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1.
유달리 상쾌한 아침이었다.
어젯밤 늦게 잠들었을뿐더러 화장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느라 지쳐있던 몸이 시간이 되자마자 눈을 번쩍 뜰 정도로 말이다.
뽀송뽀송한 파자마 덕이려나.
시우는 등산하기에 적합한 편한 옷으로 작업복을 택했다.
아카데미의 주방에서 아침식사를 받아와 아멜리아의 방으로 넣어준 뒤 샌드위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정원으로 달려 나왔다.
영산이라니!
그토록 가고 싶었던 게헨나의 관광 명소에 발을 들이게 됐다는 것만으로 어깨춤을 추고 싶어진다.
숙소 정문에는 일전에 시우를 납치했던 으리으리한 제머나이 마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막상 올라가려니 조금 망설여진다.
어제 딸딸이를 치면서 떠올렸던 오딜을 마주하는 것도 뭔가 부끄럽고 그날 이후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도 없는 오데트와 함께해야 하는 것도 좀 신경 쓰인다.
"시간이 잘 해결해주겠지."
오데트도 의외로 소탈한 성격이니 마음에 오래 두고 있진 않을 테고 오딜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당장 어제 시우를 다시 찾지 않았던가?
일단 그리 믿으며 씩씩하게 마차 문을 연 시우.
다시 봐도 커다랗고 화려한 마차 내부가 시우를 환영해주었다.
"조수님 시간 하나는 잘 지키네."
"아, 안녕...하세요..."
"마중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초대한 거인데 뭘."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까딱거리는 오딜과 그녀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얼굴을 숨기는 오데트.
드라마나 만화 같은 곳에서 저런 제스처를 취하는 등장인물을 보면 참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썩 위화감 없이 어울려서 시우도 괜히 머쓱해졌다.
그 덕에 편하게 맞이하는 오딜과 달리 오데트에게는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오데트! 쭈뼛거리지 말고 인사드려! 오늘 종일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그치만! 언니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자고로 어른이란 지난 밤의 일은 그날 밤에 묻어두는 법이야."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얼굴을 붉히던 오데트는 결국 마차
안에 있는 방으로 숨어버렸다.
시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을까요?"
"내비 둬 조수님, 저러다가 말 거야."
시우도 묘약을 먹었던 오데트의 모습을 떠올리면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수님을 생각하면서 자위했다느니, 아기를 갖고 싶다느니, 조수님의 아기씨를 난소에 몇 번이고 받겠다느니.
소심한 오데트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발언을 쏟아냈으니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조차 이 지경인데 발언의 당사자가 멀쩡할 리 없지.
사실 오딜이 비정상적으로 회복능력이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 중이다.
지금 그녀의 모습만 봐도 도저히 그 전과 어젯밤에 말못할 19금 해프닝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아니면 부끄러움을 호기심이 뛰어넘었던가.
이런 점만큼은 오딜이 시우보다 더 어른 같아 보였다.
"영산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 그동안 뭐라도 마실래?"
"네, 좋습니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가요?"
"아까부터 달리고 있었어."
"진동이 전혀 안 느껴지네요."
"비싼 값해야지."
이제는 제법 쌍둥이가 편해진 시우는 자연스럽게 오딜을 따라 미니바로 향했다.
그나저나 이 마차, 전용기가 따로 없네.
아주 작은 진동조차도 안으로 전해지지 않고 온갖 편의 시설이 내장되어있다.
오딜은 미니바 안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커다란 바구니 하나를 낑낑거리며 꺼냈다.
"우리가 소풍 간다니까 갈리나가 기어이 이걸 주더라고."
딱 봐도 소풍 바구니.
안에 클럽 샌드위치와 차가 담긴 보온병이 한가득 담겨 있을 것 같은 모양새다.
"우리 여기서 오렌지 쥬스만 미리 꺼내먹자."
"좋습니다."
"오데트! 넌 안 마셔?"
오딜이 큰 소리로 말했지만 오데트 방에서는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딜은 혀를 쯧쯧 찼다.
소리나 모양새가 어색한 것이 아마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 같다.
"이거 안 되겠네. 조수님이 가서 잘 좀 달래줘. 신경 쓰지 않는다, 괜찮다. 정도면 금방 잊어버릴걸?"
"주스 한 컵 주시죠.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딜은 자기까지 같이 갔다간 오데트가 괜한 고집을 부리며 역효과만 날 거라면서 시우만을 보냈다.
생각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대처라 시우는 조금 놀랐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노크 이후 방문을 딸각 열고 들어가자 쿵쾅거리는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
촛불 하나가 유일한 광원이라 굉장히 어두컴컴하긴 했는데 워낙에 방이 작아 오데트를 찾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오데트 님."
오딜도 부끄러울 때는 얼굴을 파묻던데.
이런 점은 쌍둥이여서 닮는 걸까?
오데트는 커다란 소파 사이에 끼어 들어가 등만을 내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시우의 존재 자체를 거절하고 있었다.
"조... 조수님...나가주세요...혼자 있고 싶어요...."
"오렌지 주스 가져왔습니다. 방금 마셔봤는데 아주 시원해요."
시우는 차분하게 오데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오딜 님의 말대로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않아요. 오데트 님도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지 않으셨습니까?"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동요가 작은 등 전체에서 퍼졌다.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소파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치만... 너무 부끄러운걸요...게다가 자칫하면 조수님께 큰 피해가 갈 뻔도 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정말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에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시우가 가슴 졸였던 건 오데트의 격렬한 섹스 시도가 자칫 목숨을 앗아갈 뻔했다는 것이지 오데트의 행동 자체에 남은 감정은 없었다.
엄밀히 말해 죽을 위기였다는 것을 빼면 포상 아니었나?
오데트는 조심조심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곳에서 보자 워낙에 쏙 빼닮은 탓에 순간 오딜과 헷갈렸다.
하지만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고 있는 처량한 표정은 오데트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정말요?"
"그럼요, 다시 그런 실수 안 하시면 되는 거죠."
"제가 조수님 생각하면서... 혼자 한 것도... 용서해 주실 건가요?"
순간 말문이 막힌 시우.
오데트나 오딜이나 가끔 상식적인 면에서 삑사리를 낼 때가 있다.
굳이 여기서 그날의 치태를 입에 담을 필요는 없거늘.
"역시! 역시... 제가 그런 짓을 해놓고 어떻게 조수님 얼굴을 봐요!"
시우의 그런 망설임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다.
오데트는 더욱 서럽게 울부짖으며 소파 사이를 자꾸자꾸 파고들었다.
난감하다.
괜찮습니다.
저도 어제 오데트 님 언니 생각하면서 두 발 뺐어요, 라고 할 수도 없고.
"절 음란하고 절조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시죠?"
여태 남의 고추 가지고 장난치던 사람이 저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다.
탐구심에 의한 호기심과 성적인 호기심을 분류해 놓고 있었다던가...
오데트 나름대로 구분 선이 있던 건지 뭔지.
"그럴 리가요. 오늘은 모처럼 소풍이잖아요? 같이 즐겁게 보내야죠."
살살 어르고 달래는 시우의 말투에 오데트는 다시 조금씩 소파 밖으로 나왔다.
뭔가 재밌다.
"여기요."
"감사해요."
마침내 소파에서 완전히 탈피한 오데트는 보석처럼 반짝이던 눈물을 소매로 쓱쓱 닦고는 시우가 건넨 컵을 받아들였다.
"혹시 여기서 다른 일들도 말씀드려도 될까요?"
오데트는 가슴 앞에 컵을 든 채 얌전하게 물었다.
시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오데트는 순순히 입을 연다.
"사실... 한번이 아니었어요."
"예?"
"조수님 생각하면서 한 거... 그날 이후에도 두 번이나...더 했어요."
시우는 잠깐 오데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뭘?
자위를?
"음.... 오데트 님 저는 상관없으니 굳이 이야기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사실 왜 굳이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데트의 생각은 시우와는 다른 모양이다.
최후의 고해성사를 하는 카톨릭 신자처럼 진솔하게 모든 것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사실... 죄책감이 들었어요... 아무리 제가 기분이 좋기 위해서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조수님이 노예라지만 그래도 허락도 구하지 않고 조수님을 떠올리면서 호...혼자 했는걸요."
"이해했고 괜찮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아무래도 오데트는 비단 그날의 일뿐 아니라 그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자책하고 있던 모양이다.
사실 시우는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이 핀트가 어긋난 민망한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게 유일한 바람이었다.
"정말요?"
"네."
"정말정말정말요?"
"네, 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조수님도 그날 이후에.... 절 떠올리면서 혼자 만지신 적이 있나요?"
"......."
한층 더 아스트랄해진 대화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여기서 최고의 답변은 무엇일지 망설일 틈도 없이 오데트는 저 혼자 결론을 내렸다.
"역시 없잖아요... 오데트가 못된 아이라, 이상한 아이라 그런 거잖아요..."
오데트는 시무룩하게 변하며 울먹였다.
아니, 그렇게 죄책감 느낄 거면 안 하면 안되나?
아니면 그냥 말하지 말고 혼자 몰래 하던지.
언니 이상으로 머리가 꽃밭인 아가씨라 사고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순진한 공주님을 보는 기분이다.
"오데트 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저만 괜찮다면 문제없는 일 아닐까요? 피해자는 없는 거잖아요."
"........"
"처음.... 음, 자위행위를 알게 됐으면 그럴 수도 있어요. 오데트 님 주변의 남자는 저밖에 없기도 하고 오데트 님이 제게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러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쌍둥이의 스승인 제머나이는 뭘하고 있길래 이런 성교육까지 담당하게 됐을까.
자식 같은 견습마녀를 과보호하는 것은 알겠으나 앞으로는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교육해 주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감히 이런 말을 얼굴 앞에서 할 일도 배짱도 없겠지만.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성과 성에 대한 호기심은 당연한 거예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망측한 짓인 데두요?"
"언젠가 오데트 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나가시죠."
오데트는 말 잘 듣는 햄스터처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그레 홍조가 떠오른 건강한 뺨에는 안도의 보조개가 파여있다.
"저, 조수님."
"네, 오데트 님."
"그럼 앞으로도 종종 조수님을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요?"
언뜻 듣기에 로맨틱하지만 함의는 '앞으로도 널 반찬으로 쓸 것이다'라는 의미.
어리숙한 오데트의 모습을 보며 미소가 생겼던 시우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 그럼요."
"제가 조수님에게 했던 실수도 용서한 거고, 앞으로 조수님 떠올리면서 할 수도 있게 해주신 거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상황정리를 한 오데트.
어떤 점에서 오데트는 아멜리아보다도 훨씬 까다로운 상대였다.
"대신 앞으로는 굳이 제게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한번 허락했으니까 언제든지 괜찮은 거죠."
아무튼 상황은 일단락.
이 낯간지러운 대화는 한번으로 족하다.
오데트를 달래는 데 성공한 시우는 그녀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왔고 오딜은 오데트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아마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
얼굴이 벌게진 오데트와 그녀를 피해 도망 다니며 계속 놀리는 오딜.
영산의 입구인 협곡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는 쾌활한 소란이 가시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