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1.
고된 노동 끝에 빛 좀 보려니까 그간의 고생으로 치매가 왔나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니, 이게 다행인 일인가?
시우는 어서 걸어오라는 듯이 얌전히 서 있는 마차에 주춤주춤 다가갔다.
잊고 있던 것은 아니다.
원래 주말에 쌍둥이를 만나러 가야 했는데 급작스러운 호출 때문에 바람을 맞혔다.
그래도 그 아멜리아의 호출 때문이라는데 쌍둥이가 어쩌겠는가?
잘 이해해주고 넘어가겠지 싶어 큰 문제로 삼진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마차 문을 여는 게 두려운 건지.
검고 흰 천으로 창이 가려져 안이 보이지 않았기에 시우는 꿀꺽 침을 삼키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마차 안에 들어선 시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차 내부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컸기 떄문이다.
붉은 융단으로 완벽하게 덮인 바닥과 마차 내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천장.
이 정도면 이동식 별장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필경 공간 굴절의 마법을 이용했을 것이다.
사실 공간 굴절은 게헨나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마법 중 하나니 그리 놀랄 일 없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지맥과 수맥에 흐르는 마력을 이용한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마차에 사용하려면 어마어마한 유지비용이 들 텐데.
역시 부자로 유명한 제머나이 백작가 답다고 할지.
그때 어두웠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졌다.
군데군데 약하게 타오르던 촛불이 불타오른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차 문을 보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는 오딜과 오데트의 모습이 보인다.
팔짱을 낀 그녀들은 턱 끝을 치켜들고 오만하고 엄숙한 눈빛으로 시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래 그럴 법도 하다.
노예에 불과한 시우가 약속을 멋대로 어기고 튄 것이니까.
"오해의 소지가 있으십니다. 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차차 설명해 드릴 테니..."
"문 닫고 들어와."
"넵."
아무리 견습이라해도 마녀는 마녀인가?
항상 철없고 속없이 웃고 다니는 모습만 보다가 화난 모습을 보니 위압감이 장난 없었다.
시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쌍둥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조수님 조수님 하면서 편하게 대해주니까 노예 생활이 아주 편하지?"
"아닙니다."
"아니야? 그럼 왜 멋대로 약속을 어겼어?"
앳된 오딜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내려와 꽂힌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사정인지 들어보고 조수님의 처우를 결정하겠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인 건가 싶어 괜히 긴장하는 와중 오데트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나 눈 아파.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해?"
"오데트, 조용히 해."
"조수님도 사정이 있으셨겠지."
오데트는 오랜만에 만난 시우가 반가운지 괜히 어깨를 폴싹대며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요 조수님. 저희 마법 대단했죠? '요정의 장난'이라는 노래였는데 길을 헤매면서 빙글빙글 돌게 하는 거예요."
"대, 대단했어요."
"그쵸?"
흐뭇한 미소를 짓던 오데트의 자랑을 뒤로하고 시우는 차근차근 일전의 일을 설명했다.
자세하고 길게 갈 것도 없었다.
그저 아멜리아가 불러서 보더 타운에 따라갔다.
그런데 예정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타로 타운에 알리러 가지 못했다.
앞으로는 관리인이 아니라 아멜리아의 전속 노예가 되었다.
끝.
"...이렇게 된 겁니다."
"거봐, 조수님이 일부러 그러셨겠어?"
"흥, 난 그래도 용서가 안 돼."
예상대로 쌍둥이는 충분히 납득을 한 것 같다.
오딜은 계속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럼 이 옷도 교수님이 해주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잘 어울리긴 하네."
"감사합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오딜도 툭 던지듯이 칭찬을 해주는 걸 보니 옷이 멋지긴 한가보다.
"아 맞다! 조수님 제가 웃긴 거 말해 드릴까요?"
"오데트! 그 얘기는 안 한다며!"
오데트가 입을 열자 오딜이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있는 둥 마는 둥 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오데트는 입을 틀어막으려는 오딜의 시도를 피하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있잖아요, 언니가 조수님 안 왔을 때 화나서 침대를 발로 찼는데요."
"그만해! 모처럼 분위기 잡고 있었잖아!"
"언니 정강이가 침대에 부딪혀서 바닥에서 뒹굴면서 울었어요."
"안 울었거든?"
뒹굴거리긴 했다는 거구나.
오딜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오데트를 째려보고는 시우에게 말했다.
"조수님 나도 완전 웃긴 얘기 해줄까? 내가 예전에 오데트 유서를 발견했거든?"
"언니이이잇! 그 얘긴 왜 꺼내!"
이번에는 상황이 반전.
오딜이 즐거운 듯이 말을 이었고 오데트가 죽을 각오를 하며 달려든다.
"근데 그게 왜였는지 알아?"
"언니 그거 하면 언니가 방에 숨긴 과자 내가 다 먹을 거야!"
"얘가 처음 달거리 하더니 자기가 죽을병에 걸린 줄 알았대."
"언니이이이이이!!!!"
"그때 오데트가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아무것도 몰랐을 떄는 나도 같이 울었다니까?"
"죽어 죽어!"
"악! 우씨! 너도 말했잖아.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한 거!"
"그거랑 이거랑 같아?"
그리고 나선.
"조수님! 제가 언니 웃긴 얘기 더 해드릴게요!"
"아냐 조수님! 저거 듣지 말고 내 얘기 들어! 내 얘기가 더 웃겨!"
먹이를 조르는 아기 새처럼 땍땍거리기 시작한 쌍둥이.
"듣지 마!"
"듣지 말아요!"
"오데트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어!"
"언니 얘기는 별로 재미없어요!"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흑역사를 쏟아내던 오딜과 오데트는 시우의 주재하에 휴전협정을 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시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2.
".......푸하..."
".......피휴..."
상처뿐인 상잔 끝에 성녀타임이 왔는지 맥없는 기세로 소파에 늘어진 쌍둥이.
아직 흥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 뺨은 벌겋고 옷과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채 숨을 헐떡이는 중이다.
"오데트..."
"언니..."
동시에 눈이 마주쳐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쌍둥이는 사이좋게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내가 미안해."
"아냐 내가 더 잘못했어."
"이런 싸움이 계속돼 봐야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나 봐."
"나야말로 협약에 어긋난 선제공격을 해서 미안해."
"그래요,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시면 좋지 않습니까."
잠시 투닥거리긴 해도 이렇게 사이가 좋으니 둘이 꼭 붙어 다니는 거겠지.
뭔가 흐뭇한 감정이 되어 쌍둥이를 바라보던 시우.
사실 둘에게나 부끄럽지 시우에겐 그저 귀엽게만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이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선취권을 뺏기지 않을 거니까 각오해 오데트."
"앞으로는 언니가 반격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공격을 해야겠어."
"어, 음..."
아무튼 생긴거는 그래도 꽤 성숙한 모습인데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이 꼬맹이들이다.
마녀들은 다 이런 걸까?
"그런데 이제 저 슬슬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닌 듯하고 사과도 제대로 했으니 축사에 가서 짐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우가 조심스레 묻는다.
당연히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딜 가려고, 앉아."
서로를 향해 맹렬한 적의를 불태우던 쌍둥이는 이내 머리를 정돈하고 소파에 앉았다.
"조수님, 아무튼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건 알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을 물고 늘어지는 것도 올바르지 않은 처사겠지."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좀 속상해요. 모처럼의 탈출 날이었는데 조수님을 기다리느라 하루종일 시간을 낭비했거든요."
"그건...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데트는 어디론가 총총 가더니 마차 한구석의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멍하니 기다리면서 저희끼리 좋은 생각을 떠올렸지 뭐예요?"
책을 팔랑이던 오데트는 한 부분을 기운 좋게 활짝 펼쳐 시우에게 보여주었다.
괜히 까치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어지간히 신나 보인다.
"저희 오늘 이걸 만들 거예요."
"이게 뭐죠?"
" '에로스의 묘약' 사실 이미 만들어 왔어."
대답은 오딜 쪽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품에서는 '나는 수상한 마법 시약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분홍색 액체가 담긴 앰플이 있었다.
"사실 숙녀를 위한 첫날 밤 지침서를 보니까 자꾸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더라구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제대로 알 방법이 없단 말이지."
"하지만 마법에 불가능이란 없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호흡 잘 맞는 쇼호스트처럼 주거니 받거니 설명을 이어나가는 쌍둥이.
"효과는 아주 직관적이야. 이걸 마신 여자는 정확히 한 시간 동안 아주 진한 사랑에 빠져."
"그래서 그걸 저에게 시험해보시겠다고요?"
"물론이지."
"물론이죠!"
이래서 굳이 붙잡고 있었구나.
"네, 하지만 추가로 조금 도와주실 부분이 있어요."
"이 묘약에 딱 한 가지 재료가 추가로 필요한데... 우리는 구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정액이군요."
"이제 슬슬 눈치가 빨라지시네요."
오딜의 추가적인 설명을 듣자 하니 아무 남성의 정액을 써도 곤란하다는 모양이다.
"왜냐면 이 약물을 통해 조수님과 사랑에 빠지려면 조수님의 정액이 필요하거든. 갓 뽑은 신선한 거로."
다른 남자의 정액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시우의 정액을 사용한 시약을 쌍둥이가 마신 뒤 10초 안에 시우를 보아야 매혹에 빠진다는 더럽게 조건이 까다로운 CC기이다.
그런 쓰레기 같은 건 또 왜 만드셨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쉽게도 이쪽은 약점이 잡혀 있는 상태라 그냥 적당히 어울려줘야지.
별수 있나.
"아무튼 충분히 설명이 됐다고 생각해."
"그럼 바지 벗어서 저 주세요."
잠깐 망설이던 시우는 순순히 바지를 내리고 오데트에게 넘긴다.
쌍둥이의 시선이 순식간에 하반신으로 쏠린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게 된 똘똘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축 늘어져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빨리해보고 싶으니까 지금 바로 해주실 수 있나요?"
"저기, 누가 보고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훨씬 오래 걸리거든요. 병 같은 거 하나 주시면 제가 받아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리가 빼낼 거니까."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기각되었다.
시우는 참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이 성황으로 얻을 수 있는 감각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이대로 쌍둥이에게 맡기면 굉장히 편하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뭣도 모르는 애들한테 애먼 짓 저지르는 범죄자가 된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이 일이 제머나이 백작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후일이 두렵다.
"저랑 언니랑 둘이서 엄청 열심히 공부했어요. 이제는 잘할 거에요."
"이쪽 소파에 앉아볼래?"
"저... 오딜 님,오데트 님 , 이 일을 제머나이 님이 아시면 굉장히 화내실 겁니다. 앞으로 이러지 않는게 어떨까요? 적어도 정식 마녀가 되고 나서..."
오딜에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은 시우가 그나마 항변을 해봤지만 사실 꺼내나마나 한 말이었다.
오데트는 들은 채도 안하고 커다랗게 귀두를 물었으니 말이다.
"하음... 시작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