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1.
"조수님, 새로 깨달은 게 있다면 해봐야 할 일이 있잖아."
반쯤 멍하니 손바닥을 들여다보길 반복하는 시우를 오딜이 재촉했다.
그의 새로운 능력을 보고 싶다는 모양새다.
사실 시우도 당장 이 그림자를 다뤄보고 싶었다.
기존의 마법 지식에 접목한다면 아까 호문쿨루스가 활용하던 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마법을 구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무리에요."
시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몸 안에 회로가 너덜너덜해져서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어요."
겉으로 난 상처는 12개의 주사 구멍과 퉁퉁 부어있는 발목 정도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마법 회로는 아직도 간헐적인 통증이 느껴졌다.
"아차, 그렇네. 그럼 일단 저택으로 돌아갈래?"
"그래요! 스승님께 치료를 부탁드릴게요.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 훨씬 빨리 편해질 거에요!"
그래도 괜찮을까?
시우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마법을 사용한 사실이 드러난다.
이미 시우가 마법을 부린다는 사실을 아는 건 소피아 쌍둥이를 포함해 세 사람이나 되긴 한데.
잠깐 고민하던 시우는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괜찮습니다."
금쪽같은 견습마녀의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지만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건 그 견습마녀와 육체적으로 놀아났다는 것도 사실이다.
세 사람이 입만 꾹 다문다면 별일 있겠냐만 그래도 괜히 찔렸다.
백 년 넘게 살아온 노련한 마녀라면 금방 수상한 분위기를 읽을지도 모르고.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게 들킬까 봐 그래?"
"그건 괜찮을 거예요. 저희가 좋게 말씀드릴게요. 엄청난 선물을 주실지도 몰라요!"
그런 사정까지는 미쳐 고려하지 못한 것인지 어째 쌍둥이는 시우를 스승님에게 꼭꼭 소개해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극구 사양한 뒤에 상황 정리를 시작한 시우.
사실 이 일을 어떻게 무난하게 덮을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득해진다.
라티푼디움의 나무만 절반 가까이 부러져 나갔고, 전투의 흔적도 역력한데 과연 이걸 없던 일처럼 덮을 수 있을런지...
"흠... 어쩌지? 우리도 가능한 조수님이 원하는 대로 입을 맞춰주고 싶은데."
"하지만 저희가 호문쿨루스를 잡았다고 한들 스승님은 믿지 못하실 거예요. 심지어 그노시스의 알도 시우님이 가져가셨잖아요."
"원상 복귀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없나요?"
"이 정도 난장판은 무리지."
사실 큰 기대를 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쌍둥이와 영산 밖으로 나서며 이런저런 상의를 해보았지만 사고의 스케일이 너무나 컸다.
어떤 식으로든 제머나이가 시우를 주목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정말 수가 없네요.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래도 스승님이 알게 되어도 별 상관없을 것이라며 바람을 넣던 쌍둥이긴 한데.
영 불안한 건 왜일까.
하지만 시우와 쌍둥이의 고민은 큰 의미가 없어졌다.
영산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눈앞에 나타난 인물 때문이었다.
""앗! 스승님!""
""요 말썽꾸러기들!""
동시에 성큼성큼 다가와 오딜과 오데트의 머리에 각각 꿀밤을 놓는 두명의 여성.
달리 말할 것이 있을까?
견습마녀의 스승이자 현 제머나이 백작.
오딜과 오데트의 스승인 알비레오 제머나이.
그리고 데네브 제머나이였다.
2.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던 만큼 시우는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두 제머나이, 알비레오와 데네브, 를 관찰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스승이 쌍둥이를 엄하게 꾸짖는 동안 모습을 살필 수 있던 것이지만.
"스승님 그게 아니라요...!"
"누가 멋대로 영산에 들어가랬니!"
"안 그래도 마력의 헝클어짐이 감지돼서 위험하다고 누누이 말했는데!"
"자...잘못했어요..."
우선 뭐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의외이다.
말괄량이인 쌍둥이만 보고 지내서인지 제머나이 백작들 역시 통통 뛰어다닐 것 같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보니 정숙한 귀부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요 호문쿨루스가 나타났는데요!"
"저희가 시선을 끄는 동안 조수님이 콰앙! 마법으로 퇴치해버렸어요."
"요 녀석들 봐라? 뭘 잘했다고 이렇게 헤실거려!"
"으으으...! 아파여...아파여..."
물론 쌍둥이를 혼내고 있는 지금은 영락없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저기 가서 손들고 서 있으렴."
"힝."
"네...."
30분 정도의 해명과 꾸지람으로 시끄럽던 마차는 쌍둥이가 나란히 무릎 꿇고 손을 들면서 조금 잠잠해졌다.
"후우.... 데네브 차를 준비해줘."
머리에 열이 나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긴 알레비오가 목석처럼 앉아있던 시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듣자 하니 우리 말썽꾸러기들을 구해줬다죠?"
먼저 말을 꺼낸 알비레오.
자색의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이라는 점은 오딜과 쏙 빼닮았지만 이외는 영 딴판이다.
번 형태로 말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와 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미시 드레스 덕에 굉장히 성숙해 보였다.
어쩌면 소피아만큼이나 풍요로운 가슴 때문일지도 모르고.
처음엔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시우를 훑어보던 그녀는 쌍둥이의 설명과 해명이 끝날 무렵엔 눈빛이 변했다.
거의 찬송에 가까운 열혈한 변호 탓인지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포근한 호의로만 가득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머, 겸손하시긴."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시우의 찻잔에 차를 따르는 사람은 데네브.
아마도 이쪽이 여동생 같았다.
두 명의 제머나이를 백작을 처음 보고 가장 시우를 놀랍게 한 것은 데네브의 외형이었다.
오딜과 오데트처럼 쌍둥이임은 분명한 듯 외형부터 체형까지 쏙 빼닮긴 했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데네브가 알비레오와 구별되는, 눈처럼 하얀 백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눈썹도 속눈썹도 모두 새하얀 그녀의 모습은 신비로우면서도 신성한 느낌을 풍겼다.
이래서 흑과 백의 쌍조라는 이름이 붙은 거구나.
시우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현세에서 온 노예 출신이란 말이죠?"
"낙인도 없는데 이 정도 마법을 구사하다니. 대견한데요?"
자연스럽게 시작된 티타임.
괜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체모의 색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빼닮은 두 쌍의 눈동자가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 좋게 봐주셔서..."
"잠깐, 그 전에."
두 손이 동시에 시우의 뺨으로 뻗어온다.
좋은 냄새가 나는 손끝이 슬쩍 시우의 뺨을 어루만지자마자 아까부터 은은하게 남아있던 전신의 여통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워낙 엉망진창이라 치료를 해두었어요."
"괜찮나요?"
"감, 감사합니다. 굉장히 편해졌네요."
놀라웠다.
고작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모든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덜너덜하다는 표현이 걸맞았던 마력회로도 퉁퉁 부어가던 발목도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과연 백작의 칭호를 부여받은 제머나이.
마도구로 유명한 가문이긴 하지만 마법의 경지도 까마득한 것이다.
"용기내어 우리 말괄량이들을 구해준 건 고맙지만 앞으로 그런 마구잡이식의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기지를 발휘해 호문쿨루스를 해치운 것은 놀랍네요. 탄복했어요."
"당치 않습니다."
시우는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과 같은 이유로 시우는 이 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지금은 당연히 은인 대우를 해주겠지.
애지중지 키워온 딸내미를 구해낸 영웅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러나 시우가 오딜과 오데트의 뒷구멍에 했던 짓을 알게 돼도 지금 같은 환대가 이어질까?
"은혜를 입었다면 갚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겠죠."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보겠어요?"
가끔씩 쌍둥이가 펼치는 기묘한 화법이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마치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화법이야 어찌 됐건 시우는 이미 제머나이 백작이 원하는 것을 물어볼 경우에 대한 답을 정해두었다.
"혹시 게헨나에서 나가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미 입 밖으로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만 그래도 뭔가 위축된다.
요구를 들은 두 사람이 지그시 시우를 바라보았으니 말이다.
"........"
"........"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님에도 백작의 침묵은 길었다.
괜스레 불안해진 시우가 슬쩍 되묻는다.
"어려운 부탁일까요?"
"아니요, 무척 쉬운 부탁이에요. 하지만 좀 의외여서요."
의외?
이곳의 노예 생활이 질렸다는데 의외랄 게 있나?
시우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데네브의 설명이 이어졌다.
"열악한 상황에서 호문쿨루스를 쓰러뜨릴 정도의 성취를 이뤄낸 당신이라면 조금 더 마법에 애착과 열의가 있으리라 생각했거든요."
"게헨나만큼 마법을 익히기 좋은 곳은 없으니 당연히 이곳에 남을 줄 알았고요."
그건 그렇다.
가장 처음 시우가 마법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막역히 게헨나를 나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생각도 변하는 법이었다.
원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마법은 시우에게 새로운 성취감과 탐구심을 안겨주었다.
결정적으로 오늘 보았던 아인의 모습은 아직도 커다란 충격으로 남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으니까.
"네,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콜라도, 치킨도, 피자도,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도, 스모그로 가득 찬 도심의 풍경도, 풀 HD로 보는 야동까지 모두 그리웠다.
"겨우 그걸로 괜찮은가요?"
"자그마치 제머나이 가문의 은혜를 입은 것인데요? 시민증을 주고 마법연구를 돕는 조수로 고용해 줄 수도 있어요."
제머나이는 시우의 소박한 소원이 알쏭달쏭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관심은 시들해졌다.
시우에게 있어 게헨나 탈출은 일생일대의 소원이고 이 테이블은 그 자유를 얻기 위한 협상 테이블이다.
그러나 제머나이에겐 고작 노예 하나가 현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작은 부탁일 뿐이다.
들어주는 데 아무런 부담이 없는 손쉬운 요구 말이다.
"바로 수속을 밟아 드릴게요."
"어디 소속인가요? 아카데미면 시청이겠죠?"
"아..."
그 순간 하나 놓치고 있던 것이 떠오른다.
"그게... 사실 저는 아멜리아 님의 전속 노예입니다. 이게 문제가 될까요?"
"전속 노예?"
비록 품위를 위해서인지 금방 수습하기는 했지만 찰나의 순간 두 쌍둥이의 표정에 곤혹이 스쳐가는 것을 시우는 놓치지 않았다.
어째 불길한데.
"음..."
"이걸 어쩌나..."
가벼운 탄식.
시우의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게헨나에서 전속 노예란 사유재산을 의미해요. 당신이 그저 시청 소속이라면 저희가 몸값을 지불하는 걸로 그만이지만 이 경우에는 메리골드 남작의 허가가 필요하겠죠."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충분히 합당한 보상을 제공한다면 그녀도 굳이 당신을 붙잡고 있진 않을 테니까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갈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아멜리아의 전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건데.
'그때 그 코인을 타면 안 됐어!' 같이 어두워지는 시우의 표정에 알비레오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가 충분히 납득할 수준의 몸값을 준비해 제안할게요."
"감사합니다."
이걸로 끝?
마녀들은 찻잔을 홀짝였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저, 그럼 언제쯤 나갈 수 있게 될까요?"
"백작가의 공무도 있고 남작과 협상할 재료도 필요하니..."
"대략 일주일 정도일까요?"
고작 그거?
5년을 기다렸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얼떨떨하게 자유 쿠폰을 얻어낸 시우는 그 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고싶은 마음을 숨겼다.
지난 3년간 마법 연구가 헛수고가 된게 아니냐고?
그 마법 연구가 없었으면 이런 특혜를 얻을 일도 없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 일로요."
"마땅히 해드려야죠."
아멜리아가 어떻게 나올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설마 별일 있겠어?
안 그래도 부유하기로 이름 높은 제머나이 백작가다.
그런 그녀들이 은혜를 갚기 위해 준비한 몸값이라면 아멜리아라도 충분히 만족할 재화일 것이다.
"그럼 저희는 먼저 영산의 상태를 살피러 가보겠어요. 말썽꾸러기들~"
"네!"
"네! 스승님!"
구석에서 손을 들고 있던 오딜과 오데트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다닥 테이블로 달려온다.
"제대로 감사 인사는 했니?"
"물론이죠!"
"신분에 상관없이 은혜를 입었으면 걸맞은 예우가 필요한 거란다.
거기엔 물질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정성도 필요하지."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솔선해 시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갚기 힘든 빚을 지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고, 고개를 드시지요. 과분합니다."
시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쌍둥이를 구했다지만 시우는 노예에 불과하고 제머나이는 백작이다.
이 세계에 일곱밖에 없는 백작 말이다.
"은인에겐 합당한 예를 표하는 것도 귀족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이죠."
"당신이 나아갈 길에 마나의 축복이 가득하길."
제머나이는 몸 둘 바를 모르는 시우의 손등에 차례로 키스하고는 쌍둥이의 등을 떠밀었다.
""조수님,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쌍둥이는 낯간지럽다는 미소를 숨기며 예의 바르게 배꼽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