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2화 (52/917)

#52

1.

영산.

일찍이 알고 있던 대로 제머나이 백작과 케테르 공작이 공동소유한 마법 작물 재배 플랜트.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마법 작물이 생산하는 곳은 영산 자체가 아니라 영산의 산기슭이 U자로 만나 협곡을 형성한 '라티푼디움(Latifundium)'에서 이루어진다.

마법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마력수를 무화(霧化)시킨 안개가 필수적인데 이 안개를 가두는데 최적의 형태를 지닌 곳이 산을 가로질러 발생한 협곡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산은 라티푼디움을 품고 있는 모양새였다.

"와...."

시우는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말로만 들어왔지 이렇게 입구부터 절경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흔히 협곡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바위투성이의 이미지가 아니다.

폭이 10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협곡은 입구부터 위용이 남다른 나무들로 빡빡하게 삼림을 짓고 있었다.

"대단하지? 요즘은 휴한기라서 다른 관리자들도 없어. 이렇게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는 건 지금뿐이라고."

오딜은 자기 집에 있는 금송아지를 자랑하는 표정이 되었다.

굉장히 뻐기는 표정인데 그럴만하다.

"들어가 보면 더 놀랄걸?"

길이 울퉁불퉁 거리기 시작했기에 마차를 세우고 함께 걷기 시작한 삼인방.

가까이 다가갈수록 목이 꺾여지라고 하늘을 보아도 나무 끝을 시야에 담기가 힘들다.

라티푼디움을 가득 채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이었다.

마치 세계수가 몇 그루씩이나 있는 것 같다.

"휴한기는 뭔가요?"

"영산은 지력이 굉장히 강한 곳에 위치 해 있지만요 그래도 마법 작물들을 너무 많이 기르다 보면 땅이 금방 지쳐버려요. 6년 동안 재배가 끝나면 1년 동안은 잠깐 쉬어주는 거예요. 화학비료를 뿌릴 수는 없으니까요."

오데트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협곡으로 걸어 들어가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밤이 된 것처럼 어두컴컴해졌다.

양옆이 산에 딸린 절벽인 데다가 무성한 가지와 잎이 천장이 되어 하늘을 한치도 빠짐없이 가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오데트와 오딜은 당연하다는 듯이 장식불을 세네 개씩 만들고 총총 앞장서 걸었다.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며 따르는 시우.

예전에 수학여행으로 동굴에 갔던 적이 있는데 사방이 어둡고 습해서인지 큰 규모의 동굴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30M쯤 나아갔을까?

시우 일행을 반겨준 것은 까마득한 높이부터 바닥까지 커튼처럼 드리운 덩굴식물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분명했다.

마치 극장에 있는 막처럼 일자로 늘어서서 협곡 전체를 가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건 뭐죠?"

"여기부터가 본격적인 생산구역이야. 마력수로 만들어낸 안개가 빠져나가지 않게 가림막을 쳐놓은 거지."

"조수님 저희한테 꼭 붙으셔야 해요. 통행증은 하나거든요."

"네."

시우는 좀 전보다 훨씬 쾌활해진 오데트의 손에 이끌려 바짝 붙어섰다.

오딜이 소매를 걷자 나무 씨로 만들어진 것 같은 묵주가 드러난다.

묵주에서 뿜어져 나온 옅은 빛이 덩굴을 비추고, 그에 겹겹이 드리웠던 덩굴식물이 도미노처럼 걷히며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시우는 영산이 왜 그렇게도 아름답다 칭송받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요정의 숲.

요정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몽환적인 풍경이요 분위기이다.

커다란 숲길 사이로는 한 줄기의 좁은 강이 흐른다.

뿌연 안개는 호흡마다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거대한 나무들은  라티푼디움을 지탱하는 기둥처럼 곳곳에 우뚝 곧게 서 있다.

여기까지라면 지구 어딘가에는 충분히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조수님 입에 주먹도 들어가겠어요."

"우리도 처음 왔을 때 딱 이랬는데."

키득거리는 쌍둥이의 웃음소리도 귓가를 휑하니 스쳐 갈 뿐.

시우는 남은 절경을 구경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가지마다 열매처럼 매달려있는 커다란 유리병에서는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고, 그 속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풍등 축제의 한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그대로 고정해 놓은 것 같았다.

그 덕에 협곡의 중간으로 걸어왔음에도 어지간한 곳은 가로등을 밝힌 것처럼 훤히 보였다.

"저건 뭔가요?"

자세히 보면 마치 링겔처럼 유리병에서 뻗은 호스가 나무의 뿌리를 향하고 있다.

"일종의 영양제야. 나무에 이런저런 시약을 주입해서 마법 작물을 재배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내는 거지. 저렇게 밝게 빛나니까 전등을 겸하기도 하고."

"그럼 저건요?"

시우가 손가락을 옮긴 것은 반딧불이처럼 땅에서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불똥들이었다.

어찌 보면 도깨비불 같기도 한데 아주 느릿한 속도로 천천히 상승한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여기는 마력의 농도가 엄청 높아서요. 수시로 마력반사광이 자연 발생해요."

"어마어마하네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

상업적인 플랜트에서 미적인 아름다움을 의도했을 리는 없겠지만 대자연과 대마법에 대한 경외심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오길 정말 잘했네요. 이렇게 신기한 곳은 처음 와 봅니다."

"그렇지?"

"조수님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기시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오딜과 더불어 뿌듯해하는 오데트던 실없이 웃으며 시우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꽤 거리감이 없어진 행동이라 이전보다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우선 여기서 쉴 수는 없으니까 생산관리동으로 이동할 거야. 발 조심하면서 따라와. 여긴 1년 내내 습해서 미끄럽거든."

밟고 서 있던 나무뿌리에서 폴짝 뛰어내린 오딜.

거목의 위용의 걸맞게 노면으로 드러난 나무뿌리가 거의 트럭만 했기에 시우는 조금 놀랐다.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강 옆길을 따라 걷는다.

수면이 빛과 상관없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이 안개를 만드는 마력수가 아마 이 강물인 모양이다.

온도 자체는 생각보다 서늘했다.

습기만 봐서는 열대우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인데.

"조수님 마법 작물에 대해서는 좀 알아?"

"아니요, 연금 쪽은 거의 모릅니다. 거기까지 공부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요."

"그럼 영창 마법과 마법진만 연구하시는 건가요? 제일 재미없는데..."

"아무래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긴 했죠."

"그럼 좀 설명이 필요하겠네."

그렇게 하여 시작된 오딜의 세계관 풀이.

"마법을 통해 변이를 일으켜 재배시킬 수 있는 식물은 꽤 한정적이야."

"보통은 이끼 식물 또는 버섯 종류를 많이 재배해요. 품종개량도 쉽고 관리도 훨씬 쉽거든요."

이러고 보니 나무와 바위에 붙어있는 것들은 대부분 이끼 아니면 버섯이다.

모양새가 워낙 특이해서 눈에 확 들어왔다.

은은한 분홍색을 띠는 이끼라던가 밝은 형광이 스탠드처럼 뿜어져 나오는 버섯이라던가.

"저건 양송이버섯인가요?"

그중에서 굉장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버섯 하나를 가리키며 묻는 시우.

나무 옹이에 옹기종기 모여 피어 있었는데 생긴 것은 영락없이 삼겹살집에 나오는 양송이다.

"드셔보실래요? 꺅!"

그렇게 말하는 오데트의 엉덩이를 오딜이 힘껏 때렸다.

"큰일 날 소리!"

"어, 언니이... 농담이잖아...!"

"절대 그러면 안 돼. 대부분의 마법작물은 생으로 먹으면 해로워. 괜히 재료 손질할 때 최소 사나흘씩 길게는 몇 년씩이나 해독작업을 거치는 게 아니야."

"그, 그렇군요..."

비단 풍경뿐 아니라 여기서 자라나는 각종 재배작물도 시우에겐 관심거리였다.

책에서 텍스트와 삽화로만 보던 물품들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별천지에 온 기분이다.

"저건 뭔가요?"

" '붉은뿌리이끼'에요. 무효화의 성질을 강하게 띠고 있어서 보통 중화제로 많이 쓰여요."

"그럼 저건요?"

"흰갓광대버섯이야. 생으로 먹어도 괜찮은 몇 안 되는 버섯인데. 대뇌피질에 작용해서 사고와 계산속도를 가속해."

"일종의 오버클럭이네요."

"그런 셈이지. 근데 제머나이 님이 저건 손대지 말라고 하셨어. 저 버섯에 의존하면 일시적으로 능률이 향상돼서 위대해진 기분은 들지만 결국 그건 자기 실력이 아니래.

뭐 사실 위계가 올라갈수록 별 효용이 없기도 하고."

오딜과 오데트는 쉴 새 없이 시우에게 작물들을 가르쳐주었다.

예쁜 가이드 둘과 식물원에 온 기분이다.

깊숙히 들어갈수록 폭이 좁아진 마력수의 강은 어느새 개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얕아져 있었다.

"웃차!"

오딜과 오데트는 그 위로 난 징검다리를 깡총깡총 뛰어가며 앞장섰고 시우는 바구니를 든 채 조심스럽게 건너편으로 건넜다.

야트막하게 경사진 이끼 언덕을 올라가자 제법 넓은 평지가 등장했다.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수액들이 이번에는 땅에 병째로 꽂혀있다.

연보라색, 연두색, 연분홍색.

아무튼 연한 색을 지닌 안개 무리 같은 것이 넘실거리며 피어오르고 있다.

"이쪽은 뿌리 작물을 기르는 곳이야. 멘드레이크 정도는 들어봤지?"

"그 뽑으면 소리 지르는 그거요?"

시우의 어수룩한 반응에 오데트는 밝게 웃었다.

"예전에는 훔쳐 가는 사람이 많아서 마녀들이 밭 전체에 환각마법을 걸어 놓았대요. 환각제나 최음제로 활용되는 탓에 인기가 많던 식물이었거든요."

"그게 와전된 거지."

"이제 슬슬 다 왔어. 조금 쉬자."

그나저나 아무리 휴경지라고 해도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다.

이런 멋진 광경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다니.

뭔가 놀이공원을 전세 내면서 노는 기분이라 가슴이 뛰었다.

"이쪽!"

마침내 도착한 곳은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참나무였다.

나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무 중턱에 전에 보더 타운에서 봤던 것처럼 트리 하우스 한 채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훨씬 까마득한 높이에 있었지만.

"여기가 생산관리동이야."

나무 주변을 나선형으로 감싸는 계단을 올라 관리동으로 들어갔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것보다 높이도 높고 계단도 뭔가 엉성해 보여서 현기증이 나서 애를 좀 먹었다.

마녀들은 높은 곳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지, 게헨나에서 트리하우스가 유행인 건지 유독 인연이 많다.

"이제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그냥 창밖으로 예쁜 풍경 보면서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하는 거지."

덜덜 떨리는 다리를 끌고 도착한 트리 하우스.

방안은 넓이에 비해 굉장히 삭막했다.

아멜리아의 연구동처럼 뭔가 쓰여있는 종이와 서류만 가득하고 쉴 수 있는 곳이라고는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소파가 전부이다.

그래도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만큼은 장관이었다.

왜 이렇게 쓸데없이 높은 곳에 지었는지 궁금했는데.

밖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트리하우스에서는 라티푼디움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예쁘지?"

멍하니 감상하는 시우의 옆으로 쏙 오딜이 끼어들었다.

신비로운 부감이 마음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조금 막 나간 생각이지만 근사한 호텔을 잡고 예쁜 여자친구와 야경을 보는 기분이 되었다.

"조수님이 좋아하셔서 다행이에요. 저희 언니가 억지로 끌고 온줄 알고 걱정했지 뭐예요?"

이에 질새라 반대편에서 오데트가 쏙 나왔다.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사실 오딜도 오데트도 감당하기 어려운 소녀이다.

둘이 동시에 있을 때는 특히나 더.

"슬슬 바구니를 열까요?"

"마침 뭔가 먹고 싶던 참이었어."

"좋아요!"

"기다려 봐, 내가 오늘을 위해서 준비한 게 있거든."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은 바구니를 여는 사이 방구석 캐비넷을 뒤적이던 오딜이 커다란 병 하나를 들고 왔다.

병 길이만 거의 오딜의 상반신만하다.

장난스러운 오딜의 표정을 봤을 때 와인이었다.

"언니! 그거 언제 숨겨놨어?"

"조수님한테 저번에 말했잖아. 멘델 구릉의 적포도주를 맛보여 주겠다고."

"그걸 여태 기억하셨어요?"

"그럼~ 나는 약속은 잊지 않는다구."

와인?

슬쩍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구미가 당긴다.

이런 풍경을 보며 즐기는 술 한잔은 무척 낭만적일 것 같았다.

"어?"

그때 몰래 꼼쳐놓은 술에 방방 날뛰던 오데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의 한구석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방금 밖에 지나가는 거 못 봤어?"

"뭐가?"

"검고 큰 거... 저기 가지 사이를 스쳐서 지나갔던 것 같은데..."

오딜과 시우도 창가에 바짝 붙어서 오데트가 손짓하는 곳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겹겹이 우거진 가지들 사이로 반짝이는 마법수액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장난 그만치고 샌드위치나 먹어."

"장난 아니야!"

"여기 우리말고 누가 있다고 그래?"

"그건 그렇지만... 분명 봤는데...."

"네가 어제 잠을 설쳐서 헛것을 본 걸 거야. 빨리 이거나 마시자."

계속 창밖을 힐끗거리는 오데트를 끌고 들어온 오딜.

그렇게 본격적인 피크닉이 시작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