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1.
오딜이 호언장담했던 대로였다.
마녀들 입으로 들어가는 게헨나의 대부분의 먹거리가 그렇지만 오딜이 몰래 숨겨놓은 포도주는 그야말로 미주 그 자체였다.
오렌지 주스는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전부 마셔버렸고 컵도 놓고 왔기 때문에 빙 둘러앉은 셋은 병을 돌려가며 병나발을 불었다.
-벌컥벌컥벌컥
꿀꺽꿀꺽 잘도 포도주를 삼키는 오딜.
그녀는 병을 내려놓자마자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술 냄새를 풀풀 풍겼다.
"흐아...."
향과 맛이 뛰어나다는 건 알겠지만 솔직히 시우의 입맛에는 너무 달았다.
사실 첫 모금을 마셨을 때 포도 주스라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오딜 님 이제 그만 마시는 거 어떨까요?"
"무스은 소리이~,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에는 잔뜩 잔뜩 마셔야지!"
그거 얼마나 마셨다고 혼자 고주망태가 되어가는 오딜을 시우는 염려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데트 님 언니 안 말려도 되나요?"
"가끔 저러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쿨쿨 자거든요. 언니! 혼자만 들고 있지 말고 나도 줘!"
오딜이 앉은 자세에서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알코올의 여운에 취해있는 동안 오데트는 술병을 뺏어서 몇 모금인가를 마셨다.
샌드위치를 하나 주워들어 우물거리며 이번엔 시우에게 술병을 건넨다.
같은 쌍둥이이고 분명 비슷한 양을 마셨을 텐데도 두 사람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오딜은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며 휘청이는 반면 오데트는 뺨에 홍조나 조금 생겼을지언정 아주 꼿꼿하게 앉아있다.
"술이 세시네요."
"네, 사실 한번도 취해본 적 없어요. 여기, 조수님도 드세요."
"감사합니다."
처음엔 완전히 입을 대고 마시던데 이것도 간접키스로 쳐야 하나 싶었는데.
별의별 일을 다 겪어놓고 그걸 의식하는 게 이상하다 싶어 중간부터는 맘 편히 마시는 중이다.
"음... 굉장히 달달하네요."
"솔직히 스승님이 마시는 와인은 너무 써요. 그런 걸 왜 드시는 걸까요?"
역시 꼬맹이구먼.
인생을 너무 순탄하게 살아와서 그렇다.
"헤우웅....."
-쾅!
그때 오딜이 우당탕 소파 위에서 떨어졌다.
돌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이마가 바닥에 부딪혔는데도 바닥에서 꿈틀거릴 뿐 일어날 생각조차 않는다.
죽었나?
"오딜 님!"
기겁을 하며 달려간 시우.
바닥과 뜨거운 해후를 나누고 있는 오딜을 일으켰다.
물을 머금은 솜처럼 축 늘어진 오딜이지만 역시 가볍다.
"으으... 바닥이 꿀렁꿀렁거려..."
"으이구, 그러게 적당히 드셨어야죠."
가장 무난하게 오딜의 팔아래 손을 넣어 일으키려던 시우는 깜짝 놀랐다.
엎어지면서 망토 앞자락이 벌어져 있어 대강 안으로 손을 넣었는데 맨질맨질한 오딜의 겨드랑이가 그대로 만져진 것이다.
"하흐음...! 뭐...뭐야...! 간지럼태우지 마아..."
간지러움을 느낀 오딜이 확 겨드랑이를 조였기 때문에 손을 빼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어쩐지 오늘 편하게 입고 왔다 싶더니.
망토 안이 민소매 드레스였던 모양이다.
다른 곳보다 묘하게 온도가 높고 살이 조금 더 손에 감기는 느낌이었다.
시우는 뭔가 매혹적인 겨드랑이의 감촉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흐느적거리는 오딜의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흐아...."
"어우, 얼마나 마셨다고 이렇게 취하셨어요."
"소파 싫어... 저 소파 딱딱해..."
정작 소파에 눕히려 하자 오딜은 코알라처럼 시우의 옷깃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는 짓이 한 5살은 더 어려진 것 같다.
"오데트 님, 오딜 님 술버릇 원래 이런가요?"
"네, 비슷해요. 도와드릴까요? 어?!"
시우를 돕기 위해 다가오던 오데트는 제자리에 멈춰서 입을 가렸다.
저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시우의 목을 끌어당긴 오딜이 그와 입을 맞춘 상황.
어찌나 세게 와서 키스하던지 그녀의 앞니에 부딪힌 입술이 슬쩍 찢어지며 피 맛이 났다.
"하움... 츄웁...쮸우웅...."
한참이나 시우의 얼굴을 붙잡고 끈적한 키스를 퍼붓던 오딜은 그게 마지막 짜낸 힘이었다는 듯이 털썩 소파 위로 쓰러졌다.
"코오....."
그리고 코를 골면서 잠을 자기 시작한다.
하긴 어제도 밤늦게 집에 돌아갔고 오늘도 시우보다 빨리 소풍을 준비해야 했으니 당연히 피곤했을 것이다.
시우는 입술에 듬뿍 묻은 오딜의 침을 소매로 닦으며 어정쩡하게 오데트를 돌아보았다.
오데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소파에 녹다운 해버린 오딜과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오딜 님이 술버릇이 참 고약하시네요."
끔뻑끔뻑.
호흡도 멈춘 채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는 오데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괜스레 머쓱했다.
"조수님."
한참을 생각한 듯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던 오데트가 시우를 불렀다.
큰 결심을 한 눈초리라 지레 걱정이 된다.
"네, 오데트 님."
"어젯밤에... 조수님 숙소로 언니가 찾아갔었나요?"
"그...음..."
"예정에 없던 조수님이 동행하시기로 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언니가 밤중에 잠깐 사라졌다는 것도 어렴풋이 기억나구요."
사실 오데트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는 불명이었지만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발뺌할 수는 없었다.
"네, 오딜 님께서 찾아오셨었습니다."
망토 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오데트는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서 시우에게 걸어왔다.
"혹시... 어제 언니랑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이번엔 한층 더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오데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고, 오딜이 굳이 여동생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였을 테니까.
오딜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
"그냥,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거짓말."
"네?"
"거짓말이잖아요."
쌍둥이가 굉장히 시우에게 호의적이긴 하지만 게헨나에서 셋의 신분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오데트가 대놓고 꼬장을 부리거나 빈정이 상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상황이 복잡해질 상황이기도 하고.
"......."
그래서인지 시우는 쉽사리 거짓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저, 저는 남성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모르지만... 언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
"오늘 조수님을 대하는 언니의 모습은 평소랑 달랐어요. 분명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제야 시우는 천진난만한 순둥이가 어떻게 위화감을 감지해 낸 것인지 알아차렸다.
아무리 오딜이 태연하게 군다지만 그만한 사건이 있었는데 평소와 똑같을 수는 없지.
시우는 눈치챌 수 없었던 언니의 변화에서 오데트가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저는 조수님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는데... 조수님은 제게 거짓말을 하시네요..."
시우는 입을 벌렸다 닫았다만 반복할 뿐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저와 조수님은 이제 장래를 약속한 사이잖아요. 그런 사이에서 거짓말은 더욱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장래를 약속?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저, 오데트 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착각이 아니에요! 그날 이후로 저 한참이나 혼자 생각해 봤어요."
오데트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진솔한 목소리였다.
웃음기나 장난기가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더 오싹하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징조였으니 말이다.
"저는 조수님 께... 제 알몸을 보여드려 버렸어요. 게다가, 게다가... 가장 부끄러운 부분끼리 맞닿기도하고... 그리고 저는 항상... 조수님만 생각하면서 혼자 몸을 만졌는걸요..."
오데트의 얼굴을 술기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금 술에 잔뜩 취해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오딜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오데트 님 많이 취하셨네요."
"취한 게 아니에요! 비록 조수님이 노예이고 대 제머나이 백작의 이름을 이을 제가 훠어어어어얼씬 아깝긴 하지만... 어찌됐건... 제 알몸을 보여드린 상대잖아요... 이제 돌이킬 수 없다구요..."
아하.
시우는 그제야 오데트의 사고를 조금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복잡하거나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쉽고 단순해서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그녀의 발상은 간단했다.
초등학생 때 사귀게 되었던 남학생과 뽀뽀를 한 여학생이 '나는 ㅇㅇ이와 뽀뽀했으니까 결혼할거야!'라고 생각하는 유아적인 사고였다.
나이가 들고 아는 게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땐 그렇게도 생각했었지'라고 털어 넘길 그런 소소한 해프닝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뜬금 자밍아웃도 했던 것일까?
장래를 약속한 사이에는 숨기는 일도 없어야 하니까?
왜 구태여 그런 말을 늘어놓는지 살짝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좀 아다리가 맞는 느낌이었다.
시우는 굳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밝히기보다는 오데트의 잘못된 편견을 바로 잡아주는 길을 택했다.
"오데트 님 잘못 생각하시는 게 있어요. 외간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행동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결혼까지 꼭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에도 거짓말인가요? 그런 거 속지 않아요!"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지.
시우는 여유롭게 성교육 2교시를 이어갔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주제가 가벼워서 다행이다.
"그럼 오딜 님은요? 오딜 님도 저에게 알몸을 보이시지 않았습니까?"
"제 몸만으로는 만족 못 하시고 언니까지 노리고 있던 건가요...?"
근데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저로는 부족하다고 말하시는 거예요?"
오데트는 잔뜩 토라진 목소리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저한테 거짓말만 하고 언니도 제게 아무 말도 없이 조수님을 찾아갔잖아요. 조수님만큼은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도 알 건 다 알아요."
그건 좀 곤란하다.
그렇다고 어제 오데트 님의 언니 분과 뒷구멍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지 실험을 한 뒤 살짝 끝에만 넣어봤습니다.
라고 말할까?
대책 없는 호기심에서 나오는 오딜의 추진력도 부담스럽지만, 무구함에서 나오는 오데트의 저돌성도 너무나 다루기 까다롭다.
"오데트 님,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시우가 말하기에 앞서 오데트가 입을 벌렸다.
" ♫ ~♪ "
그리고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일전에 오딜이 사용했던 자성마법 중 하나 '자백의 시'와 정확히 같은 멜로디였다.
워낙 충격적인 경험을 가져다주었던 마법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 이제 말해보세요. 어제 언니랑 무슨 일이 있었죠?"
이 마법의 위험성은 진즉에 체감한 뒤이다.
시우는 다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그러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입이 벌어진다.
손바닥도 완전히 입을 가리려는 순간 방향이 비틀려 버렸다.
마법에 의해 꺼내진 시우의 속내가 고스란히 오데트에게 전해졌다.
"오딜 님의 뒷구멍에 손가락을 넣었습니다."
"힉!"
오데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화들짝 놀랐다.
"역시, 역시, 역시... 언니랑은 또 그런 짓을... 다 말해요! 더 뭐 했어요?"
"크...크윽... 제 성기도 삽입했습니다."
"그때처럼...?"
"네, 하지만 사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단순히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정도로 심약한 것은 아닌지 그저 경악만을 거듭하는 오데트.
"왜요? 왜 그런 짓을 했죠?"
시우는 입을 틀어막으려는 시도도 포기했다.
오딜한텐 조금 미안하게 됐다.
"오딜 님이... 자위하시다가 혼자서는 느끼지 못하신다는 점을 깨닫고 절 찾아오셨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둘이라면 느낄 수 있다고, 그걸 검증해 보자고 말씀하시면서요."
오데트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오딜을 노려보았다.
"또 치사하게 지 혼자서만..."
"오데트 님을 걱정하셔서 그런 걸 겁니다."
"됐어요! 그래서, 언니는 기분 좋아했어요?"
뭐가 그리 분한지, 아니면 그저 혼란이 거듭된 것인지 씩씩거리는 오데트.
"네, 내색은 않으셨지만... 드로어즈까지 애액으로 푹 젖으셨습니다."
"애액...으로 푹 젖어...?"
오데트는 어질어질한지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한참 동안 소파에 퍼질러져있는 오딜을 노려보던 오데트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저도 똑같이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