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5화 (75/917)

#75

1.

쌍둥이를 포탈로 데려다주고 온 시우는 곧장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아니 빠지려 했다.

그러나 4시간이나 잤을까?

5년 동안 지켜왔던 규칙적인 생활과 채광 좋은 창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시우를 잠에서 일깨웠다.

-덜컹

그 순간 들리는 정문이 여닫히는 소리.

쓸쓸할 정도로 넓은 저택에 머무는 사람은 시우와 아멜리아니 아마 아멜리아일 것이다.

비몽사몽 하던 시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계획 때문이다.

이제 슬슬 아멜리아에게 진실을 알릴 생각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숨기더라도 제머나이 백작가로부터 현세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아멜리아 님의 허가만 떨어지면 갈 수 있다고,

요 며칠 많은 걸 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기로 했다.

더러운 것도 많고 치사한 것도 많다지만 그녀가 백작의 제안을 듣기 전에 부탁을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아멜리아의 체면을 살려줄 수도 있고, 본인의 일인 만큼 직접 말하는 것이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일 확률도 높지 않을까?

또 혹시 모른다.

원래라면 순순히 보내줬을 아멜리아가 제머나이의 권세만 믿고 이런 중대한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던 전속노예가 괘씸해 영원한 체류를 명령할지도.

“음... 가능성 있어.”

요즘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상당히 유순하고 온화해진 아멜리아라도 지금까지 지켜본 세월이 있다.

가능한 변수는 줄이고 싶었다.

아멜리아의 거절로 차선책인 마법을 통한 탈출을 노린다 해도 연구가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 전에 누군가 들키면 안 될 사람에게 들켜 연구 자체를 제지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결정적으로 위 모든 것이 문제없다더라도 결국 탈출까지 1년 내외의 시간이 지연된다.

차라리 전역을 1년 더 미루고 말지.

“후...”

시우는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정돈했다.

긴장하지 말고 말하자.

예전이었더라면 일말의 불안함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타카쇼의 이론대로 아멜리아가 시우에게 호감 내지는 소유욕이 있었더라면 당연히 보내지 않으려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론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던가?

아멜리아가 밤 시중을 제안한 것부터 시우가 착각했던 것이니 말이다.

파자마를 입고 갈 수는 없으니 멋들어진 양복으로 갈아입은 시우는 아멜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나 닫혀있던 문이 열려있다.

시우의 방과 정확히 대칭 구조를 이루는 아멜리아의 방.

당연히 테이블에 앉아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방 옆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문을 등진 채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

살짝 하늘을 올려본 상태로 머리를 앞뒤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처음엔 물을 마시나 했다.

이상한 소리를 듣기 전까지 말이다.

-쭈웁 츄웁....쭈웁...

시우의 동공이 경악으로 좁아졌다.

왜냐하면 시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도저히 그녀와 연결되지 않는 행위였던 것이다.

아멜리아가 더욱 험한 꼴을 보이기 전에 시우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멜리아님!”

그 이후에 있던 일은 알다시피 꽤 난장판이었다.

2.

아멜리아와 함께 오후에 보더 타운에 함께 가겠다는 약속은 사라졌다.

심란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중 나폴거리며 종이학으로 접혀있는 편지가 날아왔다.

오늘 일정이 모두 취소되었음이 고지되어 있는 쪽지였다.

그 덕에 이틀이나 연속으로 쉬게 된 시우는 손가락이나 빨며 침대에서 게으름을 만끽 중이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분주했다.

“뭐지.”

시우는 종일 우연히 목격한 아멜리아의 기행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고 있던 걸까?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입에 길쭉한 유리병을 넣고 빨고 있던 것 같다.

그리고 들키자마자 굉장히 당황했다.

유리병과 램프를 깨뜨릴 정도로 말이다.

시우의 머릿속엔 아직도 아멜리아의 둥그런 뒤통수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던 장면이 눈에 선했다.

그건 흡사...

“어?”

그리고 떠오른 한 가지.

쌍둥이와 마지막 밤을 보내며 시원하게 얼싸할 때 급하게 들렸던 문이 닫히던 소리.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시우뿐이었지만 그저 바람 소리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 뒤통수의 모습...

“펠라 할 때랑 닮은 것 같은데.”

시우는 그제야 방금 느꼈던 강렬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말년 때도 반쯤 정신병자 됐는데. 여기서도 똑같네.”

조만간 맛볼지도 모르는 자유에 너무 흥분해서 정신이 반쯤 갔나 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억측으로 끼워 맞추기엔 아다리가 안맞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견습마녀와 그 짓거리를 하는 걸 봤는데 아무 말도 없이 곤히 자게 내버려 둔다?

쌍둥이의 담당 교수인 아멜리아가?

단순히 풍기문란이 문제가 아니라 쌍둥이들의 마녀로서의 장래가 걸린 일인데?

심지어 그 모습을 엿본 아멜리아가 펠라치오를 따라한다?

그것도 꼴사납게 유리병이나 물고?

“에라이.”

시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타카쇼가 TS된 채 마녀가 되어 자지 빨러 와주는 게 더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아마 중요한 마법적 의식이나 아멜리아의 연구에 관련된 행위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이상한 습관이겠지.

어렸을 때 젖을 빨지 못했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도 모성을 갈구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비슷한 걸까?

사실 어느 쪽도 쉽사리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럴 땐 그냥 입을 꾹 다무는 것이 최고다.

그 모습을 들켰던 아멜리아는 역대 최고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약간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시원하게 방귀를 뀐 직후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챈 표정이었지.

“걍 못 본 척해줘야겠다.”

굳이 거사를 앞두고 들쑤셔서 부스럼 만들 필요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의심쩍은 부분을 억지로 꾹꾹 눌러 담았다.

지금 말하러 가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다.

아멜리아도 그런 민망한 꼴을 들켰으니 멋쩍어 하고 있을테고.

시우는 낮잠이라도 자며 타이밍을 재기로 했다.

3.

아멜리아는 온종일 방에 콕 들어박혀 있었다.

그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보였던 추태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저히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쪽쪽 유리병을 빨아대는 모습.

그 멍청한 몰골을 보며 뭐라고 생각했을까?

마녀이자 귀족으로서 지켜왔던 품위가 한순간에 와장창 망가졌다는 것은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으....으....으으....”

모든 치욕을 잊기 위해 피로의 향수를 잔뜩 뿌린 아멜리아는 침대에 누웠다.

낮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수면은 잠시나마 모든 걸 잊게 해주니까.

하지만 향수의 효과에도 오라는 잠은 안 오고 애꿎은 침대 시트만 쥐어뜯는 중이다.

고작 요 며칠 사이 너무 많은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아멜리아가 믿어왔던 것, 쌓아왔던 것, 당연시 여겼던 모든 일들.

긴 세월 동안 축적된 가치관에 혼동이 오는 와중에 흑역사까지 생성하게 된 상태.

뇌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쉐이크 통에 들어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럴 순 없어요.”

아멜리아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확실한 건 이대로 가만히 방치했다간 시우의 머릿속 자신이 완전 이상한 여자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거다.

변태, 혹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 정도겠지.

그렇게 둘 생각은 없다...! 확실한 해명을 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던 중 아멜리아는 문득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어...?”

왜?

왜 유독 신시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을까?

사교계에서의 언행으로 어떤 소문이 돌던, 다른 이들이 뒤에서 어떻게 떠들어 대던 하등 관심이 없던 아멜리아다.

남들의 평가에 휘청이는 자는 고귀한 자가 될 수 없다.

아멜리아를 인정하는 것은 아멜리아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그것만으로 확신을 지니지 못하는 자는 겁쟁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그 이론에 의하면 어제 아멜리아가 겪은 일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기이한 행동을 들켰을 뿐이지 않은가?

시우가 아멜리아 메리골드에 대해 어찌 생각하든 ‘나’는 ‘나’다.

“.......”

고뇌에 젖은 아멜리아가 자아 성찰을 하는 사이.

-쾅쾅쾅

대문을 두드리는 문고리 소리가 들렸다.

소피아 말고는 친구라 부를 사람도 없는 아멜리아에게 손님이 찾아온 경우는 매우 매우 드물었다.

문밖의 손님이 소피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그녀는 노크 따위 하지 않고 까마귀로 변해서 창문을 두들기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됐네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머리가 복잡할 때는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는 편이 낫겠지.

-탁!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던 모든 피로의 향수가 날아간다.

아멜리아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손님을 맞기 위해 라운지로 나섰다.

“햇살이 기분 좋은 오후에요.”

“약속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와 실례가 아닐런지 모르겠네요”

문 앞에 있는 것은 베일이 달린 작은 모자를 쓰고 있는 두 명의 마녀.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마녀인, 제머나이 알비레오 그리고 데네브였다.

“문제 없어요, 들어오세요.”

뜻밖에 인물의 등장에 잠깐 멍해진 아멜리아.

기껏해야 아카데미의 교수나 조교 정도일 것으로 생각했던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백작을 접객실로 안내했다.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한 건 아기들을 맡긴 이후로는 5년 만이네요.”

“그간 평안하셨나요?”

“....무슨 일이시죠?”

원래라면 시우를 불러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아멜리아는 그를 제머나이 백작의 앞에 세우고 싶지 않았다.

그간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백작과 시우 사이의 미연의 연결점이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아멜리아는 의혹 가득한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다.

미심쩍은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생각보다 적대적인 아멜리아의 태도에 서로 시선을 마주친 이후 입을 여는 백작.

아멜리아가 사교적이지 않고 까칠하다는 것은 많은 마녀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즉각 본론을 꺼냈다.

“신시우 군에게 뭔가 들으신 바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미스 메리골드의 전속노예 신시우에 대한 소유권을 양도받고 싶어요.”

아멜리아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다.

왜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나 했는데 난데없이 신시우의 소유권 양도라니.

“어째서죠?”

저도 모르게 날이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 백작.

“지난 소풍 때 신시우 군이 오딜과 오데트를 호문쿨루스의 습격으로부터 구해주었어요.”

“대가로 원하는 것을 물었더니 현세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더군요. 전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자체는 저희 선에서 해결할 수 있어요..”

“돌아가서도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도 해줄 예정이죠. 하지만 시우 씨는 미스 메리골드의 전속이니 멋대로 처리할 수가 없어 양해를 구하러 찾아왔습니다.”

소풍날 그런 일이 있었다니.

신시우가 이곳을 격렬하게 나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그의 축사에서 연구자료를 발견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뒤에서 이런 일까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짐작조차 못 했다.

“물론 그를 조수로 두시기 위해 전속 노예로 일임하셨겠죠.”

“무작정 양도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준비해 왔어요. 저희는 가능한 그가 바라는 소망을 이뤄주고 싶거든요.”

백작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보석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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