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3화 (63/917)

#63

1.

대충 10시.

애초에 술이 그리 강하지 않은 시우다.

호스트 일로 단련된 타카쇼의 템포를 따라가다보니 후반엔 거나하게 아까운 술을 토하고 말았다.

비틀비틀하며 아멜리아의 숙소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까까지는 그냥 머리가 멍해서 빨리 자야겠다고만 생각을 했는데 막상 숙소를 보자 긴장된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멜리아의 제안을 거절하고 쌍둥이와 소풍을 다녀온 것이다.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야밤에 기어들어 오는 노예를 보면 아멜리아가 무슨 생각을 할까?

괜히 움츠렸던 시우는 어쩐지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

어차피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도 일주일 내외로 청산이다.

아멜리아에게 밉보일까 봐 전전긍긍하던 생활도 끝인 것이다!

물론 백작이 아멜리아와 완벽하게 협상을 끝낼 때까지는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 필요가 있지만.

아멜리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숨을 죽인 채 쓱 문을 열고 들어간 시우.

그리고는 흠칫 놀랐다.

밖에서 보기에 불이 전부 꺼져 있길래 아멜리아도 어디 갔던가 방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로비의 한 구석 아멜리아가 촛불 하나를 켜둔 채 책을 읽고 있었다.

"......."

어스름한 조명에서도 찬연한 빛을 잃지 않는 하늘색의 눈동자가 힐끗 시우를 엿본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 모양새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해서 시우는 괜히 찔끔했다.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아니, 애초에 시우는 아멜리아가 연구동이나 방 밖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인사는 해야겠지?

"다녀왔습니다."

최대한 발음에 주의하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

아멜리아는 책을 슬며시 덮고는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이쪽을 바라본다.

설마 제머나이 백작이 벌써 아멜리아에게 이야기한 것일까?

이 밤에 굳이 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 편이 더 납득하기 쉽다.

손에 땀이 났다.

"내일 일찍부터 일해야 하니 올라가 봐도 될까요?"

그제야 아멜리아가 입을 연다.

"케이크."

그리고 다시 침묵.

뜬금없이 케이크는 무슨 소리일까.

시우는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아멜리아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묻는다.

"케이크 먹고 싶지 않나요?"

"어...음, 네."

시우는 쭈뼛쭈뼛 아멜리아가 눕듯이 기댔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은색 돔으로 덮여있는 접시 하나가 보였다.

웬일이래.

"남았어요."

"감사합니다."

괜스레 눈치가 보여 조심스레 앉은 시우.

행여 아멜리아가 술 냄새에 눈살을 찌푸릴까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스스로 생각해도 비굴한 노예근성이다.

시우는 계속 아멜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이거 줄라고 여태 기다린 건가?

케이크를 먹기 시작하자 아멜리아는 다시 책을 펼쳐 들고 읽어갔다.

딱히 무슨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용무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는 점이 미스터리이다.

"여기요."

케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퍼먹었다.

여담인데 이건 코로 먹어도 맛있을 것 같긴하다.

시우가 케이크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영락없이 독서 삼매경에 빠진 줄 알았던 아멜리아가 쓱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이번엔 담배다.

그것도 한 개비가 아니라 보루로.

체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제머나이 백작이 말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아멜리아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올리가?

아마도 대우를 좋게 해줄 테니 계속 조수를 해달라고 하거나 어쩌면 태연하게 '그 제안은 거절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가, 감사합니다."

어째 떨떠름한 기분이 떨어지질 않아 결국 은근슬쩍 물어보는 시우.

"혹시 제머나이 백작님께 뭔가 들으신 게 있나요?"

"제머나이 백작?"

아닌데.

아멜리아는 시우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것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만 살짝 갸우뚱할 뿐이다.

곧은 눈썹이 의아하다는 듯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연기 같은 건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유독 이상해진 아멜리아의 태도.

사람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면 자살의 징조라는데.

150년 정도 살아왔으니 연구가 정체되고 슬슬 견습마녀에게 낙인을 넘기기 위해 뒷정리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안 되겠다.

머리가 알코올로 혼잡해서 제대로 된 생각 정리가 안된다.

그때 아멜리아가 빠르게 읊조렸다.

"내일은 보더 타운에 갈 거예요."

굳이 읊조렸다고 표현한 것은 그 말이 워낙 빠르고 작았기 때문이다.

잘못 들었나 싶어 아멜리아를 보자 그녀는 태연하게 책을 넘기고 있었다.

"보더 타운행에 동행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요."

"네, 준비하겠습니다. 케이크와 담배 감사합니다."

시우는 혹시라도 아멜리아가 불러세워 '설마 제 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깔깔!'이라고 할까 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방에 들어섰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아멜리아의 기행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차라리 알기 쉽게 괴롭히면 모르겠는데 그전까지 기대도 못했던 발랄한 선물을 자꾸자꾸 받다 보니 위화감만 커진다.

-똑똑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하려던 시우는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놀랐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네! 갑니다!"

어제까지 제방 드나들듯이 문을 벌컥벌컥 열던 아멜리아가 무려 노크를 한 것이다!

고작 노예의 방에 들어서는데!

시우는 벗으려던 옷을 헐레벌떡 입고 문을 열어주었다.

아멜리아는 책을 품에 안은 채로 시우를 올려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곧장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피곤할 거라고 생각해요. 내일은 오후까지 쉬어도 좋아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럼, 잘 자요."

뭐? 잘자요?

이거 나한테 한거 맞나?

경악에 뻣뻣해진 시우의 모습을 보지도 않고 아멜리아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2.

샤워를 끝낸 시우는 창틀에 앉아 아멜리아가 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아멜리아의 태세변환이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지 골똘히 생각 중이다.

우선 제머나이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지는 않고.

조수가 되자마자 근사한 숙소, 양복, 파자마, 담배, 케이크까지?

물론 아멜리아에게 그 정도는 푼돈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선물에 들어간 액수가 아니다.

시우를 대하는 태도이지.

못 잡아 먹을 듯이 굴던 때가 얼마나 지났다고 갑자기 이러니 어쩐지 두려울 정도이다.

가장 유력한 건 두 가지.

하나는 아멜리아가 마음을 고쳐먹고 그간 괴롭혔던 일에 대해 보상을 하고 있다던가.

다른 하나는 그렇게는 안 보여도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잘 챙겨주는 상사이던가.

얘 왜 이래? 싶긴 해도 전처럼 진지한 고민은 아니었다.

사실 이 고민도 곧 쓸모없어질 테니까.

그래도 아멜리아 보면서 그간 눈호강 많이 했었는데.

현대로 돌아가면 저렇게 예쁜 여자와 대화할 일이 생기기는 할까?

시우는 차츰 마음을 정리했다.

원래 제머나이 백작이 아멜리아와 교섭하기 전까지 잠자코 있을 예정이었지만 말 정도는 해둬야겠다.

이제 이 게헨나에서 나가게 될 예정이라고.

전속 노예를 계속하는 것은 앞으로 힘들 것 같다고.

허락해 주시면 좋겠다는 부탁도 함께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보이기로 했다.

"나도 참 쉽네."

그간 그녀 탓에 힘들었던 일이 수두룩 빽빽인데 겨우 며칠 잘해준 거로 마음이 풀리다니.

시간이 늦었다.

슬슬 창을 닫고 잠자리에 들려던 시우는 창문 위에 매달린 무언가를 발견했다.

드림캡쳐처럼 바람에 살랑살랑 이는 여러 가닥의 검은 실.

아니다.

이건 머리카락이다.

"나오세요."

시우의 부름에 치렁치렁 늘어졌던 머리카락이 한결 아래로 드리웠다.

그러면서 동그란 이마와 장난기가 잔뜩 섞인 자색의 눈동자가 빼꼼 보인다.

"조수님, 눈치채는 거 엄청 늦네. 나 5분 전부터 이러고 있었는데."

숙소까지 찾아와 이런 장난을 걸 사람이 달리 있을 리 없다.

망토로 몸을 폭 감싼 채 박쥐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던 오딜이었다.

전에도 찾아온 전적이 있기에 망정이지 첫 대면부터 이렇게 마주했더라면 심장마비 걸릴 뻔했다.

"그냥 평범하게 오시면 안 됩니까?"

"그럼 정문으로 다시 올까? 교수님께 문안 인사도 드릴 겸."

"어휴, 들어오세요."

시우가 창문을 활짝 열자 오딜은 몸을 휙 날려 방안으로 들어왔다.

"짜잔! 저도 있어요!"

그 뒤를 따라 창 위에서 쏙 튀어나온 오데트까지 시우의 방 안으로 착지했다.

말릴 새도 없이 방안으로 침략한 쌍둥이.

어차피 시간이 넉넉했더라도 못 막았을 것 같긴 하다.

"왜 오셨냐고 묻기 전에 오르골은 사용 중이시겠죠?"

"물론이지, 두 개 다 작동 중."

양손의 손가락 두 개를 펼쳐 까딱거리며 말하는 오딜.

귀여운 외모로만 소화할 수 있는 깜찍한 제스쳐였다.

"그래서..."

"잠깐! 우리가 먼저 말할래."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임은 전과 변함이 없다.

아니 오딜에 오데트가 얹어졌으니 오히려 악화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래도 오늘 함께 사선을 넘은 전우애 때문일까?

시우는 쌍둥이가 썩 반가웠다.

"우리 모두 마차에서 곯아떨어져서 오는 길에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잖아."

"맞아요, 저희 조수님이랑 하고 싶은 얘기 완전완전 많았거든요."

고풍스러운 만큼 좀 삭막한 느낌이 강한 방이지만 똥꼬발랄한 쌍둥이가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기를 띤다.

"설마 이대로 돌아가게 할 건 아니지?"

"오늘 같은 날은 밤새 수다를 떨어야 한다구요!"

"그건 좋지만요... 그렇다고 제 상황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닙니다. 아멜리아 님이 아시면 문제가 될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잖습니까?"

오딜과 오데트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더니 나란히 창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안 그래도 그런 조수님을 위해서 마차를 끌고 왔어."

"마차라면 밤새 시끄럽게 떠들어도 괜찮잖아요."

"선물도 있고 말이지."

그거라면 나쁘지 않다.

어차피 내일은 오후까지 푹 잘 수 있기도 하고 요즘 아멜리아의 태도를 보면 밤늦게 어디 나가 있었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지도 않다.

술기운으로 조금 피곤하긴해도...

"좋습니다."

"꺄아! 잘 생각하셨어요!"

"자, 손 잡아."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하는 오데트와 창문을 열며 손을 뻗은 오딜.

참 구김살 없다.

쌍둥이랑 좀 더 빨리 친하게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유 마법을 통해 창문 밖으로 탈출을 감행한 셋은 그대로 저택의 담을 넘어 전에 쌍둥이에게 납치당했던 장미정원으로 향했다.

"마차는 언제 옮겨 놓으셨어요?"

"아까 조수님 데려다줄 때 여기에 두고 포탈로 집으로 갔어."

"아하."

애초에 다시 시우를 찾아올 생각이었나보다.

"오늘은 스승님도 바쁘신 것 같고, 앞으로 이렇게 찾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뭐야?"

"사실 저희는 조수님이 계속 여기에 있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데트! 그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잖아."

"그치만 모처럼 친해졌는데 헤어지기 싫은걸..."

평소라면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을 쌍둥이가 시우의 양옆에 바짝 붙어 작게 투닥인다.

역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느냐보다는 어떤 시간을 함께했는가가 중요하다.

서로를 믿고 목숨을 걸었던 오늘 하루 사이에 쌍둥이와의 관계는 크게 약진해 있었다.

특히 오데트는 원래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거의 시우의 팔 한쪽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양손의 꽃.

진부한 묘사가 떠오른다.

쌍둥이의 정수리에서 올라오는 풋풋한 체취와 좋은 향기를 느끼며 시우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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