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1.
지긋지긋한 피아노 수업.
연금 수업.
독서 토론이 끝났다.
오딜과 오데트는 저택 내부에 설치되어있는 포탈을 통해 곧장 아카데미로 향했다.
포탈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백작 가문 중에 가장 부유하기로 명망 높은 제머나이 가문의 산더미 같은 재화는 그것을 충분히 감당해 낸다.
교사의 회랑을 거쳐 항상 수업을 듣던 강의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쌍둥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품에 넣어두었던 보온병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은 흡사 자살 테러 직전의 테러범들과 견줄 정도로 비장해 보였다.
"오데트 준비됐지?"
"응, 언니."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용량을 지켜 보온병 안에 에로스의 묘약을 졸졸 따라 넣는다.
아멜리아가 이 차를 전부 마시지는 않을 테니 묘약의 용량은 넉넉잡아 2회분을 넣었다.
어차피 연금 촉매인 분홍 이끼가 넉넉하게 들어가 있어 조금만 마셔도 확 효과를 볼 것이다.
붉은 홍차와 분홍빛 에로스의 묘약은 서로 섞여도 그리 큰 티가 나지 않았다.
-또각또각또각
조금만 서두르지 않았다면 공칠 뻔했다.
복도에서는 아멜리아의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오딜은 재빨리 묘약이 담긴 병을 숨겼고 오데트는 뚜껑이 닫힌 보온병을 열심히 흔들어 섞었다.
"정숙하세요."
수업 전에는 언제나 잡담을 나누는 쌍둥이였기에 아멜리아는 습관처럼 조용히 하라는 첫인사와 함께 강의실에 들어선다.
하지만 기묘하리만치 조용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뒤로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우가 뒤뚱뒤뚱 따라 들어왔다.
오데트는 시우의 눈을 피했고 오딜 역시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마차에서 뜨거웠던 랑데뷰 이후 첫대면이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그날의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힐끗거리며 그의 아랫도리를 중심적으로 살피던 쌍둥이는 왜 시우가 그렇게 불편한 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품에는 8권이나 되는 두꺼운 교재가 안겨있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겠지만 저게 다 일주일 치 과제로 나올 분량이다.
학생들의 고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아멜리아의 잔혹함에 쌍둥이는 그녀를 향한 죄책감을 약간 덜어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조수님도 안녕, 하세요?"
오데트는 슬쩍 손을 들어 시우에게 인사했다가 그대로 휙 얼굴을 돌려버렸다.
".....?"
평소라면 쌍둥이들이 마구잡이로 시우에게 인사를 던졌을 텐데.
영 어색한 반응에 눈을 깜빡거리며 쌍둥이와 시우를 번갈아 보는 아멜리아.
하지만 그녀는 3시간의 시간을 1분도 남김없이 수업으로 승화시키는 부지런한 교수였다.
"소논문 제출하세요."
"네!"
"네, 교수님!"
어느 정도의 타이밍이 좋을지 고민하던 쌍둥이는 일주일간의 과제를 제출했다.
사실 논문이라기에는 격식도 갖춰지지 않고 수업 내용을 복기하고 응용하는 차원의 과제에 가깝다.
아멜리아의 빨간 깃펜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쌍둥이의 과제 위에서 춤을 추었다.
"저기, 아멜리아 교수님."
"네, 오데트 양."
"모자란 저희 자매를 가르치시느라 항상 고생하시는 것 같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전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은 뭔가요?"
"힉!"
어쩐 일인지 심약한 오데트가 먼저 나서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아멜리아는 불만이 잔뜩 새겨진 말투로 빨간 잉크로 폭격이 가해진 과제를 내보였다.
"마력 분배 계산은 마법의 알파이자 오메가에요. 호기롭게 계산식은 생략해 놓았는데 결과도 과정도 실수투성이네요."
"죄, 죄송해요."
오늘따라 엄한 아멜리아의 모습에 오데트는 바로 격침.
무릎 사이로 손을 쏙 집어넣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도 그럴 게 아멜리아의 과제는 굉장히 수준이 높고, 양도 많고, 복잡하다.
그러나 성의 세계에 눈을 뜨고 있는 쌍둥이는 이번 주 과제를 하면서 평소 절반의 노력도 들이지 못했다.
오데트가 먼저 분위기를 파악해주었기에 오딜은 입도 뻥긋 않고 아멜리아가 채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가져가세요."
덜덜 떨며 과제를 받아가는 오딜과 오데트.
아멜리아는 기분이 상한 듯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노력 끝에 나온 참혹한 결과물은 인정해주겠지만 노력을 들이지 않는 학생에 관해서는 용서가 필요 없다.
그것이 아멜리아의 교수론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멜리아에게서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냉기가 철철 흘렀다.
"매우 실망스럽네요."
""죄송합니다...""
동시에 고개를 조아리는 쌍둥이.
오데트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풀이 죽어있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오딜은 다르다.
아멜리아의 분노가 살깣을 따끔거리게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에로스의 묘약의 효과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저렇게 화를 내던 사람이 조수님에게 사랑을 느끼며 매달린다?
생각만 해도 호기심이 들끓었다.
"교수님."
"네."
"하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짧게 하세요. 어디부터 다시 가르쳐야 좋을지 고민 중이니까요."
화들짝 놀란 오데트가 오딜의 치마를 책상 아래로 꾹꾹 잡아당기며 만류한다.
'언니!'
하지만 오딜은 이미 결심을 끝냈다.
아까까지 오데트가 열심히 흔들던 에로스의 묘약이 섞이니 차를 꺼내놓았다.
"사실, 교수님께 드리려고 차를 챙겨왔어요. 저희 차원(茶園)에서 차나무의 첫 잎만 수확한 것을 냉침차로 우려낸 것이에요."
냉침차란 얼음을 잔뜩 쌓아두고 사이사이에 찻잎을 넣어 얼음이 녹는 물로 차게 우리는 차이다.
"특히 찻잎을 블랜딩하는 단계에서 라즈베리 향을 입혀서 차게 드시면 고유의 향을 즐기실 수 있죠."
오딜은 따로 챙겨왔던 찻잔에 쪼르륵 차를 따라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아멜리아는 살짝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지금껏 쌍둥이들이 해왔던 행동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기특한 제자의 것이었으니까.
"고마워요."
그때 무언가를 눈치챈 시우가 끼어들었다.
아무리 봐도 저 차가 순전히 기특한 의도에서 나올 것 같진 않았다.
특히 시우의 자지를 처음 볼 때처럼 반짝반짝거리는 오딜의 눈빛으로 미루어보자면 말이다.
"저기, 아멜리아 님."
다도의 교과서 같은 다소곳한 자세로 찻잔을 받쳐 든 아멜리아를 다급히 만류했다.
"무슨 일이죠?"
"저기, 엄..."
근데 이걸 무슨 수로 말하라는 말인가?
쌍둥이가 차에 이상할 묘약을 탔다고?
그랬다간 지난번 있었던 일을 자백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했다간 묘약을 먹은 아멜리아가 어찌 날뛸지 모르는 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우는 이내 단념했다.
쌍둥이가 에로스의 묘약을 차에 넣었다는 확신도 없다.
만약 넣었다 하더라도 시우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쌍둥이가 엄중한 처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겠지.
"잘 마실게요."
아멜리아는 찻잔에 담긴 시원한 차를 천천히 마셨다.
오딜과 오데트의 시선이 아멜리아에게로 완전히 쏠린다.
오데트의 경우 시우를 벗겨내고 그의 위에 올라타 임신하고 싶다고 난리를 쳤다.
오딜의 경우 뒷구멍에 그의 물건을 받아들인 채 정액을 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아멜리아는?
"독특하네요."
최소한 아멜리아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시우.
10초 안에 정액을 체취한 남자를보아야 한다는 조건만 벗어나도 상황은 안정된다.
손에 땀을 쥐고 앞으로 펼쳐질 일을 기다리는 쌍둥이.
10초.
9초.
8초.
7초.
"시우 조수."
아멜리아가 시우를 돌아본 것은 정확히 초읽기가 7초에 머물 때였다.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킨다.
쌍둥이가 못된 장난으로 묘약을 넣은 게 맞았다면 이미 효과는 충족되었다.
이제는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책은 언제까지 들고 있을 건가요."
"아, 네."
시우는 아멜리아가 채점 내내 들고 있던 교재들을 책상에 쌓아놓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아멜리아를 향하고 있다.
"수업 시작하겠어요."
그리고.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수업이 전부 끝날 때까지 아멜리아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평상시처럼 태연하게 3시간을 꽉꽉 채워 수업을 진행한 아멜리아는 오늘 쌍둥이의 부진에 보답이라도 하듯 평소의 2배 분량은 족히 되는 과제를 남겨두고 퇴실했다.
2.
"왜지?"
"왤까?"
포탈을 타고 제머나이 저택으로 돌아온 쌍둥이.
일과의 끝인 저녁식사가 끝나면 취침 전까지 약 5시간 동안 개인 일과를 보낼 수 있다.
평소에는 서재로 가서 책을 읽으며 허송세월하거나, 아멜리아의 수업을 복습하며 노트에 정리하거나, 욕실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곧장 방으로 향해 침대에 앉았다.
"왜지...?"
"왤까...?"
오딜은 물론 오데트까지 수업시간 내내 아멜리아를 관찰했다.
그리고 얻은 관측값은 형편없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수업을 끝내고는 무지막지한 과제 폭탄을 던지고 간 것이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으신 거 아닐까?"
"오데트, 장담하건대 그걸 참을 수 있는 여자는 없어."
"약효가 사라진 거 아니야?"
"그보다는 자율방어가 해독해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지 않아?"
"그렇다면 교수님이 아무 말도 없이 넘어가실 리 없잖아.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잖아."
한숨을 푸욱 쉬는 쌍둥이.
사실 뒷일이 어디까지 불어날지 장담할 수 없던 장난이라 노심초사하던 부분도 있었지만 막상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안도보다는 커다란 실망감이 자리 잡는다.
하다못해 갓 태어난 사슴처럼 미열에 휘청거리는 아멜리아 교수님을 기대했는데.
"오데트 책 가져와 봐."
"응, 언니."
쌍둥이는 침대 밑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금지된 묘약 조제서'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에서 누리끼리한 갈색으로 변색된 가죽커버가 인상적인 이 책은 저택의 구 서고에서 발굴한 아주 희귀한 서적이었다.
듣기로는 세상에 두 권 밖에 없다지.
이미 몇 번이나 뒤적였던 부분이었기에 에로스의 묘약에 관한 페이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기엔 묘약의 제조 방법, 제조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일들뿐 아니라 기대 효과와 주의사항에 대해서도 열거되어있었다.
"흐음, 여기 있는 것 같다. 묘약의 효과는 피실험체마다 극명한 차이가 있으며 이것은 피실험체의 잠재된 성의식에 따라 구별된다."
"추가로 묘약이 효과를 보기 어려운 경우는 아래 서술한다."
"초경을 겪지 않은 실험체, 임신 중인 실험체, 마력 감응에 대한 소질이 전무한 실험체...."
책을 펼쳐놓고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쌍둥이는 어느 구절에서 턱 음독이 막히고 말았다.
"또한 이미 실험체를 사랑하는 피실험체에게는 묘약의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
건전지가 바닥 난 인형처럼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쌍둥이.
"그러니까, 잠만. 정리 정리."
머리가 헝클어지는 기분이 든 오딜은 손바닥으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아멜리아 교수님은 초경이 오셨겠지?"
"당연하지! 보면 몰라?"
"임신 중이실까?"
"마녀시잖아?"
"마력 감응에 대한 소질이 전무....하지는 않으시겠고 그렇다면...."
"다시 정리해보자. 실험체 조수님에게서 정액을 채취해 완성시킨 묘약을 피실험체 아멜리아 교수님에게 먹였지. 그럼...아멜리아 교수님이 조수님을 좋아하고 있다고?"
알 수 없는 결론이 나왔기에 쌍둥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설마!"
"그럴리가!"
그리고 이내 잠잠해진다.
고민이 오래가기도 전에 명쾌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하!""
"이 책 쓰레기네."
"응, 언니 이따 벽난로에 넣자."
"아냐, 지금 넣자."
모든 고민이 해소되어 아주 가뿐해졌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오딜은 책을 벽난로에 던져버리고 욕실로 향했다.
"괜히 이상한 거 보고 따라 했다가 큰일 날 뻔했네."
"그러게, 고서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같이 목욕하러 가자 언니."
사이좋은 자매는 총총걸음으로 나섰고, 방에는 벽난로에서 구슬프게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책 한 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낼름이는 불길에 휘말려 책장이 팔락 넘어갔다.
[...단 마지막 사례의 경우 작용효과 및 시간 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으니 실험시 주의를 요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