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1.
궁정의 접객실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화려한 로비.
편안한 소파에 앉은 아멜리아는 바른 자세로 앉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결코 본분을 잊지 말거라.
너는 위대한 메리골드의 이름을 이을 몸이란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렴.
마도의 길을 걷는 데 있어 게을리하지 말고 정진 또 정진하렴.
귀족답게 그리고 마녀답게 살려무나.
마법 공부가 하기 싫어 창고에 숨어든 아멜리아에게 스승님은 처음으로 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하긴 만약 지금 견습마녀가 생기고, 그 견습마녀가 놀고 게으름 피우기만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라면 아멜리아도 스승님처럼 따끔하게 혼을 내겠지.
아무튼 선대 메리골드의 가르침은 아멜리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스승님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을 곱씹으며 자꾸 자꾸만 가슴에 새겼다.
"그건 잘못된 일이에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홍차 잔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나직이 말했다.
아멜리아의 머릿속에는 아까 봤던 장면이 재상영되고 있었다.
제이크와 플로라.
둘은 서로를 연인 관계라고 소개했다.
일반적인 마녀와 남총과의 관계와는 또 다르다.
단순히 겉보기에도 플로라는 제이크를 동등하게 대했다.
웃통을 벗고 가게 안을 활보하는 모습에도 질책하지 않았고 손님들 앞에서 키스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마녀와 노예가 대등이라?
배우고 익혀왔던 것들과의 괴리.
알고 있던 지식과의 괴리에 아멜리아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훌륭한 공연을 보면 두 발로 박수를 쳐야 하는 극장에 온 것 같다.
만약 시우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대한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플로라를 열렬히 사랑하는 듯한 제이크처럼 행동한다면 말이다.
"으!"
아멜리아는 영문 모를 불쾌감에 몸을 부르르 떤다.
몸에 오싹오싹한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불경하다.
그런 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키스는?
"음..."
상상 속의 시우와 아멜리아는 서로의 혀를 물고 빨고 교미하는 민달팽이처럼 베베 꼬이면서 타액을 교환했다.
"으..."
이번에는 한층 더 진한 불쾌감이 부르르 몸을 훑는다.
이상하다 그런 건.
도대체 왜 저런 더러운 행위를 사랑과 친애의 증표로 삼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멜리아는 한숨을 쉬고 잡념을 떨치기 위해 홍차를 들었다.
홍차는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부교수님 환복하고 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걸어 들어 온다.
생각보다 빠르네. 안 그래도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기 지루하던 터였다.
"대금은 미리 지불했으니까...."
그리고 아멜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익숙한 듯 익숙지 않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스타일, 몸에 착 달라붙는 정장과 반짝이는 검은 구두.
어색한 듯 옷소매를 정리하며 걸어 나오는 남자.
아멜리아는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경망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생각도 떠올릴 틈이 없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저 멀끔한 신사는 신시우다.
"감사합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이에요."
"......."
인정하기 싫지만, 왜인지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괜스레 호흡을 의식하게 됐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게 조금 불편하다.
이 몸이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뭐라고 표현하면 좋은 걸까?
인간의 감정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몸이 이렇게 반응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그 감정을 정의할 단어는 아멜리아의 사전에 없었다.
아멜리아는 벌떡 일어났다.
"하... 한결 낫네요."
"그런 것 같아요. 너무 잘 맞아서 움직이기도 편하고."
휘적휘적 팔을 움직이며 옷맵시를 자랑하는 시우.
비록 플로라가 노예와 놀아나는 격식 없는 여자일지는 몰라도 재단 솜씨만큼은 확실했다.
저렇게 움직이는 데도 옷이 헝클어지거나 구겨지는 느낌이 없고, 몸에 바짝 붙는 데도 불편해 보이지도 않는다.
언제나 거적때기 같은 옷만 걸치고 있다가 저런 옷을 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아멜리아는 황급히 시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부교수님."
그런 아멜리아에게 성큼 다가간 시우.
아멜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괜히 치맛자락을 꾹 쥐려다 말았다.
뭔가 이상해.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에게 이렇게 진심 어린 감사를 받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입바른 말로하는 감사는 많이 들어왔지만 이번 것은 농도가 달랐다.
이런 감사를 받아도 괜찮은 건가?
아멜리아는 자문했고 이내 답을 내었다.
물론이다.
옷값으로 피로의 향수를 두 개나 지불했다.
하지만 그에게 옷을 사주기로 한 계기를 생각해보면 또 헷갈린다. 이건 어찌 보면 보상에 불과하니까.
여느 때처럼 평정심을 유지하고 대응하자.
"그럴 것 없어요. 꼴사나운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니까."
평점심을 유지한 채 말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를 힐난하듯 나와버렸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시우의 표정이 살짝 애매해진다.
여전히 표정관리는 못하는 남자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안 되는데.
아멜리아는 뒷수습을 위해 또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도 이렇게 입고 다니세요. 어울려요."
"알겠습니다."
시우는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아멜리아도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2.
멋진 정장을 획득한 시우는 그 길로 마차를 타고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아르스 마그나 타운을 더 둘러보고 싶은 맘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역시 마녀가 바글바글한 장소는 뭔가 위축된다.
차라리 이렇게 업무만을 끝내고 돌아오는 것이 나았다.
아멜리아는 돌아오는 내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그 덕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완전히 절단.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돌아오게 되었다.
마차는 곧장 시우가 살던 축사로 향했고 시우는 짐을 챙겼다.
정 들었던 축사여 이제 안녕이다.
물론 오늘 밤에 짐을 옮겨야 하긴 하지만.
"이제부터 제 숙소로 가는 건가요?"
수건 하나를 크게 펼쳐 안에 내용물을 담아 보따리처럼 만든 시우는 마차에 오르며 물었다.
"그래요."
그렇게 또다시 이동한 마차.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교사 중앙 근처에 있는 별관이었다.
정원이 있고, 분수대가 있고 어지간한 5성급 호텔 부럽지 않은 커다란 저택이다.
파란 지붕과 하얀 벽이 인상적이었다.
"부교수님."
"네."
"마차가 잘못 온 것 같은데요? 여기는 부교수님의 숙소입니다."
여기는 아멜리아의 숙소이다.
숙소라는 단출한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으리으리한 건물이었지만.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니?
시우가 되물을 틈도 없이 아멜리아는 마차를 벗어나 저택의 문을 열었다.
"들어와요."
눈을 끔뻑이다 아멜리아를 따라 들어간 시우.
어째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중앙 계단을 빠르게 거쳐 올라가는 아멜리아.
이렇게 넓은 저택에 사용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으로 관리 중인 것인지 새로 지어진 것처럼 깔끔하다. 저 높이 걸려있는 샹들리에에도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았다.
2층에 도달한 아멜리아는 복도 끝방으로 시우를 안내했다.
아무리 둔감한 시우라도 이쯤이 되자 슬슬 눈치를 챘다.
"이쪽이에요."
"저, 혹시나 싶어 드리는 말씀인데... 앞으로 제 숙소가 이곳인가요?"
"당신은 제 전속 노예예요. 당연하지 않나요?"
아멜리아와 같은 숙소에서 생활?
시우는 하늘이 무너지고 바닥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당연하다고? 당연하지 않다.
"하, 하지만 부교수님 노예인 제가 어찌 감히 부교수님과 같은 건물에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방은 많고 숙소는 넓어요. 하나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내어줄 수 있어요."
그 아량을 평소에 베풀어 주었으면 시우는 지금보다 훨씬 아멜리아를 좋게 생각했을 텐데.
이건 과연 누구를 위한 아량인가?
"부교수님 제가 너무 송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럴 것 없어요. 제 조수가 되었으니 마땅히 그에 걸맞은 품위 있는 생활을 해야죠."
아멜리아와 같은 저택에서 생활하는 것에는 아주 커다란 문제나 두 개나 있다.
우선 첫 번째 문제.
아멜리아가 시우를 이렇게 가까이 두려는 이유는 뻔하다.
바로 죽도록 부려먹기 위해서이지 않겠는가?
굳이 시우를 찾아오거나 호출할 필요도 없다.
한 지붕 아래에 있으니까.
단순히 노동뿐이라면 크게 문제가 될 것 없을 것이다.
문제는 아멜리아와 24시간 내내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
안 그래도 어색하고 불편한 상대인데 이제는 자기 전까지 얼굴을 봐야 한다. 서류 정리와 업무 보조만을 돕는 조수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두 번째 문제.
마법 연구에 차질이 생긴다.
시우가 원래 살던 축사는 아카데미 최외곽 한적한 동산 위에 존재했다.
연구를 위해 사용되는 극소량의 마력 정도는 감지될 일이 없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이곳은 어떨까?
즉각 아멜리아의 촉각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면 밤늦게 인적이 없는 축사로 향한 뒤 실험하던가 해야겠지.
그 말은 마법 연구가 한참이나 더뎌진다는 의미이다.
다른 건 몰라도 탈출이 늦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부교수님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 이곳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에 살던 숙소로 돌아가겠습니다."
한편 아멜리아는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는 시우가 이해되지 않았다.
원래 그에게는 적당히 연구동 근처의 사용인 숙소를 줄 예정이었다. 시설이 그렇게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곳으로 말이다.
하지만 과거 자신의 소소한 복수가 산비탈에서 구른 눈덩이처럼 불어나 시우를 덮친 것을 생각해보면 그간의 보상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졸속으로 원래 아멜리아가 손님방으로 사용하던 방을 내어주기로 한 것인데.
왜 이렇게 버티는 걸까?
"짐 놓고 오세요."
그리하여 보게 된 앞으로의 삶의 터전.
노심초사하며 도망칠 각만을 보고 있던 시우는 방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무리 화려한 저택이라도 사용인을 위한 숙소는 허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우의 숙소로 배정된 방은 아무리 봐도 사용인을 위한 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손님을 극진히 모시기 위한 방에 가깝겠지.
축사보단 낮지만 마이클 조던이 전력으로 점프해도 닿지 못할 정도의 천장.
소파, 찬장, 옷장 등의 가구도 시우가 지나가다 부딪혀 흠집이라도 낸다면 평생 무상으로 노예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비싼 티가 줄줄 흐른다.
게다가 바닥에 깔린 융단은 밟기 죄스러울 정도여서 시우는 저도 모르게 융단을 피해 걸었다.
"이쪽이 거실, 이쪽은 침실이에요."
게다가 방 안에 방이 두 개나 더 있다.
시우가 들어오자마자 본 넓은 방은 방의 거실이었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침대와 책상이 놓인 침실이 나타났다.
거실 쪽 가구가 그랬듯 침대도 위에 깔린 매트리스도 보통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이제는 관리인의 방이니 좋을 대로 하세요."
시우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지막 남은 한 방을 확인했다.
침실 옆에 바로 붙어있는 것은 커다란 욕조.
현대 시설과 거의 흡사한 욕조의 물을 틀어보니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온다.
얼음장 같은 물로 하는 샤워도 이제는 안녕이라는 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정말 제 방이 맞나요?"
"그래요, 오늘 하루는 휴가이니 푹 쉬고 내일 오전부터 연구동으로 오도록 하세요."
아멜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시우는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안을 구경했다.
아멜리아가 왜 갑자기 이런 친절을 베푸는가에 대해서는 살짝 뒷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