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3화 (33/917)

#33

1.

아멜리아의 부탁을 들은 플로라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가 양장점이라는 건 알지? 드레스를 만드는 곳이야."

"옷을 만드는 건 게헨나에서 이곳이 가장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플로라는 곰방대를 뻐끔뻐끔 물더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우가 보기엔 뭐랄까 과일가게에 가서 간고등어 한 손을 달라고 부탁하는 손님을 보는 가게 주인의 표정이랄까.

"칭찬은 고맙지만 그다지 내키진 않는데. 나는 예쁜 여자가 입어주는 게 좋은걸?"

당장 이대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 눈앞의 상대가 남작이기 때문일까?

괜히 대신 불안해지는 시우.

"대금은 지급할게요."

"대금이 문제가 아니라. 의욕이 없으면 일하지도 않아."

아멜리아는 플로라의 말에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아주 작은 향수병이다.

향수병이라기엔 앰플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15mL나 될까 한 조그마한 유리병에는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던 플로라의 시선이 향수로 옮겨진다.

"혹시 이거 '피로의 향수'야?"

"그래요. 이 향수를 두 개 주겠어요."

"두 개나?"

느슨했던 플로라의 태도가 뒤바뀐다. 그녀는 만연의 미소를 지으며 아멜리아의 손에 있던 병을 건네받았다.

플로라의 드레스가 마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면 아멜리아의 경우는 향수다.

아멜리아 자체가 돈을 버는 것에 관심이 없으니 그 수요에 비해 수량은 지극히 한정되어 그 가치가 더더욱 높았다.

그런 고로 그녀가 만든 향수는 붉은 지붕 살롱에서 매우 비싼 값에도 입고 되자마자 팔리는 인기 품목이라고 한다.

참고로 아멜리아의 향수를 받아 유통하는 것은 소피아였기에 타카쇼에게 전해 들은 기억이 있다.

과연 타카쇼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플로라는 기뻐하며 아멜리아의 향수를 받아 들었다.

"좋아, 이 정도면 의욕이 샘솟네. 먼저 치수를 재야겠으니 이리 와보련?"

당장 작업에 착수하려는 듯이 기뻐하는 플로라.

그때 양장점 한구석에 드리워진 휘장이 걷히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아, 손님이야?"

훤칠한 키가 금발, 하이틴 미드에서 축구팀 주장을 맡을 것 같이 생긴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제이크,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자고 있는데 옆에 네가 없어서 깜짝 놀랐지 뭐야?"

"귀엽게 굴기는."

그윽한 나르시시즘이 느껴지는 목소리의 남자는 청바지만 입은 채 뚜벅뚜벅 다가와 자연스럽게 플로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놀랍게도 그 자세에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제이크 로버트라고 합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아멜리아에게 인사를 끝내고 그대로 플로라에게 키스했다.

플로라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아멜리아와 시우의 눈앞에서 아메리칸 스타일로 뜨거운 키스를 시작하는 한 남자와 한 마녀.

"쭈웁... 쮸웁..."

"츄르릅 츄르르르르르릅."

시우는 벙쪘다.

남사스럽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눈앞에 손님을 두고 저 짓을 하는 게 맞나?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게 아니다.

플로라와 제이크의 관계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떤 의미냐면 마녀와 노예의 관계 같지 않다는 것이다.

마녀에게 편하게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대하는 태도 역시 태연자약하다.

노골적으로 서로의 사랑을 과시하는 눈꼴사나운 커플.

즉, 대등한 관계

그렇게 비쳐졌다.

괜히 이쪽이 쑥스러워지는 기분이어서 슬쩍 아멜리아를 보았다.

"......!"

저 눈썹의 모양은 경악 75% 정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곧은 속눈썹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입을 쩍 벌리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플로라의 혀가 제이크의 혀를 감싸고, 입술은 포개진다.

천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혀끝에는 타액의 실 한 가닥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후우, 너무 뜨겁잖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네가 오죽 사랑스러워야지. 그럼 빨리와 허니."

플로라는 키스가 끝나고 제이크의 엉덩이를 팡 쳤고 제이크는 느끼한 대사를 던지고는 떠나갔다.

아멜리아는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닌가 슬쩍 눈을 비볐다.

그러나 저 멀리 휘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제이크를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잘생겼지? 그렇게 빤히 봐도 안 줄 거야."

플로라는 아멜리아를 보고 슬쩍 웃었다.

묻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궁금증이 치솟은 아멜리아.

결국 점잖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게 되었다.

"저 남자도 노예인가요?"

"노예긴 하지만 남자친구지."

남자친구? 노예인데?

커다란 혼동.

눈으로 봤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하다.

어떻게 마녀가 노예와 연인 사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귀엽지 않아? 7살 때 고아원에서 주워와서 길렀어. 저렇게 잘 자랐어도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라니까."

아멜리아는 일부 마녀가 노예와 이렇고 저런 관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극히 마녀답지 못하는 행동이라 생각해 경멸했다.

마녀란 무릇 마도의 길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된 자가 아니던가?

남자 따위에 한눈팔려 게으름을 부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흡사 정말 연인처럼 구는 모습이란...

"뭔가 이상하네요."

"그렇게 치면 그쪽도 만만찮지. 사랑하는 노예에게 고운 옷을 입히려고 양장점까지 찾아왔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아멜리아는 발끈해서 반박했지만 플로라는 그렇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무튼 달링이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시간을 끌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이쪽으로."

"아니라고 했잖아요."

"알았어, 왜 화를 내고 그래?"

플로라는 칼날 같은 하이힐로 또각또각 걸으며 시우를 이끌었다.

2.

시우는 양장점 안쪽 재단실로 들어왔다.

아멜리아는 뚱한 표정으로 로비에 남는 것을 택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로비와 달리 재단실에는 여러 가지 장식과 보석 그리고 마네킹으로 가득해 어수선한 편이었다.

"거기 발판 위에 팔 벌리고 서 볼래? 치수를 재야 하거든."

"네."

시우가 어정쩡하게 굳어 있자 플로라는 발 받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플로라는 줄자를 꺼내 들더니 시우의 허리둘레부터 재기 시작했다.

사무적인 손놀림으로 허리에 거쳐 가슴 밑, 가슴 중앙, 팔다리의 길이를 기록하는 플로라.

입이 심심했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귀여운 마녀님을 모시는구나? 선대 메리골드는 조금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어...음..."

"편하게 말해도 돼. 지금 너는 고객인걸?"

플로라는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마녀였다.

아까 노예와 연인관계임을 당당히 밝힌 것을 보고 난 직후라 그런지 다른 마녀에 비해 깔보는 듯한 느낌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해주는 느낌이라 시우 역시 조금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그럼 혹시 아멜리아 님께 받은 향수가 어떤 향수인지 여쭐 수 있을까요?"

"아, 피로의 향수?"

플로라는 아까 받은 향수를 자랑하듯 꺼냈다.

"이건 향기를 맡자마자 굉장한 피곤함이 느껴지는 향수야. 과로한 것처럼 몸은 뻐근해지고 눈꺼풀은 저절로 감기고 억지로 깨어있으려고 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음... 그렇군요."

"이상하지?"

이상하고말고.

피로회복제도 아니고 피로생성제라니 만년 수면 부족에 시달려온 시우에게는 조금도 필요 없는 물건이다.

"마녀는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서인지 숙면이라는 게 불가능해. 고된 하루를 끝내고 푹 잠이 든 다음 날 상쾌하게 일어나는 느낌은 영영 느낄 수 없게 되는 거지. 잠깐 숨 들이쉬어 볼래? 크게."

"후웁."

숨을 들이켠 상태로 가슴 사이즈를 한 번 더 잰 플로라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향수가 있으면 그때 그 시절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 향수를 느낄 수 있는 향수라고 해야하나?"

"수면제나 다른 마법으로는 안 되나요?"

"수면제나 수면 마법이 있으면 푹 잘 수 있긴 하지만 인위적이잖아. 중요한 건 자연스러움이라는 거야."

"그렇군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녀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게 한 두 가지도 아니고 그러려니 한다.

"치수는 다 쟀다. 내가 마음껏 꾸며도 괜찮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양복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는 전문가의 손에 맡기는 것이 최고다.

"너는 허리가 가늘고 라인이 예쁘니까 이탈리안 스타일이 좋겠네. 패턴은 빼고, 어깨 끝에 주름을 넣어주고, 포켓은 라바르카로, 버튼은 스트라파타 스타일로 좋아 좋아. 어깨 패드는 필요 없었을 것 같고... 벤트는 댄디한 느낌을 살리려면 없는게 좋겠지? 라펠은 좀 넓게 잡자. 다리가 더 길어보일 거야. 커프는 없이, 좋아."

플로라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이.

그녀가 챙겨왔던 옷감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옷감을 누비기 시작하는 수십여 개의 바늘과 가위, 그리고 실.

공장에서 짜내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옷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시우는 흉내 낼 수도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염동이었다.

"대, 대단하네요."

멍하니 그것을 구경하던 시우가 저도 모르게 읊조리자 플로라는 웃음 지었다.

"400년 넘게 옷만 만들고 있으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400년이요?"

마녀들의 수명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보통은 100년 길어야 200년 정도가 되면 다음 대에 낙인을 넘긴다.

마법적인 영감과 기량이 벽에 막혀 더는 연구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좀 많지? 나는 마법보다 옷을 만드는 게 더 즐겁거든. 선대에겐 죄송하지만 어쩌겠어? 이렇게 방탕한 마녀를 견습마녀로 들인 게 잘못이지."

품위 없게 키득거리던 사이 1분도 지나지 않아 슈트 한 벌이 완성되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도 이것보다는 느릴 것이다.

"한 번 갈아입어 봐."

눈 깜빡할 사이에 텅 비어있던 마네킹 위에 슈트 한 벌이 완성되었다.

시착 결과.

거울 앞에선 시우는 감탄했다.

다크 네이비 원단으로 짜인 슈트가 몸에 꼭 맞게 붙어있다.

치수만 재고 만든 것이 분명한데 허리를 숙이거나 몸을 돌려봐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무엇보다 옷맵시.

이대로 현세로 나가면 이 옷은 어디서 맞췄냐고 질문 공세가 쏟아질 정도로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

매일 누더기에 가까운 작업복만 입다가 이런 훌륭한 옷을 입게 되니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어색할 정도로 달라 보였다.

"이래서 옷이 날개라고 하는 거군요."

"잘 나왔지?"

당연히 마음에 들어 할 것을 알고 있듯 한번 웃고 마는 플로라.

"슈트는 많이 입어봤어?"

"아니요, 게다가 한참 전이라..."

"아랫 버튼은 잠그는 게 아니야. 그리고 넥타이도, 이리 와 봐."

플로라는 시우가 어색하게 묶은 넥타이를 풀더니 다시 곱게 묶어주었다.

그러면서 한번 몸 선을 쭉 훑어본다.

"나쁘지 않네. 발 사이즈가 똑같으니까 구두는 제이크가 신던 걸 줄게."

"아,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감사하다는 말은 밖에 계신 마녀님께 해야지."

플로라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런 마녀 아래서 살면 참 편안하고 행복할 것 같은데.

왜 하필 아멜리아의 전속 노예가 되어버린 걸까.

푸념 아닌 푸념을 하게 되는 한편 그래도 이런 멋진 옷을 입게 해 준 아멜리아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5년이나 개고생을 하게 한 상대지만 막상 이런 선물을 받으니 또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머리랑 수염도 좀 정리하자, 지저분하게 이게 뭐니."

플로라는 마법을 외워 시우의 얼굴을 깨끗하게 닦고는 포마드 기름으로 그의 머리를 말끔하게 넘겼다.

그리하여 완전체로 거울 앞에 선 시우.

조금 과한 느낌은 있지만 바버샵에서 한 것처럼 깔끔하게 넘긴 포마드와 고급스러운 슈트.

그리고 넥타이와 반짝이는 구두까지.

이대로 중소기업 면접에 간다면 광탈할 것이다.

면접관에게 '저 새끼는 금수저라 사회생활 적응이 쉽지 않겠군'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테니 말이다.

"부티가 좔좔 흐르네. 부잣집 도련님 같아. 이제 자랑하러 가야지."

플로라는 시우의 등을 떠밀었다.

시우는 휘장을 걷고 재단실 밖 아멜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로비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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