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1.
아멜리아는 홀로 조용한 아카데미를 거닐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 자체가 원래부터 조용하긴 하지만 밤은 특히 그 정적이 심해진다.
날이 조금만 더 포근했더라면 풀벌레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그 점 만이 조금 아쉽다.
“왜 자꾸 이러는 거죠...”
분위기 전환이 돼야 했을 산책.
그럼에도 자꾸 떠오르는 한 남자의 생각에 아멜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예 없던 일은 아니었다.
그와의 독특한 만남과 인연은 이따금 그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마법을 연구하다 막히는 곳이 생겨 담배를 물 때 잠깐 생각나고, 수업을 위해 수업자료를 정리할 때도 잠깐 생각나고...
그래서 그때마다 괜히 그를 찾아가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업무 외의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자신은 그와 계속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왜일까?
왜 그런 걸까?
그가 성실한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는 걸까?
소피아에게 은근히 이유를 물어도 애매한 웃음만 흘릴 뿐.
그녀는 정작 중요한 건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한심하긴.”
이 어찌 볼품없는 꼬락서니인지.
마법이라면 어떤 질문을 던져도 풀어내겠는데 사람과의 관계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정해진 답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
정처 없는 걸음이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주된 이유는 신시우였고 그를 떠올리며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제법 먼 곳까지 나와 있었다.
달빛이 그리는 풍경과 햇볕이 그리는 풍경이 다르기에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제법 눈에 익은,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이곳은 그가 여태까지 지내던 축사가 있는 곳이다.
무려 5년 동안이나.
“.........”
갑자기 입맛이 썼다.
만약 그 원인이 아멜리아의 심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많이 화내겠지?
아멜리아는 동산을 굽이친 오솔길을 걸어 축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있으나 마나 한 낡은 나무문을 열자 넓고 허름한 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웃....!”
별안간 가슴이 따끔거렸다.
마치 뭉툭한 바늘로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후회라는 감정이었다.
이윽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생각.
“다른 것도 이런 게 아닐까요?”
확실히 눈으로 확인한 게 이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에게 화풀이 삼아 툭툭 던진 많은 지시가 아멜리아의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던 건 아닐까?
그를 예정보다 너무 많이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게 두려워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시우가 왜 그렇게 거리를 두었는지.
이것저것 선물을 주고 배려를 해줘도 항상 애매한 반응만을 보여주었던 것인지.
아멜리아는 은연중 피해 다니며 쌍둥이와는 가까이 지냈던 것인지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 처지만을 생각하며 아이처럼 떼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올바르지 못한 처사였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겠지.
서성거리며 지난 과오를 되살피던 아멜리아의 눈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축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랑 옆에는 침대 대용으로 사용한다는 짚더미이다.
아마 말에게 먹이는 건초를 어디선가 구해온 것 같았다.
“여기서 5년 동안이나...”
아멜리아는 천천히 몸을 숙여 짚더미 위에 앉았다.
보기만 해서는 얼마나 불편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즉시 깜짝 놀란다.
푹신푹신해 보이는 모양새와는 다르게 옷 틈새로 뾰족한 지푸라기 몇 개가 들어와 엉덩이를 찌른 것이다.
아멜리아가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감는 동안 그는 이런 곳에서 몸을 뒤척여왔다.
이윽고 완전히 짚푸라기 위에 몸을 누인 아멜리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망가져 있는 천장은 어설프게 못질한 흔적으로 가득하다.
등 아래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나무 박스.
앉을 때도 느꼈지만 눕자마자 전신을 따갑게 만드는 건초.
아멜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불편한 잠자리였기 때문이다.
“.......”
사과하자.
그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자.
마녀인 아멜리아가 노예인 시우에게 사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아멜리아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렇게 알아 왔으니까.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으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솔직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있으면, 다른 방법으로 덮어버리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승님에 대한 그리움을 간신히 묻었었던 때처럼.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양심의 아우성은 아멜리아가 꿋꿋이 지키려 했던 허영된 권위 의식마저 눌러버렸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고 그에게 응당 원하는 배상을 마련할 생각이다.
아멜리아는 울적해진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덜컹!
“읏...!”
일어나기 위해 몸을 뒤집던 아멜리아는 꼬리뼈를 쿡 찌르는 딱딱하고 뾰족한 감촉에 몸을 흠칫 떨었다.
아무래도 짚더미 아래 잘못 배치된 상자가 있는 것 같다.
꼬리뼈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을 느끼며 아멜리아는 이런 못된 짓을 한 물건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짚더미를 뒤적였다.
“이건...”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정갈한 디자인의 목함이었다.
딱히 비싸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개 노예가 가지고 있기에는 충분히 고습스러운 상자이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제법 묵직했다.
남의 소지품을 함부로 엿보는 것이 고상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그가 이렇게나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아마 깜빡하고 놓고 간 것 같은데.
과연 뭘까?
슬쩍 흔들어보자 안에서 짤랑이는 동전 소리가 들린다.
병이 부딪치는 소리도,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냥 돌려줘야겠다.
아멜리아는 옆구리에 상자를 낀 채 축사를 나섰다.
그때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
“사죄의 선물을 줘야하는데... 뭘 줘야 할지 고민이에요.”
아무도 없는데 혼잣말을 시작한 아멜리아는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건 그의 마음에 들만한 선물을 위한 조사 과정인 거죠.”
재빠른 합리화를 거친 아멜리아는 나무함을 슬쩍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죽 주머니에 가득 담긴 금화.
전마지 한 뭉치.
에멜랄드 타블렛의 인증 실링왁스가 박혀있는 최상급 마력수 한 병.
그리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시우의 마법진 설계안이었다.
2.
아멜리아는 물품들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텅 빈 것 같다.
이런 혼란이 찾아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굳이 이 혼란의 정도를 묘사하자면 남녀 간의 성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처음 알게 되었던 때와 비슷할까?
금화는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봉급을 열심히 모아왔더라면 충분히 모을 수 있는 금액이다.
게다가 성실한 시우라면 이걸 어디서 훔친 것도 아니겠지.
마력수와 전마지도 이해할 수 있다.
영문을 알 순 없었지만 시우는 요즘 쌍둥이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왔다.
마도구로 유명한 제머나이 가의 견습마녀라면 호의의 표시로 이런 물건들을 덜컥 내주었어도 이상할 일은 없다.
그러나 아멜리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마법식의 청사진.
그것도 장식불 같은 생활 마법 따위가 아닌, 대규모 마법식의 청사진이다.
최근 업무상 대필을 맡기거나 문서 정리 시 색인을 만들도록 지시했기에 아멜리아는 정확히 시우의 필체를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답게 시원시원하게 뻗은 호쾌한 악필이다.
그의 손글씨가 200페이지가 넘는 종이 위를 빼곡하게 장식하고 있다.
“어떻게...?”
주르륵 그것을 훑어보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아멜리아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마법식이란 매우 복잡하고 난도가 높은 융합학문이다.
하나에만 능통해서는 안 됐다.
다양한 분야의 재능에 통달해야 한다.
128개의 룬문자를 이용한 문법에선 언어적인 감각이,
마법회로에 흐르는 마력을 계산하기 위한 수식에서는 수학적인 재능이,
현현하고자 하는 심상을 상형화하는 심상 기하학에서는 예술적인 재능마저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조화시키고, 응용케 하고,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던 영감을 떠올리는 본능적 재능까지.
이것이 모든 마법의 기본이다.
일반적으로 ‘마녀의 핏줄’을 이어받아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견습마녀들이 이 모든 것을 익히는데 최소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대체가....”
그리고 시우가 게헨나에 잡혀 온 것은 5년 전이다.
만약 시우가 능수능란하게 이 기본기를 컨트롤하는 수준이었다면 아멜리아도 어느 정도 납득하고 말았을 것이다.
바깥세상에서 수학자라더니 아마 계속 현세에 있었다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되었겠군... 이라고 넘겼겠지.
하지만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기본기 따위가 아니었다.
아멜리아조차 처음 접하는 기묘한 방식으로 짜여, 하나의 규칙을 이루고 자신만의 일관성 있는 문법을 취하는 것이 보인다.
단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독자적인 방식과 계산식.
영어만 아는 사람이 라틴어로 된 시를 읽는 기분이랄까?
군데군데 어떤 식으로 계산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이 식 전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뉘앙스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옆에서 시우가 알려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22위계에 달하는 아멜리아가 한 눈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이것이 ‘자성마법’이라는 것을 뜻한다.
모든 기본기를 마스터하고 자신만의 ‘아인’을 개척하는 경지.
이 모든 것을 단 1위계의 낙인도 물려받지 못한 일개 노예가 이룩했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시우가 달성해 낸 것은 견습 마녀인 쌍둥이가 알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훨씬 대단한 일이었다.
아멜리아는 염동을 펼쳤다.
1페이지부터 아직 전부 완성되지 않은 228장까지.
퍼즐을 맞추듯 그 모든 걸 연결하자 어렴풋이 떠오르던 마법진의 이미지가 하나가 되어 나타났다.
이렇게 보자 한결 쉽게 그가 원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아주 멀리서 그림을 보는 것처럼 희미한 예측이지만 말이다.
“외부의 마력을 흡수 및 자기화, 부하변수통제, 그리고 이건....”
문.
차원에 직접 간섭하여 문을 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시우의 자성마법의 정체는 케테르 공작이 만들어 낸 뒤로 그 누구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차원마법식’이었다.
아멜리아는 시우가 원하는 바를 짚어낼 수 있었다.
그는 게헨나를 나가려 하고 있었다.
-촤르르르륵!
펼쳐졌던 종이가 순서대로 모여 다시 한 뭉치가 되었다.
아멜리아는 그것을 원래 상자 안에 밀어 넣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현기증이 났다.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도망...치려는 건가요?”
상식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영문도 모르고 게헨나에 잡혀온 노예들이 자유를 갈망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만약 그가 현세로 나가게 된다면...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합리적인 이유를 들지도,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문득 두려워졌다.
그를 만나야겠다.
아멜리아의 발밑에 마력이 감돈다.
그녀의 몸이 공처럼 통통 튀며 아카데미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