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1.
오딜은 밤새 몸을 뒤척였다.
뒤척이는 사이 잠시 옆을 보자 보쌈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이 든 오데트의 옆얼굴이 보인다.
"퓨후우우..."
확인 삼아 뺨을 콕콕 찔러봤는데 새어나가는 듯한 숨소리만 들려올 뿐 오데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꿈나라를 여행 중이다.
오딜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딜 역시 오데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베개를 베면 1분 안에 잠이 들고 이후엔 한 번도 깨지 않고 푸욱 숙면을 했었으니.
그러나 요 며칠 새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달라졌다.
푹신한 깃털 베개에 머리를 뉘어도 졸음이 몰려오지 않는다.
대신 낮 동안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온갖 잡념과 사념들이 스멀스멀 기어 놓아 훼방을 놓았다.
"어떻게 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니?"
에로스의 묘약의 효과를 몸소 검증한 날 이후부터였다.
그를 정원에서 납치한 뒤 마차 안에서 뜨겁고 농밀한 시간을 보냈다.
약에 취해서 그에게 안기고 아양을 떨다가 결국엔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해버렸다.
그의 물건을 뒷구멍에 넣고 씨까지 받아낸다는 말도 안 되고 충격적인 일을 말이다.
묘약에 단단히 취했던 오딜이지만 그때 당시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와 바짝 밀착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던 가슴의 고동.
고통 속에서도 그와 하나가 되었음을 느끼던 기쁨.
그리고 몸 안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뜨거운 쾌감까지.
차라리 아주 잊어버렸으면 좋으려만 그때의 기억은 좀처럼 오딜을 놓아주지 않았다.
"흐음...."
밀회가 끝나고 돌아와 간만에 들른 화장실.
그의 정액을 뒤로 쭉쭉 뿜어내며 부끄러움을 곱씹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는데.
오딜은 사뿐히 침대에서 내려와 밤 골목을 걷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아직 시녀들이 돌아다닐 시간이다.
오딜이 야심한 시각에 돌아다녔던 적은 별로 없으니 마주쳐서 좋을 것 없다.
그리고 그녀는 이 저택의 조용한,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장소를 많이 알고 있었다.
가령 온갖 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구 서고라던가.
달빛만이 휘황찬란한 복도를 발소리 없이 달린 오딜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구 서고로 쏙 들어갔다.
이 서고는 제머나이가 호기심이 왕성한 쌍둥이를 위해 선물한 놀이터였다.
이미 연구가 끝난 마법 서적이나 아주 오래된 고서들이 즐비한 곳으로 잠깐만 뒤적여도 학구적인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재미난 책이 많았다.
오딜은 가장 먼저 창가로 달려가 암막 커튼을 치고 랜턴에 장식불을 올렸다.
이러면 빛이 밖으로 새어나갈 일도 없을 것이다.
책꽂이 가득히 꽂혀있던 책 중에 유달리 손탄 흔적이 많아 보이는 책 한 권을 빼 온다.
"좋아."
소파 하나를 골라잡고 위에 흐트러져있던 책 그리고 랜턴을 바닥에 내려놓은 오딜은 비장한 표정과 함께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녀가 골라잡은 책은 오딜이 오데트 몰래 보고 숨기기를 반복하던 책이었다.
아마 스승님이 온갖 종류의 책을 선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끼어든 관능서적 같았다.
제목은 '귀축배달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한 마녀가 사랑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우유배달부를 집으로 끌어들여 이렇고 저런 짓을 하는 내용이다.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장부터 수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심약한 오데트가 봤더라면 보자마자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질 만큼 말이다.
오딜은 괜스레 주변을 한 번 살피고 드로어즈를 허벅지까지 내렸다.
팔받침대에 등을 기대고 한 손으로 책 중앙 부분을 받쳐 든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1장은 이미 봤기에 스킵.
제2장, 소제는 배덕의 구멍.
성에 무지한 오딜에게 여성과 남성은 뒤로도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충격적인 챕터였다.
그리고 오딜에게 잊지 못할 첫 경험을 경험하게 만든 가장 큰 원흉이기도 하고.
오딜은 손가락 하나를 쪽 빨아서 침을 묻혔다.
그리고 천천히 새싹을 굴리기 시작했다.
"아...하아...."
집중력이 뛰어난 오딜이 책의 내용에 빠지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앙증맞은 클리토리스가 표피를 조금씩 들어 올리며 빼꼼 드러나고 단단한 손끝에 이지러질 때마다 숨은 가빠오고 황홀함은 커져간다.
드러누운 소녀의 그림자가 랜턴의 빛을 따라 너울거리며 춤을 추었다.
역시 기분이 좋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초콜릿 케이크보다 달콤한 육체의 환희.
오딜의 눈은 정신없이 관능서적을 읽어내렸다.
[단단하고 딱딱한 고기의 창이 마녀의 부정한 구멍을 범했다. 탁하게 겹친 그림자, 고결한 마녀의 몸을 더럽히는 것은 그 그림자처럼 그늘지고 음습한 쾌락이다. 당기듯 밀듯 잡아 뽑는 허리짓에 마녀의 머리카락이 춤을 추었다. 시트를 당기는 마녀의 손등 위로 환희의 한숨이 쏟아졌다]
처음에 마녀에게 유혹당했던 배달부는 이내 알아차린다.
겉으로는 현명하고 똑똑한 마녀가 실은 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여자라는 것을.
그것을 깨달은 배달부는 천천히 마녀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갔다.
지금 오딜이 읽고 있는 부분은 배달부의 농간으로 뒷구멍을 헌납한 마녀가 새로운 쾌감에 젖어가는 내용이었다.
오딜은 끈끈한 꿀처럼 애액이 새어 나온 꽃잎을 쓰다듬었다.
"하아...."
평민 주제에 마녀를 침대에서 정복해버리다니.
이런 책은 불쏘시개보다 못한 쓰레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오딜은 이 책을 태울 수 없었다.
자꾸자꾸만 호기심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마침 책의 내용은 배달부가 마녀의 허리를 잡고 뒷구멍에 팡팡 물건을 꽂아 넣는 내용이었다.
손가락에 애액을 듬뿍 묻힌 오딜은 침을 꿀꺽 삼키고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불결한 구멍, 반영체가 되어 화장실에 가지 않은지 1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더러운 구멍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구멍에 조금씩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아얏!"
아팠다.
무척이나 아프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직 처음이라 그럴지 모른다.
조수님의 물건을 받았을 때도 처음은 거의 아프기만 했다.
그렇게 생각한 오딜은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렸다.
바짝 타들어 가는 목.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쿵쾅쿵쾅 뛰는 심장.
"으...."
그러나 이내 오딜은 책을 덮고 손가락을 빼냈다.
"이상하네..."
전혀 기분이 좋지 않다.
이상하고 불쾌한 이물감만이 느껴질 뿐 그 전과는 조금도 겹쳐지는 감각이 없었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그때 오딜은 시우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책 속의 마녀는 배달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짐승처럼 헐떡이고 창녀처럼 교태가 흐르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고 적혀 있거늘.
오딜은 옷을 입었다.
요 며칠 사이 무럭무럭 자라난 호기심은 오딜에게 어마어마한 행동력을 부여해주었다.
지금 당장 조수님을 만나러 가봐야겠다.
2.
아카데미 관리인으로 배정된 시청소속의 노예에서 아멜리아의 전속 노예로 배정된 지 어언 일주일.
시우의 일상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뼈 빠지게 힘들지만 보람이라고는 눈곱조차 찾을 수 없었던 각종 잡무에서 해방된다.
복도 청소라던가, 갑자기 막힌 배수로를 뚫어야 한다던가, 아니면 별안간 비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쳐내야 하는 일등.
이걸 시발 내가 왜 해? 라고 생각할법한 업무를 도맡지 않게 되었다.
업무 시간과 형태 또한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관리인이었을 때는 하루 12시간 정도의 작업을 끝내고 나면 자유시간이 보장되었던 반면 조수의 업무는 늦은 시간이 되어도 끝날 낌새가 없었다.
더불어 아멜리아와 같은 테이블에서 매 끼니를 해결했기 때문에 식사의 질도 확연하게 올라갔다. 호텔이 부럽지 않은 1인실에서 잘 수 있고 씻을 수 있다.
이게 가장 큰 행복이다.
그렇다고 일이 더 많아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업무강도는 확연하게 내려갔고 짬짬이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느낄 수도 있으니 대체로 만족한다고 할 수 있겠다.
"흠...."
하루가 끝나고 창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이런 시간도 관리인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하던 호사이니까.
"근데 이걸 어쩌냐."
그러나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다.
도저히 마법을 연구할 시간이 없다.
심지어 아직 축사에 남아있는 마법진 초안과 마력수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일단 일과 중에는 왕복해서 여유롭게 다녀올 만한 시간이 나질 않고 그렇다고 잠을 조금 줄이고 밤에 나가기에도 마땅치 않다.
시우가 곁에서 지켜본바, 아멜리아는 마법 중독말기답게 잠을 자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행여 잠자리에 들더라도 4시가 되어서야 침대에 몸을 눕혔던 것이다.
괜히 밤중에 나가거나 돌아오는 모습이 걸려 꼬투리를 잡힌다면 그만한 손해가 없어 우선 좀 더 좋은 타이밍을 생각하는 중이다.
그건 아마 내일.
일주일 만에 돌아오는 휴일이 되겠지.
메뉴얼에도 휴일에는 보조업무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명시되어있으니 딱히 걸리는 것도 없다.
이제 슬슬 씻고 잠자리에 들어볼까?
그렇게 창문을 닫으려는 와중 불쑥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수님 안녕?"
시우는 그대로 툭 담배를 떨어뜨렸다.
처음엔 헛것을 봤나 했다.
왜냐면 지금은 1시이고, 여기는 아멜리아의 저택이고, 심지어 2층이니까.
그런데 별안간 창문 앞에 동동 떠 있는 오딜을 보았으니 그렇게 반응할 만 하지 않은가?
"많이 놀랐어? 나름대로 깜짝 방문이였는데. 성공이네!"
순간 엄청나게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복잡한 생각과 염려, 부담스러움과 겸연쩍음, 혼란스러움과 황당함 속에서 시우는 겨우겨우 할 말을 골라냈다.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가출했어."
"가출하셨군요. 날이 밝으면 제머나이님과 오데트 님이 걱정하실 테니 귀가하세요. 오데트 님은 여기 안 계신 거 맞죠? 그럼 이만."
시우가 창문을 턱 닫으려 할 때 가느다란 오딜의 손이 턱 창틀을 잡았다.
"잠깐잠깐!"
"조용히 해주세요...! 아멜리아 님이 아직 깨어 계신다고요!"
"그럼 조용히 할 테니까 일단 들여보내 줘."
행여 지금의 해프닝이 들킬까 최대한 소란을 자제하는 시우와 그러거나 말거나 방으로 들어오려는 오딜.
어느 쪽이 유리한 것인지는 확연했다.
시우는 어쩔 수 없이 창문을 열었고 오딜은 천사처럼 살포시 방안으로 착지했다.
어질어질 현기증이 난다.
도대체 뭘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고, 이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도 감이 잘 안 잡힌다.
견습마녀를 야밤에 방에 들인 노예?
게다가 오딜은 위에 망토 하나만 걸쳤을 뿐 새하얀 속옷 차림이었다.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하얀 나이트가운과 드로어즈만 입은 차림이란 말이다.
아멜리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 마 조수님, '고요함의 노래'를 두르고 왔어. 내가 일으키는 소란은 감지되지 않을 거야."
그런 시우의 염려를 미리 읽은 것인지 오딜은 방에 들어온다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야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시우는 저도 모르게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오딜 님 부탁이니 이대로 돌아가 주세요. 앞으로 밀회는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알아 알아,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야."
거의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키는 시우를 오딜은 일단 진정시켰다.
"그냥 궁금한 게 생겨서 왔어."
물론 그의 사정을 고려해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