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1.
침대에서 기상.
이제는 6시만 되면 알람이 없어도 눈이 번쩍 떠진다.
상자에 올려둔 딱딱한 짚 침대에서 자다가 푹신한 이불에서 일어나니 세상 상쾌했다.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를 한다.
"힘세고 강한 아침."
그나저나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온수를 펑펑 쓰며 샤워하는 게 얼마 만이냐.
'교도소에 가도 일주일에 한 번은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데'라고 툴툴거릴 일도 이젠 없다.
시우의 방이 동서로 길게 늘어선 저택의 동쪽 끝이라면 아멜리아는 서쪽 끝이다.
어제 그녀가 미리 일러준 대로 6시에 기상하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은 뒤 아멜리아를 찾았다.
복도에 걸린 거울로 마지막 복장 정돈을 끝낸 시우는 문을 열고 아멜리아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멜리아 님,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며 묻자 문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보니 여자방에 들어가는 건 두 번째군 따위의 싱거운 감상은 금방 사라졌다.
아멜리아의 방은 시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구조 자체는 말이다.
오딜이나 오데트의 방이 차라리 화려하기라도 했다면 이곳은 수수하기 그지 없다.
기본적으로 질이 좋은 가구를 제외하면 딱히 정성들여 치장한 느낌이 없다해야하나.
하지만 그녀의 방에는 온갖 마법 서적과 서류, 그리고 실험재료들로 가득했다.
아무튼 방이 훨씬 좁아서 그런지 연구동보다도 번잡스러운 느낌이다.
그녀는 기어이 온갖 연구 거리를 집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푹 주무셨나요?"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하려다 다른 인사말을 건넸는데, 말을 꺼내자마자 별 의미 없는 말이었음을 깨닫는다.
"오늘은 자지 않았어요."
아멜리아는 책상에 앉은 채 펜을 놓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종이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어내고 있었다.
아마 밤새 저러고 있던 모양이다.
그녀의 앞에는 막 잉크가 말라가는 종이가 한 무더기나 쌓여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렇게 말한 아멜리아는 다시 제 할 일에 몰두했다.
집중하느라 미간으로 슬쩍 모인 눈썹.
감정표현이 거의 없고 표정 변화도 적은 그녀지만 저 곧고 가는 눈썹만큼은 예외다.
시우가 그녀의 감정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것도 9할 이상은 눈썹의 덕이 컸다.
아무튼 아멜리아는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그제야 시우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여기서 확인하세요."
바로 본론이다.
아멜리아는 책상 서랍을 뒤적이더니 30~40페이지 정도의 종이 묶음을 시우에게 건넸다.
"전속 노예로서 지켜야 할 일. 시간, 요일에 따라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메뉴얼이에요. 시간을 들여서 읽고 숙지하세요."
"옙."
아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나왔다.
옷은 갈아입었는지 조금 편해 보이는 로브 차림이다.
"3페이지 15항목을 보세요."
"네."
일종의 업무 안내서인가 보다.
팔락팔락 종잇장을 넘겨보던 시우는 문득 이 메뉴얼에 적힌 글씨체가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아멜리아가 한 글자 한 글자 적은 것이었다.
3페이지는 아침에 기상해서 해야 할 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아멜리아가 자고 있다면 깨우고, 그게 아니더라도 인사를 올린다.
이후에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아침 식사는 시우가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사에 있는 주방에서 음식을 받아오면 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그보다 두께가 꽤 되는데 일일이 숙지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듯싶다.
시우는 욕실로 향하는 아멜리아를 지켜보다가 아카데미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복도를 청소하던 타카쇼다.
그는 시우의 바뀐 옷차림을 보자마자 펄쩍펄쩍 뛰면서 흥분했다.
"이야~ 이게 누구십니까? 너무 훤칠해서 놀라보겠습니다."
"야야, 진정해. 이게 뭐 별거라고 그래."
"당연히 별거지! 친구가 드디어 출세했는데!"
사실 할 말이 좀 많긴 한데 시간이 넉넉할런지는 잘 모르겠다.
시우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만 정리해 알려주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아멜리아가 너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그는 오랜 고시 준비 끝에 합격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뿌듯한 눈빛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뭔 개소리야. 너 지금까지 뭐 들었냐? 여기서 어떻게 아멜리아가 날 좋아한다는 결론이 나와."
"뭐가?"
"방금 말했잖아. 그때 밤시중이 아니라 조수로 삼으려고 숙소로 부른 거라고."
뿌듯함으로 함박웃음을 짓던 타카쇼의 얼굴이 애매하게 변해간다.
당첨된 복권을 들고 평생 은행에 안 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이야,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냐.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 대단하구먼."
"너 때문에 쪽팔려서 뒤질 뻔했거든? 아멜리아가 그때 날 어떤 눈빛으로 봤는지 알아?"
밤시중 얘기를 꺼내자마자 거진 벌레 보는 듯한 시선으로 얻어맞았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이고 화상아... 너 여자친구 만들어 본 적 있지."
"없는데?"
"....맞아, 그랬지."
시우를 질책할 생각조차 포기한 타카쇼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머리를 긁적이더니 하나하나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신시우 봐봐. 아멜리아가 너한테 팬티 사줬지? 담배 줬지? 케이크 줬지? 정장도 사줬지. 아무런 관심 없는 노예한테 왜 그렇게 잘해주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괴롭히다 보니까 좀 미안했나 보지."
"허... 거참."
"니가 아멜리아랑 하루라도 같이 있어 봐야 알지. 네 입으로 그랬잖아. 아멜리아는 정통파 마녀라 남자 따위에 아무런 관심 없다고."
"그건 일반적일 때의 이야기고 그런 아멜리아가 너한테 관심을 보이는 게 특별한 일이라니까?"
타카쇼는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시우가 알아듣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얌마 이거 소재 좀 봐."
"야 달라붙지 마! 징그럽게."
"이거 모헤어잖아."
"그게 뭔데?"
타카쇼는 시우의 팔을 슬슬 쓸어보더니 말했다.
"나도 예전에 일할 때 양복 선물 많이 받아 봤거든? 너 캐시미어는 들어봤어?"
"캐시미어 코트?"
"모헤어는 그만큼 좋거나 그보다 좋은 소재야. 아무 마음이 없다면 고작 전속 노예한테 이런 좋은 옷을 주겠냐? 게다가 아멜리아는 그 전에 아무 노예도 안 들였잖아."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양장점에서 맞춘 옷이니 그 정도는 했겠지 싶어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시우.
"내가 볼 때 이건 대놓고 구애하고 있는데 너 혼자 '이건 나만의 착각일지도 몰라 힝...' 이러고 있는 거라니까?"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난 아멜리아한테 별 마음 없어."
"미친놈이신가."
타카쇼는 어이가 없는지 입을 떡 벌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있는 힘을 다해 시우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뒤 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하긴 그동안 아멜리아 때문에 고생 많이 한 건 맞으니까. 근데 그건 반쯤은 니가 사서 한 고생 아니냐?"
"그게 왜 시발 내 잘못이야. 아무튼 이제 니말 안 믿는다."
"모솔아다 신시우 씨 제발 제 말을 믿으셔야 해요. 가끔 널 보면 금덩어리로 물수제비하고 있는 꼬맹이 보는 기분이야. 니가 던지고 있는 건 황금같은 기회야! 귀족이고 돈많고 예쁘기까지한 마녀가 언제까지 너만 보고 있을 거 같냐?"
"그래서 결론이 뭔데. 짧게 말해. 나 금방 가봐야 하거든."
타카쇼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한마디를 툭 던졌다.
"섹스하고 나면 썰 좀 풀어라. 술 사 갈게."
여전히 혼자 온갖 설레발을 치는 타카쇼의 뒤통수를 한 대 쳐주고 주방에서 음식을 받아왔다.
3.
앞으로의 생활이 어찌 될 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먹을 복은 텄다는 것이다.
주방에서 음식을 받아 트레이를 돌돌 끌며 받아온 아침 식사.
쉽게 설명하자면 영국식 아침이다.
소금기가 거의 없는 베이컨에 곁들이는 베이글. 환상적인 완성도로 만들어져 톡 건드리면 노른자가 터져나오는 수란, 연어가 들어간 샐러드에 따뜻한 커피까지.
목탄화 지우개로나 쓸법한 빵 쪼가리와 허여멀건 스프와도 영영 작별이다.
그동안 좆 같았고 다신 보지 말자.
시우는 아멜리아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나하나 음미하며 끝내고 접시를 치운 뒤 연구동으로 향했다.
5년간 몸에 베어왔던 사이클이 깨지니 기분이 이상하다.
지금 당장 잡일을 하러 아카데미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시우는 연구동 구석에서 메뉴얼을 읽으며 새삼스러운 상념에 잠겼다.
아멜리아는 별다른 말도 없이 연구동에 도착하자마자 담배와 함께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시우도 눈치껏 인수인계 받는 척 메뉴얼을 샅샅이 뒤적이는 중이다.
그래서 대충 내용을 살펴보자면.
기상 시 해야 할 것.
점심시간에 해야 할 것.
저녁부터 취침 전까지 해야 할 것.
평일에 할 일.
주말에 할 일.
저택 내에서 할 일.
연구동에 동행할 시 지켜야 할 사항.
서류 및 문서 정리 지시안.
청소 및 빨래법.
각종 디저트 주문 방법.
문제 사항 발생 시 .
등등 각종 상세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이것만 열심히 읽어봐도 크게 문제는 없겠지.
"음...."
그나저나 축사에서 물건들을 옮겨야 하는데 당분간은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메뉴얼의 내용에 따르면 거의 온종일 아멜리아의 뒤를 졸졸 쫓아다녀야 하는데 연구동 혹은 숙소에서 축사까지는 왕복 한 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하루 날을 잡고 밤에 몰래 빠져나와야 할까?
당장 급한 일은 아니긴 하지.
어차피 사람 발길 한 번 닿지 않는 곳이고.
-까악까악!
그때 창밖에서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슬쩍 창가를 보려 할 때 별안간 아멜리아가 불렀다.
"시우."
"네, 아멜리아님."
"3시간 뒤에 여기로 다시 오세요."
"알겠습니다, 그동안 해야 할 일이 있나요?"
"없어요, 당분간은 메뉴얼 위주로만 하세요."
"네."
시우는 순순히 고개 끄덕이고는 연구동 밖으로 나왔다.
4.
따사로운 햇살.
늦가을치고는 굉장히 포근한 날씨다.
연구동 밖에서 팔을 한껏 벌리고 평화를 만끽한다.
"아, 이게 인생이지."
평소였으면 지금쯤 사다리를 타고 나뭇가지를 치거나 먼지도 없는 복도를 쓸고 있어야 할 텐데.
아침부터 근사한 음식을 먹고 여유로운 자유시간이라니.
"지금이 좋겠다."
축사 쪽 문제를 어찌할까 고민하던 터였는데 마침 시간이 딱 좋게 나왔다.
지금 바로 축사에서 마법 용품들을 가져다 숙소로 옮긴 다음에 시치미를 뚝 떼고 복귀하면 끝.
그래도 한 시간 정도는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으니 서두르자.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갑자기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데 어찌 콧노래가 나오지 않을 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장미정원에 들어선 시우.
축사로 가기 위해서는 이 장미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마법에 걸린 장미들은 계절도 잊은 채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을 피우고 눈과 코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문득 이상함이 느껴진다.
"어?"
분명 이 분수대는 아까 봤던 거랑 똑같은데.
나팔을 불고 있는 꼬마 천사.
담요에 쌓인 마녀의 아이에게 축도의 향유를 뿌리는 마녀.
시우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출구가 보인다.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출구 쪽으로 한 발짝씩 걷는 시우.
분명 의식은 1초의 빈틈도 없이 출구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이제 정원을 벗어난다 싶자 다시 분수대 앞으로 돌아와 있다.
"에반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 시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소피아의 마차보다 3배는 커다란 마차가 어느샌가 주차되어 있었다.
마차 문짝에 음각되어있는 날개를 펼친 두 마리의 새.
그것은 마법을 노래하는 흑과 백의 쌍조.
둘이서 하나인 마녀.
제머나이 백작가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