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2화 (62/917)

#62

1.

"어머."

"이거 큰일이네."

영산의 협곡 라티푼디움의 발을 들이자 보이는 것은 파괴적인 힘이 잔뜩 할퀴고 간 초목의 잔해들이었다.

아름답던 고목은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수가 회생 불가능한 상처를 입거나 부러져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 피해액 계산을 체념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휴한기였던 탓에 작물의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결국 버섯을 재배해야 할 나무가 이 모양 이 꼴이니...

"이미 생산 기능을 잃어버린 고목은 뽑아버리고 영산에서 새로운 나무를 가져와 심어야겠네."

"케테르 공작이 시끄럽게 굴지도 모르겠네."

"글쎄? 그 양반이 이런 작은 일에 신경이나 쓸까?"

막대한 피해에도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태연했다.

제머나이 사의 기반인 마도구사업이 피해를 입었다면 몰라도 현대까지 뻗어있는 제머나이 가문의 자본력 앞에서 이 정도의 손실은 일주일이면 복구되는 미미한 수준이다.

애초에 마녀인 그녀들이 금화 한푼 한푼에 목숨을 걸리도 없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이 친히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때? 비틀림은 감지돼?"

"찾고 있는 중인데. 마찬가지야."

얼마 전부터 영산에서 관측된  '마력꼬임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대기 중의 마력이 불안정해지며 각종 이상 현상을 발생시키는 마력꼬임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에 의해 발생한다.

하나는 바다 위에 발생하는 용오름처럼 자연스러운 신비현상.

나머지 하나는 공간에 간섭하는 마법이 발동되었거나 공간 자체가 비틀려있을 경우이다.

"구린내가 풀풀 나는데 정작 '커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처참하게 박살 난 농사 현장을 보고도 눈 하나 까딱 않던 데네브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게헨나를 구축하는 이면세계의 결계는 완벽에 가깝다.

모든 외부 상황의 변수에 대처해 조율 및 변동되는 완전 자율형 결계진의 정점.

다른 마녀도 아닌 케테르 공작이 직접 설계하고 담당한 대규모 결계이니 말이다.

게헨나 600년 역사 동안 결계 자체의 오류에 의해 구멍이 발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구멍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법 연구할 시간도 없는데 귀찮게 하긴. 내가 이래서 추방자 놈들이 싫어."

바로 시민권을 빼앗긴 '추방자'들이 게헨나로 밀입국하기 위해 '커널'을 뚫는 경우이다.

도시의 마녀들에게 최대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게헨나이지만 추방자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위계를 높이기 위해 잔혹한 실험으로 세자릿수가 넘는 인간을 죽이거나, 다른 마녀의 낙인을 탈취하는 그들은 게헨나의 시민법에 따라 엄격하게 출입이 금지된다.

그렇기에 이면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호문쿨루스의 특성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이렇게 개구멍을 파는 것이다.

그렇게 열쇠로도 활용된 호문쿨루스가 자칫 오딜과 오데트를 죽일 뻔했고 말이다.

그 생각을 하면 아무리 점잖은 백작이라도 부아가 치밀었다.

"잡아서 죽여버리자."

"좋은 생각이야."

감히 제머나이 백작령에서 이런 행패를 부린 것도 모자라 견습마녀까지 위험에 빠지게 했다?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지.

우선 더 많은 추방자나 길을 잃은 일반인이 넘어오기 전에 커널을 수복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뒷순위로 미뤄두었을 뿐이다.

어차피 커널만 닫는다면 안으로 넘어온 추방자는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기도 하고.

"라티푼디움 쪽이 아니라 영산인가?"

"얼마나 꽁꽁 숨겨둔거야."

툴툴거리며 마력의 촉각을 사방으로 뻗던 알비레오가 데네브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데네브. 우리 귀염둥이들은 어떻게 할 거야? 그러게 내가 진작에 관리 좀 하자고 했잖아."

"우리가 말한다고 걔네가 들어?"

"그래도 이번은 위험했어. 영웅적인 노예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흐음~ 그래도 언제까지 온실 안의 화초로 키울 순 없어. 이런 위험도 겪어 보면서 경험해야지. 언니도 그래서 귀염둥이들이 몰래 타로 타운에 가는 걸 눈감아 주던 거잖아."

"그건 그렇네. 좀 쓸만한 전투형 아티팩트를 선물해 줘야겠어."

"그거 좋다."

쌍둥이의 처우에 관한 얘기가 지나가자 자연스럽게 시우의 안건이 나왔다.

"보상은 어떻게 할 거야?"

"아마 모르는 눈치였지?"

"일개 노예가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쌍둥이가 아직 세상을 잘 모르고 천진난만하긴 해도 누구보다 바르게 키웠다고 자부한다.

한눈에 봐도 쌍둥이가 무척 잘 따르는 것이 보이는 남자라면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노예라 한들 '실종자' 쪽이겠지.

"........"

"...딱하네."

데네브의 말에 알비레오는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다른 보상책을 제안하는 건 어떨까? 노예 신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면 가문의 식객으로 받아들여도 되잖아."

"확실히. 현세가 그리운 거라면 나중에 귀염둥이들이 유희에 나설 때 길잡이로 붙여줘도 괜찮을 것 같긴 해."

"그래도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저대로 현세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그건 그가 기대하던 삶이 아닐 것이다....만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랬다.

"다시 물어보자."

"그와는 별개로 아멜리아 남작을 설득할 재료도 준비해놓을게. 사정을 설명해도 현대에 가겠다고 고집하면 앞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고."

"좋네. 그 정도 답례는 해야 위신이 살지. 천만 달러 정도면 되려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계속 커널을 찾기 위해 훌쩍 몸을 날렸다.

2.

자유.

그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쌍둥이의 마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온 시우는 흥을 감추기 힘들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드디어 노예가 아닌 한 명의 현대인으로서 누려야 했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FUCK 게헨나 FUCK 마녀. 마녀를 위한 도시? 다 BULL SHIT이야."

즉흥으로 만든 랩을 흥얼거리던 시우.

한참을 신내던 중 문득, 허망함을 느낀다.

노예 생활 5년 동안 오직 탈출만을 위해, 탈출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근데 이 상황은 뭐랄까...

지겹고 힘들기만 하던 군생활이 1년 더 남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복무기간을 단축, 하루아침에 전역하게 된 기분이었다.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해방의 기쁨과는 별개로 찾아오는 허무함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이란 학문을 연구하고, 밤잠을 줄이며 종이 위에 코피를 쏟고, 마법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묘리에 매료되었다.

그 모든 경험이 벌써부터 미화되기 시작한다.

"시발 어떡하지? 벌써 아련해져."

큰일이다.

이러다가 나중에 '아멜리아 고년 고약하게 괴롭혀대긴 했어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지'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멜리아가 날 놔줄까?"

문득 치켜든 불안함에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건 너무 자의식과잉이었다.

아멜리아는 150년을 살아온 마녀이고 시우는 일개 노예에 불과하다.

그리고 전에 아멜리아가 시우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이 확실히 정리되지 않았던가?

제머나이 백작가가 직접 교섭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멜리아가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조건을 준비할 것이다.

하늘을 보자 어느새 뉘엿뉘엿 저무는 노을.

시우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관리인 숙소 근처에서 담배를 물고 어슬렁거리는 타카쇼였다.

"아이고 나으리 오셨습니까?"

타카쇼는 시우를 보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달려왔다.

익살스러운 타카쇼의 모습에 피식 웃는 시우.

"타카쇼,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하자."

"뭐야, 드디어 따먹었어?"

역시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이는 타카쇼를 끌고 그의 숙소로 들어갔다.

3.

"...아무튼 그렇게 됐다."

싸구려 와인과 말라비틀어진 어포.

마룻바닥에 앉아 술잔을 나누던 시우는 대략 한 시간에 걸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탈출을 위해 마법을 연구하고 있던 일.

쌍둥이와 있던 일...은 19금 에피소드를 빼고 말했고.

마지막으로 제머나이 백작으로부터 현세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보장을 받을 일까지.

팔짱을 끼고 시우의 말에 귀 기울이던 타카쇼는 별안간 벌떡 일어나 헤드락을 걸었다.

"악! 악! 야 뭐해!"

"이 새끼 친구라면서 왜 이렇게 숨기는 게 많아."

"그래서 지금 말해주잖아! 놔 줘봐! 힘 더럽게 쎄네!"

타카쇼는 의외로 괴력의 사나이였다.

거의 녹초가 될 정도로 관자놀이를 압박받던 시우를 풀어주는 타카쇼.

시우는 얼얼한 머리를 잡고 타카쇼를 노려보았다.

타카쇼는 와인 한 잔을 입에 홀라당 털어 넣고는 큼큼 목을 풀었다.

"그럼... 갈 거냐?"

"가야지. 너도 내가 부탁해 볼 수 있어. 들었으면 알겠지만 제법 큰 공을 세웠거든. 넌 나처럼 전속도 아니고 시청 소속이니까 일이 복잡하지 않을 거야."

"그래?"

타카쇼는 못내 섭섭해 보였다.

시우도 사실 썩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5년간 노예 짓을 하면서 가장 많이 정이 들었던 친구다.

그리고 아마 다시 볼 일 없겠지.

"말은 고마운데 나는 여기 남으련다."

"역시 그러냐? 나는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새끼 빈말은, 아직 백작님한테 말도 안 꺼내 봤다면서."

타카쇼는 침대에 털썩 앉아서 낄낄거렸다.

사실 타카쇼는 이곳의 생활을 현대에서의 생활보다 마음에 들어 했다.

시우가 구태여 백작에게 타카쇼의 문제를 먼저 말하지 않을 것도 그가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없으면 이제 휴일에 술집은 누구랑 가냐, 쓰읍."

"너가 좋아하는 마녀님이랑 가면 되지."

사실 타카쇼에게는 갑작스러운 소식일 것이다.

이대로 평생 친구로 지낼 줄 알았던 시우가 혼자서만 지구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꽤 충격이 크겠지.

게헨나에 혼자 남아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을 텐데도 타카쇼는 진정으로 시우를 축하해주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시우를 끌어안고 등을 팡팡 두드린다.

"그래도 잘됐다. 진짜 잘됐어. 넌 나랑 다르게 똑똑하니까 나가서도 잘 지낼 거야."

거의 예상했던 대로의 일인데도 어쩐지 코가 시큰거렸다.

"야, 내가 너 보면서 매일 쪽발이라고 하긴 했는데. 진심 아니었던 거 알지? 그 동안 정말 고마웠다. 너 없었으면 진작에 탈주하다 걸려서 선착장으로 끌려갔을 거야."

"나야말로 말 통하는 사람 있고 좋았지."

그렇게 뜨거운 사나이의 포옹을 끝내자 타카쇼는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찡그리며 울음을 참고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우냐?"

"시우야."

타카쇼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고 숨을 고른 다음에 말했다.

"내가 만약 마법에 걸려서 귀여운 여자아이로 TS된다면, 그리고 마녀가 되어서 밖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된다면...."

타카쇼는 해맑게 웃었다.

산뜻하게 반짝이는 눈물.

"꼭 널 찾아내서 한 번 빨아줄게."

타카쇼의 농담에 소름이 쭈뼛 돋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이 아니라 아까 호문쿨루스보다 타카쇼 쪽이 무섭다.

"개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먹자."

"그래, 간빠이!"

쌓인 얘기들, 앞으로 하지 못할 얘기를 나누려면 오늘은 술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불현듯 타카쇼가 말을 꺼냈다.

"야 근데 갑자기 든 생각인데. 우리 이 궁색 떨었는데 아멜리아가 너 안 놓아주면 어떡하냐?"

"그때는 뭐, 마법 연구 다시 해야지."

"느낌 싸한데."

"뭐가 싸해. 좀만 더 있다 가면 되는 건데."

그렇게 해가 저무는 것을 보며 두 사나이의 우정은 깊어져 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