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1.
쌍둥이들의 아침은 오전 6시, 같은 침대에서 시작한다.
창밖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벽난로 속 밤새 불타오르던 편백나무 장작이 재가 되어 타닥거리는 냄새와 함께 몸을 일으켠다.
"좋은 아침 오데트."
"좋은 아침이야 언니."
오딜과 오데트는 널찍한 침대에서 일어나 쭈욱 기지개를 폈다.
채광창 사이로 흘러내리는 아침 햇볕으로 샤워를 하며 유연한 고양이 두 마리가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처럼 한동안 쭈욱 몸을 풀다 보면 밤새 몸을 굳히던 뻣뻣함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견습마녀의 영체는 불완전하다.
낙인의 그릇만 물려받은 상태이기에 시간이 아예 멈추어 버리는 마녀와는 다르게 나이를 먹는다.
따라서 성장을 하고, 노화가 진행되며 수면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쌍둥이는 언제나 11시에 잠자리에 들어 6시에 일어났다.
한동안 느릿하게 스트레칭을 하던 오딜이 오데트에게 눈빛을 던졌다.
"잘 잤어?"
"아니, 하나도 못 잤어. 언니는?"
"나도 비슷해. 달이 두 번째 창문을 지날 때나 잠이 든 것 같아."
베개에 머리만 누이면 곧장 곯아떨어지는 쌍둥이들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눈앞에 두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둘은 담이 크지 못했다.
"알고 있지?"
"오늘이란 거?"
쌍둥이는 시선을 교환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컥!
"좋은 아침입니다, 오딜 님. 밤새 숙면하셨나요, 오데트 님."
"좋은 아침이야, 갈리나 시녀장."
"좋은 아침이에요. 갈리나 시녀장님."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여자는 두툼한 안경을 쓴 중년부인, 갈리나였다.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머나이 가문을 모셔오던 시녀장이다.
오딜과 오데트가 걸음마를 떼지 못했을 때부터 그녀들을 보살피던 오래된 사용인 갈리나는 후덕한 풍채에도 날카로운 인상을 주기에 오딜과 오데트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쌩쌩하시군요."
"어제 좋은 꿈을 꿨거든!"
"저두요!"
소소한 아침 인사를 주고받는 갈리나의 뒤로 4명의 시녀가 도도도 지나간다.
그들 중 한 명은 18개의 창문을 커튼을 젖혀 열고, 누군가는 밤새 오딜과 오데트가 뒹굴던 침대의 시트를 수거한다.
나머지 둘은 침대 아래로 발을 늘어뜨린 쌍둥이의 발에 슬리퍼를 신겨준 뒤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었다.
어차피 욕실에서 씻고나면 다시 빗어야 할 텐데.
제머나이 백작가의 마녀는 복도를 거니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으면 안 된다나 뭐라나.
어렸을 때부터 품위 유지에 관한 이야기는 귀따갑게 들었지만 영 귀찮은 일이라 생각했다.
"금일 특별한 사항이나 지난밤 불편하셨던 점은 없으신가요?"
갈리나는 오늘따라 쌩쌩한 쌍둥이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데트와 눈이 마주친 오딜이 나섰다.
이런 일에 있어 행동대장은 소심한 오데트보다는 오딜이었다.
"시녀장!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인가요? 오딜 님, 노파심에 먼저 말씀드리지만 멘델 구릉에서 안장도 없이 승마를 한다거나, 무시무시한 팜멜 늪지대로 피크닉을 간다던가,
보더 타운을 구경가고 싶다든가 하는 부탁은 안 됩니다. 오늘은 4시부터 아카데미 수업이 있는 날이에요. 잊지 않으셨겠죠?"
"물론이지."
오딜은 괜스레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아멜리아 부교수님께 차를 대접하고 싶어."
"예?"
두꺼운 안경 너머 갈리나의 주름진 눈이 번뜩 떠졌다.
괜히 찔려서 몸을 움츠리는 오딜.
여기서는 오데트가 대신 설명을 이어갔다.
"아니, 그... 교수님은 저희 가르치느라 고생하시잖아요. 강의하실 때 목이 칼칼하지 않게 차라도 대접하려구요."
"아아아....!"
갈리나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더니 무서운 기세로 달려와 오딜과 오데트를 껴안았다.
"오딜 님, 오데트 님. 언제 이렇게 바른 학생으로 자라난 겁니까? 저 갈리나는 성장한 두 분의 모습에 기쁨에 겨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 그...그렇지..?"
"그, 그럼요.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쌍둥이의 시커먼 속내를 모르는 갈리나는 한참이나 오딜과 오데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기쁨에 잠겼다.
언제나 말광량이던 쌍둥이가 철이 든 듯하자 자식이 자라나는 것을 본 것처럼 기뻤다.
"그럼 제가 직접 차를 끓이도록 하겠습니다. 보온병에 담아 드리면 되는 걸까요?"
"응, 그렇게 부탁할게."
"네, 그럼 두 분은 목욕하러 가시죠."
쌍둥이는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욕실로 향했다.
2.
사실 쌍둥이의 일과는 큰 변화가 없다.
우선 기침과 동시에 별채의 욕실로 인도된다.
각각 두 명씩 총 4명의 시녀를 거느린 채로 목욕 시중을 받는다.
마녀 중에서도 귀족인 제머나이 가문에는 총 50명이 넘는 사용인이 존재한다.
오딜과 오데트는 샤워할 때도, 옷을 갈아입을 때조차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됐다.
주변에서 모두 해주었으니 말이다.
오딜이 자수정으로 만들어진 목욕 의자에 앉아있는 가운데 따뜻하게 덥혀진 향유가 머리 위로 부어진다.
오딜의 전속 시녀 중 하나, 페챠는 오딜의 머리와 몸에 향유를 뿌리고 이 틈새가 넓은 빗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발치에서는 또 다른 전속시녀 레나가 오딜의 발등에 물을 뿌리며 묻는다.
"오딜 님, 물 온도는 괜찮으신가요? 너무 차갑거나 뜨거우면 말씀하셔요."
"응, 따뜻해."
열심히 빗질하던 페챠가 오딜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어휴~ 귀여운 오딜 님 어찌 그리 머릿결이 고우세요?"
"페챠, 이제 귀엽다는 말은 삼가줘. 나도 어엿한 숙녀로 거듭나야 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귀여우신걸요? 그렇지 레나?"
"네, 무척 불손한 생각이지만 저는 오딜 님의 시중을 들 때마다 가방에 넣어서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부모님도 조부모님도 동생들도 무척 좋아할 거예요."
"다들 엄청 큰 인형을 가져왔다고 놀라고 말걸?"
"무슨 소리! 다들 나 오딜의 위엄과 카리스마에 덜덜 떨 것이 분명해."
페챠와 레나는 키득거리며 마음껏 오딜을 귀여워했다.
처음에는 다들 오딜과 오데트를 무서워했던 시녀들이었다.
하지만 쌍둥이가 겉보기처럼 까다롭지만 무해한 주인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마치 강아지를 돌보는 것처럼 애정을 주는 중이다.
특히 욕실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 오면 페챠와 레나는 오딜에게 장난을 걸기 바빴다.
깐깐한 갈리나 시녀장에게 이런 모습을 걸린다면 혼쭐이 나니 말이다.
이는 오데트도 마찬가지였다.
시녀들 사이에서 오딜이 까칠하지만 귀여운 여동생 포지션이라면 오데트는 착하고 순진해서 지켜주고 싶은 여동생 포지션이었다.
"마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오데트 님 무엇이든 여쭤보세요."
마샤는 오데트의 목 뒤로 손을 넣어 마사지를 해주며 싱긋싱긋 웃었다.
"헤으으응...."
반쯤 뒤로 넘어간 오데트는 기분 좋은 시원함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전에 제가 가져갔던 책 있잖아요."
"아, 첫날밤 지침서요?"
"혹시 그것보다 더... 더....더..."
"더, 더, 더?"
오데트는 괜히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며 묻는다.
"더 자세한 건 없나 해서요..."
말하기 남사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무릎을 비비며 우물쭈물거리는 오데트의 태도에 마샤는 몸을 비비꼬며 그녀의 동료인 베라에게 소리친다.
"봤어? 봤어? 오데트 님 말하는 거 봐. 강아지가 말하는 거 같아 어떡해!"
"마샤, 오데트 님도 한참 그런 일에 관심 가질 때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오데트 님, 얼굴이 봄딸기보다 빨개지셨어요. 깨물어주고 싶어요."
"어으우... 뺨 잡아당기지 말아주세요."
오데트의 두피를 슬슬 쓸어내던 마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사실 얼마 전에 타로 타운에서 나도는 관능서적 한 권을 입수했는데요."
"얘! 마샤! 그건 아직 오데트 님께 일러!"
"뭐 어때? 베라, 우리는 이미 몇 번씩이나 돌려봤잖아. 오데트 님도 알건 알아야지. 언제까지 우리가 과보호할 수는 없잖아."
오데트가 어리둥절해서 하는 가운데 마샤와 베라의 토론이 이어진다.
"무슨 내용인데요?"
"사랑이라는 감정에 호기심이 생긴 마녀가 잘생긴 우유 배달부와 달콤한 밀회를 나누는 내용이랍니다. 오데트 님도 읽어보시겠어요?"
"그것만 들어서는 모르겠어요."
눈치를 살피며 시중에만 집중하던 베라도 이 재미난 대화에 끼고 싶었는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종류의 잡담은 뒷담화보다도 재밌기 마련이다.
현대처럼 놀거리가 풍부하지 않은 따분한 세계인만큼
성적인 대화는 언제나 파릇한 처녀들의 관심거리였다.
"그게 있죠...."
"우유 배달부랑 히에엑...뒤로요?"
속닥속닥.
"네, 그리고 또 그 동생이랑...."
"동생이랑 같이...? 한 침대에서...? 그럼 남자 둘에 여 자 하나...?"
속닥속닥.
"네네! 또 마녀가 우유 배달부의 하녀가 되어서.... 엉덩이를요 찰싹 찰싹!..."
"어찌 그런 불경한!"
오데트가 기상천외한 스토리라인에 경악하는 가운데 목욕이 끝났다.
오딜은 유달리 상기된 오데트의 뺨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3.
목욕이 끝나면 다음은 꽃단장할 차례이다.
드레스룸으로 이동해 화장대 앞에 앉은 쌍둥이. 시녀들은 마법으로 뽀송뽀송하게 마른 쌍둥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빗질한다.
머릿결을 정돈한 이후에는 적당한 온도로 달군 쇠막대로 물에 적신 옆머리를 롤처럼 돌돌 말고 앞머리에도 풍성한 볼륨을 주어 우아하게 헤어세팅을 끝냈다.
이제는 드레스를 입을 차례.
그전에 인형처럼 곱게 꾸며진 쌍둥이의 드레스룸으로 시녀장이 들어왔다.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깔깔거리던 시녀들은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사실 그녀들에게 담당 견습마녀보다 무서운 것은 호랑이 같은 갈리나였다.
"오늘 제머나이 님이 외출하신 관계로 문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어디 가신 거예요?"
"저도 자세히 전해 들은 바는 없지만 '영산'에 마력이 엉켜있어서 친히 살피러 가신 모양이더군요."
"영산에요?"
"네, 아무튼...!"
갈리나는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이리저리 튀기 바쁜 쌍둥이의 대화 주제에 맞춰가다간 시간이 지체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씀드렸던 대로 오늘 8시부터 10시까지 미스터 켈빈의 피아노 수업, 10시 반부터 1시까지 에메랄드 타블렛에서 초빙한 오렐리안 마녀님의 묘약 제조 실습 강의, 이후엔 오찬입니다.
오찬이 끝난 후에 2시부터 3시까지 티타임을 즐기며 해서웨이 님과의 독서회가 예정되어있습니다.
4시부터 7시까지 예정대로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으시면 되고요.
조식을 드셔야 하니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죠."
"갈리나, 독서회는 빼주면 안 돼? 나 책 하나도 안 읽었는데. 미스 해서웨이는 너무 답답하단 말이야."
"으으으, 공부 너무 싫어요...!"
장대한 스케쥴을 듣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우려는 오데트를 마샤와 베라가 만류하며 잡아 세운다.
"안됩니다! 대 제머나이 백작가의 이름을 이으실 분이라면 마땅히 그 어떤 견습마녀보다 연마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치만 주말을 빼면 매일 8시간 넘게 수업만 듣는걸요? 게다가 아멜리아 교수님의 과제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맞아 갈리나, 이건 정신적 아동 학대야."
"쓰읍!"
갈리나가 눈을 부릅뜨자마자 쌍둥이는 조용해졌다.
각 분야의 명사들을 저택으로 초빙해 강의를 듣는 것.
이것이 쌍둥이의 일상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아멜리아 교수님을 골탕 먹이는 일로 가슴이 부풀었는데.
숨이 턱 막히는 스케쥴을 전해 듣고 시무룩해진 쌍둥이였다.
"언제부터 오딜 님 오데트 님이 아동이었습니까? 두 분은 어엿한 귀족 영애입니다. 어서어서 식당으로 이동하세요. 그리고 페챠!"
"네!"
"자꾸 사담을 나누어서는 곤란해요. 오딜 님도 시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건 좋지만 본인의 체통에 걸맞게 행동하시길!"
"네...."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는 아주 지긋지긋한 하루가 될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