈이다.

서글픈 사실이지만 게헨나에 존재하는 모든 노예의 몸값을 합쳐도 이 스타인메츠 핑크보다 값쌀 테니 말이다.

달리 말하면 제머나이 백작은 그만큼 은인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에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

짧게 보석을 설명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 있던 백작은 무표정하게 보석함을 바라보는 아멜리아를 보고 뭔가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상응하는 아티팩트나 마도구.”

“혹은 금화나 달러를 준비해 드릴 수도 있어요.”

“예술품은 어떠신가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유명화가의 작품도 보유 중인데. 반 고흐라던지요.”

보석함을 다시 덮으며 말하는 데네브.

그러나 아멜리아의 눈에는 어떠한 탐욕도 망설임도 없었다.

제아무리 부자라도 이만한 물건을 눈앞에 두면 욕심이 생길 법한데,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다.

“신시우 조수도 알고 있나요?”

“시우 군과는 이미 협의가 끝난....”

“그게 아니라.”

아멜리아는 이제 목함에 조차 시선을 두지 않았다.

“게헨나에서 나가면 어떤 현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그 부분은....”

“아직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자립할 정도의 자금도 지원할 생각이에요.”

“그럴 필요까지 없어요.”

이렇게 말은 꺼냈지만...

수많은 재벌 총수, 다국적 기업의 CEO 혹은 정·재계 고위직을 만나며 협상을 진행해 온 백작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멜리아는 결코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런 다이아몬드가 서너 개쯤 더 담겨 있었더라도 아마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무언가 착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둘의 관계는 단순히 전속 노예와 마녀의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끈끈한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헨나를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던 시우의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감정의 방향성은 아멜리아로부터 시우로 통하는 일방통행인 것 같았지만.

“모처럼 시간을 내주셨는데 헛되이 낭비하게 만들어 미안하네요.”

아니나 다를까 아멜리아는 대화의 끝을 고했다.

“최대한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이와는 별개로 그와 따로 대화를 나눌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렇게 된 이상 시우에게 다른 보상안을 제안해야 한다.

물론 그가 흔쾌히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지마 말이다.

어쩌겠는가?

“아니요, 제가 설명하겠어요.”

아멜리아의 처사는 자칫 무례하게도 비칠 수 있는 언동이었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체면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었으니.

그러나 백작은 금방 이해했다.

이따금 감정은 인간의 득실관계를 초월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장 시우의 소유권을 양도받기 위해 제안한 보석도 실질적인 몸값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비합리적인 대가가 아닌가?

아멜리아의 입장에서는 당장 백작이 저지른 일이 굉장한 무례일 수도 있다.

“그럼 살펴 가시길.”

아멜리아는 백작을 배웅하지도 않고 접객실에 홀로 남아 차를 들이켰다.

2.

“이거... 맞겠지?”

“그런 것 같네.”

아멜리아의 저택에서 쫓겨난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터덜터덜 정원을 걸었다.

사실 인간관계가 폭이 좁다는 걸 넘어 괴멸 수준에 가깝다는 아멜리아 메리골드가 전속노예를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

꽤 아끼고 있거나, 아니면 조수로서의 자질이 정말 우수한 노예일 것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거창하고 사치스러운 거래품목을 선정한 것이 아닌가?

“세상에나.”

“화가 단단히 났겠는걸?”

그렇지만 이 정도의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견습노예를 짝사랑하는 마녀라니.

그것도 일개 어중이떠중이 마녀가 아니다.

15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두 단계나 올라서며, 제머나이 백작보다도 위계가 높아진 22위계의 대마녀인 것이다.

확정은 아니지만 상황증거나 너무나도 뚜렷하다.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이대로 돌아갈 거야?”

“그럼 어쩌겠어? 메리골드 남작이 저렇게 완고한걸.”

“그래도 일이 꼬였다는 건 그에게 전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보상을 마련하던가.”

“우리가 직접 선물이라도 한다면 더 좋지 않게 볼 수도 있어. 나중에 남작을 통해 전달하는 편이 나을 거야.”

그렇다고는 해도, 백작이 10여 분 넘게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원래 예로부터 남녀 사이의 문제는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던가?

“알아서 잘하겠지.”

“괜히 미안해지네.”

허탕을 친 데네브와 알비레오는 마차에 오르며 다음 화제를 꺼냈다.

얼마 전 게헨나로 밀입국한 마녀에 관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꼬리는 잡았어?”

알비레오의 질문에 데네브는 고개를 저었다.

“여간내기가 아니야. 사역마도 풀고 마녀도 몇 고용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어.”

“이미 현세로 돌아갔을 가능성은?”

“낮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게헨나에서 추방자가 목격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영구척결에 들어간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게헨나에 들어왔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게헨나 내부에는 아무런 소란이 없다.

지금쯤 감시망의 사각지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아도나이 백작에게 연락해서 게헨나의 자금 흐름을 파악해 달라고 할게. 무언가 사러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 셋 정도를 뽑아서 붉은 지붕 살롱에 보내둘게.”

제머나이 백작의 머릿속에서 시우와 아멜리아에 관한 것은 금세 잊혀졌다.

그런 자잘한 것까지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기에 백작의 하루는 너무나도 바빴다.

3.

5년간 열심히 쌓아온 노예의 부지런함도 피로 보존의 법칙을 이겨내진 못했다.

밤새 쌍둥이와 야한 짓을 하다 11연 발사.

게다가 수면시간은 2~3시간 남짓.

할 일 없이 침대에서 뒹굴다 꼬박 잠이 들면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활패턴 조졌네.”

눈을 떠보니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새빨간 석양은 잔디 언덕 위에서 몸을 굴리며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파스텔톤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러면 다음 날의 고생이 훤한데.

“으아아아....”

시우는 한껏 기지개를 켰다.

팔자 늘어지는 배짱이 생활도 오랜만에 하니까 황족이라도 된 기분이다.

-펄럭!

그때 종이다발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몸을 일으킨 시우의 침대에서.

“뭐야?”

시우는 침대 위를 살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시우는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

게헨나를 탈출하기 위해 그가 밤잠을 줄여가며 연구했던 마법진 초안.

약 200여 장에 달하는 종잇장이 시우의 침대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아무리 공을 들여 작성했다 한들 축사의 짚더미 아래, 상자 안에 방치해두었던 마법진 초안이 주인님 보고 싶다고 제 발로 기어들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호러인데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능성은 그보다 더한 호러 오브 호러다.

시우는 흔들린 눈동자로 초안을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감이 뚜렷한 것을 보아서는 당연히 꿈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아니, 이것 가져다 놓았다기보다는 대충 던져놓은 모양새다.

시우는 초안을 싹싹 긁어모아 정리한 다음 서랍에 쑤셔 넣었다.

“후우....”

식은땀이 뚝뚝 흐른다.

저 마법진은 시우의 유일한 보험이었다.

설령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실이 들킨다 해도 그 마법을 이용해 게헨나를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은 알려져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축사는 가장 안전한 보관고였다.

5년간 아무도 찾아온 적이 없는 곳인 데다가 설령 마녀가 우연히 들른다고 해도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는 짚더미 아래를 뒤져가며 물건을 찾을 리 없지.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딸각

시우의 머리가 퍼득 침실과 거실을 연결하는 문으로 향했다.

아주 작은 소리이지만 티스푼이 찻잔을 두들기는 소리다.

그 말은 누군가 거실에 있다는 말.

아마도 이 초안을 던지고 간 사람이겠지.

세수라도 한 것처럼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문고리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비틀어 열었다.

시야에 들어온 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홍차를 마시는 아멜리아.

석양의 끝무리가 발코니의 창으로 범람한다.

불타오르는 듯한 붉음의 세계 속.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고 서늘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가 빙글 시우를 바라보았다.

“앉아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있는 시우에게 아멜리아가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멜리아라면 이 마법진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정도는 해석해 냈을 것이다.

시우는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려왔던 계획이 구깃구깃 구겨진다.

조금 더 은폐를 빈틈없이 했어야 했나?

하지만 5년이다.

5년간 아무도 찾은 적이 없었단 말이다.

설마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실험용 생쥐가 탈출하려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음습한 관음을 즐겨왔던 것은 아닐까?

테이블에 앉자 키퓌시의 체리 케이크가 보였지만 눈길도 가지 않는다.

그 옆에 있는 것은 종이와 펜.

아멜리아는 종이를 뒤집었다.

거기에는 빼곡한 마법 수식이 적혀 있었다.

그중 하나를 고른 아멜리아가 시우의 앞에 종이를 넘기며 말한다.

“풀어보세요.”

“부교수님....”

“푸세요.”

더는 대화를 용납하지 않는 배척의 목소리.

한참을 망설이던 시우는 마지못해 펜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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