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5화 (35/917)

#35

1.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하나 남아 있다.

그렇게 넓은 공간은 아니다.

문득  '아 저기 있었지'하고 밟힐 정도의 조그마한 곳이라고 할까.

평소엔 가슴 깊은 곳에 푹 잠겨있는 그 공간은 사고의 공백이 생겨날 때 쏙 고개를 내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참 얄밉게도 말이다.

목욕을 하다가도 잠시 떠오르고.

외로움을 잊으려 피로의 향수를 사용한 뒤 침대에 몸을 던져도 떠오르고.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넣을 때 떠오르고.

담배를 피울 때도, 풀리지 않는 계산식에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아무리 아무리 깊은 곳에 넣어 꺼내지 않으려 해도 마치 '나를 잊지 말아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마는.

아멜리아 메리골드 역시 가슴 속에 빈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항상 자상하고, 늠름하고, 우아하고, 고상했던 스승님이 계셨다.

병증이 악화할 때마다 약을 떠 먹여주며 상냥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리던,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을 때 누구보다 빨리 달려오던,

악몽에 몸을 뒤척이면 따뜻한 우유와 함께 옆자리를 지켜주던,

벽난로 앞에서 목도리를 짜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공부가 힘들고 괴로워 포기하고 싶을 때면 '아멜리아, 넌 누구보다 특별한 아이란다'라고 말해주던.

스승님.

스승님.

그리운 스승님.

아멜리아는 떠올렸다.

믿기지 않았던 이별의 날을.

당신께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스승님! 왜, 왜 말해주지 않으셨어요...! 저는...저는... 제가 마녀가 되면... 스승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줄 알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거란다. 어머, 유언으로 남기기에는 너무 진부한 말인가?'

낙인을 계승시킨 선대 마녀는 소멸해버린다고, 둘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아멜리아가 낙인을 계승할 때까지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이유라면 알고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은 나태하고 모자라며 게으른 학생이었다.

게다가 스승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만약 아멜리아가 모든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낙인을 계승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님의 연구를 물려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스승님과 더 오랜 세월을 함께하기 위해 발돋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태어날 적부터 그녀를 괴롭히던 병에 의해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었겠지.

그렇기에 스승님은 말씀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 역시 사랑하는 제자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으니까.

'비겁해요... 저는 인정 못해요! 이런 게 어디있어요... 비겁하다구요... 가지 마요... 가지 말아요...'

'아멜리아, 사랑하는 내 제자, 나의 딸아, 나의 거울아.  네가 메리골드라는 이름을 이어주어 나는 참 기쁘단다.'

'이런 이름 따위 필요 없어요! 왜...왜 제 이야기는 들어보지 않으신 거예요...'

'너는 따뜻한 아이야.'

'싫어요! 싫어요...! 도로 가져가세요... 스승님이 없으면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울고, 머리를 쥐어뜯고, 고함을 지르고, 고개를 내젓고, 기도를 올려도.

갑작스레 찾아온 잔혹한 이별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마녀답게, 귀족답게 살아가렴. 그리고...'

스승님은 사라졌다.

아멜리아가 낙인을 계승 받은 그날.

유언도 끝까지 남기지 못한 채 아멜리아 메리골드에 의해 살해당했다.

죄책감, 배신감, 원망, 분노, 사랑, 그리움.

하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들.

아멜리아는 그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가슴 속의 빈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언젠가 다시 떠오르고 말 공간 속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뜨거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계속해서 가라앉던 상실의 아픔은 기어이 가슴 밑바닥에 구멍을 뚫었나 보다.

조촐한 장례식이 끝난 이후.

기절할 때까지 울고, 깨어나서 다시 울고를 반복하던 아멜리아.

그녀는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무리 부정하려 들어도 떨쳐낼 수 없는 것이 비정한 현실임을 깨달은 것일까?

새롭게 선 그녀의 두 눈에는 결의가 서 있었다.

억지로 떠맡은,

원하지 않았던,

그러나 내팽개칠 수 없는 결의가.

'그게 스승님이 원하신거라면...'

마녀의 비원.

더 높은 위계를 달성해 창조의 마녀에 위업에 도달하는 것.

'...제가 그 길을 걷겠어요.'

너무나도 따뜻한 기억들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날카로운 기억이었다.

예고도 없이 불혓듯 찾아와 화상이 진 것처럼 가슴이 화끈거리게 하고 그리움의 눈물이 나게 만드는 기억들.

이렇듯 그 빈자리는 오로지 스승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한 당돌하고 괘씸한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2.

시우는 담배를 꺼냈다.

참고로 이것은 보더 타운에서 돌아오는 길 아멜리아가 한 갑을 통째로 빼준 것이다.

담배가 스무 개비!

예전이었더라면 줘도 안 피울 맛대가리 없는 담배지만 더운밥 찬밥 가리는 것도 있는 놈이나 하는 짓이다.

시우는 청산가리가 섞인 밥을 내줘도 잘 골라 먹어야 하는 처지이고 말이다.

아무튼 하루에 하나씩 피다가 특별한 날 두 개비를 피워도 무려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니코틴의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된다.

안 그래도 노예 생활하느라 빡센데, 노예 생활은 하나로 족하다.

벽난로 위에서 타닥타닥 타고 있던 촛불로 불을 붙인 시우는 창틀에 앉았다.

유리창으로 비치는 존나 섹시한 양복을 입은 모습.

아멜리아가 향수로 물물교환을 시도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값을 알 순 없었지만 딱 봐도 소재부터 디자인까지 비싼 티가 난다.

"고놈 잘생겼네."

오랜만에 잘 차려입고 머리까지 쓱 넘긴 뒤 거울을 보자 스멀스멀 자아도취가 생겨난다.

샤워한 뒤에 거울을 보는 거랑은 비교가 안 되지.

이 정도면 아멜리아도 푹 빠졌지 않았을까?

잠깐의 망상.

유리창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 시우는 현실을 깨달았다.

옷을 갈아입은 직후 아멜리아의 반응을 보면 그럴 일은 없는 것 같다.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요 며칠 사이 아멜리아는 조금 변했다.

예전에는 그저 아리땁지만 재액을 몰고 오는 짐승 정도였더라면 요즘엔 뭔가뭔가스럽다.

생각해보면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함께 보더 타운에 다녀온 뒤가 아닐까?.

지금까지 괴롭히던 게 질렸나?

떨어지는 처마 잔해를 대신 맞아준 게 꽤 고마웠던 걸까?

정말 내 사람이라고 챙겨주기 시작한 건가?

혹시 여관에서 끝까지 그녀를 지켜낸 걸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어우 시발."

시우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학을 뗐다.

마지막 가정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멜리아의 가슴을 빨았다는 사실이 들켰다면 이렇게 평화롭게 있을 수 없었겠지.

소피아가 제대로 입단속을 해준 모양이다.

아무튼 팬티도 사주고, 디저트도 주고, 담배도 주고, 이런 멋진 정장까지 주다니.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비슷한 기분을 느껴본 적은 있다.

2년 내내 괴롭혔던 맞선임이 전역할 때가 되자 그동안 철없게 미안했다며 잘해주던 그때의 느낌이랄까.

마냥 고맙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시우가 '이제 와서 이 지랄 하면 내가 용서할 줄 알았어? 정도로 뒤끝이 남는 성격도 아니다.

애초에 남에게 모질지 못한 편이다.

따라서 아멜리아와의 거리조절과 그녀를 향한 심리적 스탠스를 잡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뭘 받으면 기쁘긴 해도 어딘가 떨떠름하고, 편하게 대하기에는 그간 당했던 일이 떠오르고 아무튼 그런 상황.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떠날 몸이다.

또 혹시 모르지. 힘들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미화된다고.

좆같았던 게헨나에서의 나날 중 그나마 떠올릴만한 추억이 아멜리아와 투닥거렸던 나날이 될 수도.

어차피 다 지나갈 일이고 지나간 일이지.

괜히 아멜리아와 불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서 편의를 챙기고 후딱 나가자.

예전보다 한결 덜한 아멜리아의 패악질 덕인지 비교적 쉽게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으휴, 성격이 생긴 거 반의반만 따라갔어도."

타카쇼처럼 쥔님 쥔님 거리며 꼬리를 흔들었을 텐데.

생각해보니 사람 생긴 게 참 중요하다.

아멜리아가 지금보다 조금만 덜 예뻤더라도 시우는 그녀를 정말정말 싫어했을 것이다.

근데 어쩌겠어.

몸속에 DNA가 미녀는 아무튼 정상참작 사유라는데.

필터까지 쪽쪽 핀 담배를 대충 재떨이(엄청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에 놓고 창틀을 닫은 시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이제부터 이런 생활의 시작이지.

노 프라이버시 존이 활성화된 것이다.

앞으로는 자위도 화장실에서 해야 되게 생겼다.

시우는 옷매무새만 가볍게 가다듬고 거실로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숙소의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어 일차적으로 아멜리아의 침입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 정도.

"부교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라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멜리아가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

"네?"

"제 이름은 아멜리아 메리골드에요."

"네, 저는 신시우입니다."

알고 있는데, 어쩌자는 거지?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아멜리아의 눈썹이 잠깐 위로 올라갔다.

이건 가끔 시우가 얼탱이 없는 짓을 했을 때 보이는 의아함 25%정도이다.

이번엔 뭘 잘못했을까?

"신시우."

"네....?"

아멜리아가 시우를 부를 때는 항상 두 가지였다.

신시우 관리인, 혹은 그냥 관리인.

진짜 화가 났을 때가 아니면 대부분 후자였지.

그렇다면 이름 석자를 부르는 것은 무슨 전조일까?

5년간 쌓아온 PSTD가 몸을 뒤틀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방 안에서 담배 피웠다고 저러나?

"그렇네요, 신시우였군요. 관리인이 아니라."

혼자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 아멜리아는 빤히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럿, 그렇습니다. 이제는 아카데미의 관리인이 아니라 부교수님의 전속이니까요."

워낙 당황해 혀를 깨문 시우.

아멜리아의 곱고 가는 눈썹의 좌우 균형이 흐트러진다.

답답함 50%이다.

"이름으로 부르세요. 시우."

"그, 부교수님의 존함을요?"

"그래요. 말했잖아요. 제 이름은 부교수가 아니라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아예 전속노예가 된 마당에 까라면 까야지.

"알겠습니다. 아멜리아 님."

"시우."

아멜리아는 몹시 흡족한 모습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무표정이지만 자세히 보면 콧구멍이 살짝 커졌는데 더럽게 귀여웠다.

갑자기 생겨난 의문이다만 아멜리아는 코털도 금발일까?

"잘했어요."

갑작스러운 아멜리아 공습에 당황했던 시우는 이제야 그녀의 손에 들린 접시를 발견했다.

예전에도 아주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는 그.... 체리 케이크다.

사실 정확한 이름은 까먹었다. 오죽 복잡해야지.

그녀는 의기양양한 폼 그대로 접시를 탁상에 올려두었다.

"먹어요."

"네? 감사합니다. 아멜리아 님은 안 드시나요?"

케이크도 한 조각 포크도 한 개여서 물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필요 없어요. 먹고 나면 1층 부엌에 가서 접시를 씻도록 하세요."

"네, 감사히 잘먹겠습니다."

휙 등장한 아멜리아는 퇴장할 때도 휙 사라졌다.

겨우 케이크를 주려고 여기까지 방문을 한 건가.

일단 오늘 한 끼도 못 챙겨 먹기도 했고 단 음식이 땡기기도 하니 시우는 우적우적 케이크를 먹었다.

"음...."

뭔가 기르는 개가 된 기분인 건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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